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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세련된 문화와 세계최고의 두뇌기구를 몸소 경험한 대표적학자 –김광림교수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9.11.07일 10:31
  민족사와 많이 겹치는 그의 140년 가족사

  (흑룡강신문=도쿄) 김광림교수는 1963년에 조선족 5세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서위자에서 태여났다. 그의 고조부는 19세기 60-70년대에 함경북도 북부의 두만강 연안에 위치한 회령에서 태여나 룡정칠도구로 이주했고, 후손들이 왕청 백초구, 신흥 등 지역을 거쳐서 왕청서위자에 정착하였다. 족보상 김해 김씨이고 선조는 아마 경기도, 강원도를 거쳐서 함경북도 회령으로 이주한걸로 추정된다고 한다.

  가족사측면에서 선조는 조선반도남부 태생이고 고조부는 북부태생이며 본인세대는 중국태생이여서 공간이동적인 측면에서 거의 조선반도를 횡단한 셈이고 시간적흐름으로는 민족사와 결을 같이한다.



  조부는 러시아어에 능통하여 러시아 연해주에서 목공일에 종사하다가 왕청으로 귀환하였고, 큰아버지는 항일시기 왕청 백초구에서 지역의 유지들과도 의형제도 맺고 항일련군의 요청을 받고 항일련군에서도 좀 활약했으며, 부친은 흑룡강 밀산에서 황무지개척자로서 이주민생활을 하였고 그후는 공산당 토지개혁의 련락망역할도 담당했다고 한다. 한번은 왕청 영창마을에서 일본군인이 남긴 옷들을 입은 마을사람들이 일본 패잔병으로 오인받아 러시아군인들에게 살해당할 위험이 있었는데 조부가 러시아어통역을 맡아 류혈사태가 없이 무난히 해결한적도 있다고 전언한다. 유감스럽게도 조부는 광복후 일본군의 잔해 세균병기에 사고를 당해 별세했다.

  김교수는 본인의 가족사의 가장 큰 격변기를 해방전쟁(1945~1949년)과 항미원조(6.25)시기로 서술한다. 숙부와 당숙부가 조선인의용군으로서 해방전쟁에 참전하였고 그중 한분은 왕청묘령에서의 국민당계렬 토비세력 토벌시 전사하여 렬사로 추모받았다. 숙부 2명과 큰누님이 항미원조에 참전하였고, 그중 큰누님이 전쟁중에 큰 공을 세워 전쟁당시 조선정부로부터 훈장도 수여받았다고 한다.

  1950~1960년대에 작은 조부와 부친도 로동모범으로 정부 표창을 받았고, 1960년대 중후반부터 1970년대 중후반까지 김교수의 형제도 많은 이들과 비슷하게 문화대혁명이란 격변기를 겪었다고 한다.

  회억의 단서만으로도 모범적이고 진취적인 가문으로 추정된다. 그뒤의 항미원조에 참전한 당숙과 막내숙부는 조선에 그대로 남아 정착을 하게 되였다. 막내숙부는 나중에 황해도 군사관제위원회(퇴역군인관리역할부서에 해당함)의 위원장으로 군인생활을 마감했다고 한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중국의 개혁개방의 영향을 받아 하해와 출국 붐으로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게 되였고 김교수의 형제세대들은 한국으로 많이 이주하였으며 조카세대들은 대도시, 연해지역을 거쳐 세계각국으로 이주하여 그중 대부분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 전국각지, 세계각국으로의 조선족 대이주 시대의 력사와 많이 겹치고 그런 현상의 표상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군인을 많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가문임이 가히 읽혀진다.



중국에서 조선의용군으로 조선전쟁에 참가한후 조선에 남은 당숙.

