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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단결 송가〈형제자매들 한자리에 모였네〉

[인터넷료녕신문] | 발행시간: 2019.09.05일 09:22



80년대 장백산 천지에 오른 〈형제자매들

한자리에 모였네〉작사자

허동철(왼쪽)과 함께

문화혁명이 끝난 뒤로 1978년 중앙에서 당대표대회도

열리고 정치협상회며 인민대표대회가 련속 열리면서 전국이 한덩어리가 되여 사회주의건설에 동원되고 있었소.

이런 형세에 발맞춰 관련 가사를 부탁하느라 내가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고 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허동철동무가 자기가 쓰겠다고 자진해 나서는 것이였소.

허동철동무는 1965년경에 북경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하고

방송국 문학부에 배치받아 사업하다가 음악부로 옮겨와 전문 가사를 취급하였더랬소. “허동철동무는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했으니 북경정황도 잘 알고 될

것 같소. 한번 잘 써보오." 내가 그렇게 지지를 하며 힘을 실어주었더니 과연 〈형제자매들

한자리에 모였네〉라는

가사를 써 낸 것이였소

자랑찬 영예를 한가슴에 지니고

여러 민족 형제자매들 한자리에

모이였네

우리 수도 북경에서 웃음꽃을 피워가며

나라의 대사를 정다웁게

의논하네

……

주고 받는 말들은 서로서로 달라도

오고가는 이야기는 한송이로

피여나네

가사는 참 재미도 있고 형제민족들이 단란히 모여앉아

나라의 대사를 담론하는 평등하고 단결된 모습을 보는듯이 형상하여 참신한 구사를 이루낸 것이였소.

중앙민족대학을 다니면서 다민족이 단란히 모여사는

다채로운 교정생활을 체험한 바탕이 있고 세계가 탄복하는 중국의 포용민족관에 관한 옳바른 인식을 갖고 있으며 중국조선족으로서의 자부심과 깊은

민족애를 지니고 있었기에 이런 형상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가 있었던 것이였소.

잇달아 가사에 어울리는 곡이 쉽게 나오게 된

것이였소. 여기서 우리 민족의 민요풍으로 곡을 지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여러 민족들이 다 같이 손잡고 이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출 수 있도록

하자는 욕심으로 곡을 지었더랬소.

그리하여 서장이나 신강의 여러 민족들이 많이 쓰는

음악절주형태를 썼지. 그리고 유명한 작곡가인 연변가무단창작조 허원식 선생에게 편곡을 부탁하면서 나의 의사를 밝혔지. 허원식 작곡가는 심양음악학원

작곡학부에 다니면서 체계적으로 작곡을 배운 사람이였소. 그는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부회장, 연변음악가협회 부주석을 담임하였던 분인데 결국 그의

손을 거쳐 그렇게 멋있는 작품이 나왔던 것이요. 그러니 명작이란 다만 작사자와 작곡자 두사람의 손이 맞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여러

요소가 잘 배합되여야 하는 것이요.



1987년

중국음악가협회 제5차대표대회(북경)에 참가한 연변음악가협회 대표들과 함께.

그때 방송예술단 악대에서 이 곡을 방송에 내보내자고

준비 중이였는데 중앙방송국의 정상군(程湘君)라는 녀성음악기자가 취재를 왔다가 곡을 들으면서 누가 썼는가 제목이 뭔가 하더니 그 테프를 가져갔단

말이요.

후에 중국음악가협회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 통전부에서

련합으로 제1차전국민족단결가요응모를 조직하자 그 녀기자는 이 작품을 추천하여 심사위원들 앞에 내놓았소. 그리하여 이 가요는 건국이래 전국적으로

처음 조직한 민족단결가요응모콩클에서 창작 1등상을 받게 된 것이였소.

이건 나의 공로가 아니라 허동철동무와 정상군이라는

한족기자의 공로였소. 그런데도 1983년 북경에서 있은 시상식에 내가 참가하여 상을 받아안게 되였지. 시상식에서는 만리 부총리가 직접 나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며 시상을 해주었더랬소.

개화기를 맞은 80년대

작품들

80년대에 발표된 작품 중에는 또 〈원앙새

한쌍〉이라는

애정가요도 있었소. 그 작품은 1980년 정월에 발표되였지만 기실 가사는 김경석동무가 1961년 12월에 쓴 것이였소.

그는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일보사의 기자,

문예편집으로 사업하면서 그 시기 젊은 세대들의 사랑을 다룬 〈꽃마차〉라는

제목으로 된 가사를 썼지. 그러나 그때는 좌적로선의 경향으로 많은 애정가요들이 비판을 받고 창작일군들은 애정가요를 짓기 주저하던 시기라 발표하지

못했소.

당중앙 11기 3차전원회의이후 문예계의 창작활동이

활기를 띠게 되면서 용기를 가지고 수정작업을 하였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제목부터 〈원앙새

한쌍〉으로

바꾸고 ‘마차'를 ‘자동차'로, ‘공사마을'을 ‘고향마을'로 바꾸면서 완성하였던 것이였소.

그리하여 〈원앙새

한쌍〉은

1980년 1월에 연변일보에 발표되고 그해 9월에 송대윤가수의 독창으로 연변인민방송국 매주일가프로로 방송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였소. 그후

기악곡연주로도 방송되였고 중국음악가협회 기관지인 ‘가곡’음악잡지 제9기에 한문으로도 발표되였소.



