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거의 매일 저녁 거실에서 나랑 같이 드라마를 본다. 뭐 같이 보는 것까지는 좋다. 문제는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드라마 주인공이
대사를 한마디 하면 남편은 세마디를 한다. 무엇보다 비판, 비판에 능하다. 말이 안된다면서 대놓고 야유를 보내기도 하고 대사가 유치하다며
키득키득 비웃기도 한다. 그러다가 한번은 짜증이 좀 났다. 뭐야, 수준 낮은 드라마나 보고 있다고 지금 날 비꼬는 거야? 몰입이
안된다고.
눈살이 꼿꼿해지는 날 보며 남편이 한마디를 한다.
“나는 그냥 드라마를 보는 너랑 같이 있으려고 할 뿐이야. 그러다가 진짜 너무 말이 안돼서 한마디 하는 것 뿐이라고. 이젠 아무 말도
안할게.”
나는 그날 처음 남편이 나를 위해 드라마를 봐주는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를 볼 때 남편은 항상 배 우에 아이패드를 장착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나는 늘 이런 식이였다.
선의는 상상도 못하고 항상 살짝 비꼬아서 듣거나 나를 비난하는 것으로 상황을 해석했다. 상대의 행동을 선의로 해석하는 데 취약했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악의’를 접하게 된다. 리기적인 사람들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보기도 했다는 흔하디 흔한 리유로 일단
경계하는 것이 피해를 줄이는 최소한의 보호장치가 되는 것이다. 이런 자기보호 행동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휘두른다면 분명 둘 다
다친다.
직장 동료와 출장을 가서도 그랬다. 시간이 빠듯하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욕실에서 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욕실 앞에 동료가 서
있었다. 재촉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좀 더 서두르지 않고 뭐해? 그런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공격적으로 물었다.
“거기 왜 서있어?”
“도와주려고.”
그는 나를 재촉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수건이라도 건네주려고 엉거주춤 서있었던 것인데 나는 그의 선의를 알아보지 못했다.
관계망에서 이리저리 치였거나 배신을 당한 경험이 많을수록 상대가 나를 위하고 배려한다는 전제를 깔기가 어렵다. 당연한 결과라 생각된다.
타인이 나를 보호해준 적이 별로 없으므로 스스로 보호색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경계심이 발달하고 다른 의도나 없는지 탐색해야 했다. 그래야 또
당하지 않고 그나마 남은 자존심을 지키며 정서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자꾸만 가시를 세우게 된다. 안전한 환경이라는 걸 깨닫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상대의 말과
행동이 선의와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믿음은 마음의 전쟁을 끝내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길이다. 계속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나도 상처받고
상대도 상처받는다. 그래서 고깝게 받아들이는 나쁜 습관을 고치려 애쓰는중이다. 상대가 지치기 전에 말이다.
친하게 지내고 있는 선배가 입버릇처럼 해주는 말이 있다.
“옷을 뒤집어입은 것 같아 쳐다보는데 ‘왜요? 전화번호 드려요?’하고 반갑게 물어와도 당황스럽고, 정말 마음에 드는 리상형이여서 쳐다본건
데 왜 꼬라보냐고 하면 기분이 잡친다. 그래도 선의로 해석한 전자가 낫지 않겠어?”연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