〈나는야

맹인가수〉작사자 리상각(오른쪽)시인과

함께.

그 시기에 〈나는야

맹인가수〉(1985년)라는

노래도 완성하였더랬소. 그때 나는 연변장애자예술단의 고문으로 초빙되였는데 장애자들을 위한 노래를 짓기 위해 리상각시인과 함께 장애자예술단에 가

체험생활도 했지. 실은 나의 가정에도 2급 장애를 앓는 큰딸이 있었던 것이요. 문화혁명시기 나때문에 심적타격을 받고 그렇게 되였는데 나는 늘 그

딸 앞에서는 죄인이 된 마음이였지.

장애자들을 위한 노래를 잘 지어내려 마음 먹은지

오래된 터라 리상각시인이 쓴 가사를 보고 바로 곡상을 무르익혔더랬소.

나는야 맹인가수 꽃무대에

나섰다네

이 기쁨 주신 당을 소리높이

노래하네

가야금아 내 동무야 둥기당당 울려라

행복의 노래 불러 온세상에

전하리라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진짜 두눈을 못 보는

맹인녀가수였소. 목소리도 좋고 인물체격도 좋고 감정처리도 잘하였는데 장애인들의 기개를 잘 반영하여 그의 노래는 전국종업원문예경연무대에서

박수갈채를 받았고 수상도 하였더랬소.

그 시기 김성휘시인과도 많은 합작을 하였지.

김성휘시인은 처음부터 함께 작품활동을 해온 분이였소. 1978년경에 〈진달래〉라는

작품을 완성한 뒤로 〈그리워라

정든 모교여〉(

1982년), 〈룡정고급중학교

교가〉,〈대학생

원무곡〉(1989년)

등을 창작하였소.

1981년 김응룡 선생과 합작한 〈아

두만강〉은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조직한 나의 작품음악회의 고조를 이룬 작품이였소. 이 작품은 연변의 력사, 우리 민족 력사를 돌아보게 하고 그 어떤 풍상고초

앞에서도 우리 민족은 두만강의 흐름처럼 도도히 흘러흘러 바다로 세계로 나아감을 상징하였지.

눈물에 젖었던가 울분에

젖었던가

한 많은 두만강 갈래기도

울었네

투사들의 넋이 어린 천리길

굽이굽이

진달래 붉게 피네 렬사비

빛뿌리네

아 두만강 맑은 흐름아

번영하는 우리 연변 노래하며

흘러라




동희철작품연구회에서의 작곡가 동희철.

예술성이 깊고 규모가 장대한 《빛나라

조국이여》

80년대 작품중에서 〈빛나라

조국이여〉(김경석

작사 1983년)는 아름답고 장엄한 선률로 대규모의 장을 이루는 대합창곡이였지. 준엄한 시련을 이겨내고 번영과 발전으로 내달리는 희망찬 조국을

격조높이 노래한 이 가곡은 대합창 창작에서의 가장 전형적인 대표작이라 말하고 싶소.

보통 한수의 가요는 가사가 씌여지고 후에 곡이 지어는

경우가 많지만 가요 〈빛나라

조국이여〉는

먼저 곡이 지어지고 후에 가사가 지어졌던 것이요. 1983년도에 연변인민방송국에서 방송개시곡 응모를 하게 되면서 곡을 짓게 되였소.

그해 여름에 김경석동무가 우리 집을 방문하러 왔길래

내가 낮은 음성으로 이 곡을 들려주었지. 그러니 조국 찬가나 송가로 되면 좋겠다고 하더구만.

오성붉은기 찬란휘 휘날리며

문명을 꽃피우는

중화인민공화국

……

웅위론 만리장성 슬기를 자랑하고

굽이치는 황하 장강 새 기상

노래하네

…….

준엄한 시련속에 새 력사 펼쳐가며

근로한 형제민족 새 강산

수놓네



1985년 여름

연길에서 조남기 조룡호 등 지도자들에게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교사연구회 사업을 회보하는 동희철(왼쪽)고문.

김경석동무가 지어온 가사는 예전과 다른 특수한 년대의

조국을 구가하였고 문명한 조국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나라임을 구현하였던 것이였소. 개혁개방과 4개현대화를 실현하는 길은 평탄하지 않지만 조국은

모든 난관을 이겨내면서 중화민족의 새 력사를 엮어가고 있으며 근로용감한 중화민족은 조국의 강산을 더욱 아름답게 건설할 것이라는 희망과 신심을

구현하였던 것이요.

이 가요가 완성되자 1983년 국경절을 계기로

발표되였고 연변라지오방송국과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국경절 프로로 방송하여 광범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지.

여기에서 특기하고 싶은 것은 당시 연변주당위 조남기

서기와 지도일군들이 하던 회의를 도중에 잠시 중지하고 이 가요를 심사비준함으로써 20여년간 연변인민방송국 방송개식곡으로 전파를 타고 세상에

울려퍼졌던 것이였소.

조남기 서기는 이 가요에 대해 “듣고보니 아름답고

장엄하고 무게 있는 송가풍의 곡인데 참 괜찮구만…” 하고 평을 내리셨던 것이였소.

길림신문 글/ 김청수 영상사진 / 김성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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