  일본과의 인연

  1980년대초에 김교수의 큰 형님이 늘 북경라디오방송을 들으면서 스스로 일본어, 영어를 부지런히 독학하여 습득했다고 한다. 김교수도 어릴적부터 알게모르게 큰 형님의 영향을 받아 라디오를 통해 일본어공부에 재미를 붙였고 자신의 전공이 되였다. 그런 그가 1982년에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후 당시 일본어학과로는 최고급으로 유명한 동북사범대학 외국어학과 일본어전공에 입학하게 되였다. 4년간 언어학을 부단히 갈고 닦은 결과, 학식과 실력을 인정받아 1986년에 졸업하자마자 민족의 대표대학인 연변대학 조교로 부임하여 2년동안 일본어학 교편을 잡게 되였다.

  매사마다 꾸준히 하는 김교수인지라 당시의 일본국문부성 장학금을 제공받아 일본어를 익히고 일본문화를 체험하는 일본어연수생에 선발되여 1988년에 일본으로 류학하게 되였다. 중일 량국지간의 국가급 교육관련 교류사업으로서 류학자금은 일본국문부성이 전부 제공하고 선발은 중국의 국가교육위원회가 한 것이다.



  일본국문부성은 당시 각 나라의 일본어전공 3학년생을 위주로 일본으로 초대했지만 중국에서는 상대적으로 대학을 마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유망한 교육자를 중심으로 선발되였다. 당시 연변대학에 명액이 한명밖에 부여되지 않았고 조건은 30세이하의 사상배경이 좋으며 기혼자인 일본어관련교육자를 선발했다고 회고한다. 절호의 기회인지라 너도나도 쟁취전에 가담하여 경쟁이 치렬했지만 종합적인 평가, 선발을 거쳐 김교수가 선발되는 영광을 누렸다. 당시 30세이상 지원자들의 불만으로 인해 선발이 한번 뒤엎였다가 30세이하여만 하는 필수조건에 부합되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외사담당이였던 정판룡 부교장(당시)의 원안지시대로 재선발되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서 매우 행운스러웠다고 강조하였다. 본인은 겸손하지만 결코 행운만 따른 것이 아니고 실력과 품덕이 단단히 겸비되였으리라 추정된다.

  재선발된후 자료제출기한이 다가와서, 김광림교수는 신속히 각종 자료를 지참하고 북경의 국가교육위원회 아시아국으로 향했다. 당시 국가교육위원회아시아국의 간부가 "당신네 조선족들은 일본어실력이 뛰여나서 안심해라"고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처음 방문이라 생소하기 그지없던 북경에서는 대학동창생인 북경대학의 김훈씨(현재 북경대학교수임)의 도움과 안내로 국가교육위원회를 직접 방문하여 순조롭게 자료제출을 마치고 들뜬 마음을 조이며 일본행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회고한다.

  김교수는 북경외국어학원에서 연수를 받은후, 드디여 10월 3일 일본류학의 길에 오르게 되였다. 류학하기 전날인 10월 2일, 마침 88서울올림픽의 페막이 있었고 한국은 메달수로 4위라는 쾌거를 거두었다한다.

  10월3일, 김교수는 일본의 유명국립대학인 츠크바대학(筑波大学)연수생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땅을 밟았다. 다른 나라들의 류학생들은 3학년학부생이 상대적으로 많았지만 만 25세로 학생생활을 다시 시작하였다.

  본인이 말하기를, 조선족들은 묘하게 조선족동포를 잘 찾는다. 당시 츠쿠바대학에 조선족동포류학생들도 5,6명 있어서 자주 만나 교류와 모임을 많이 가졌다고 한다.

  조선족동포 관련 공동체에 줄곧 몸담아 실천

  김교수는 일본에 유학한 연변대학 교수들의 네트워크로 당시 동경대학방문학자신분으로 일본주재중인 한국인관료출신故동훈선생 (박정희정권 청와대 정무담당비서관 출신, 현 통일부 옛통일원 4대차관 력임함)씨를 알게 되였다. 동훈선생의 물심량면의 도움과 지원하에 연변대학 김동화교수(당시 동경대방문학자), 김호웅교수(당시 와세대대학 방문학자)등 선배교수들을 따라1990년5월에 "동방학우회"란 일본의 첫 조선족단체 설립에 참가하였다. 이 단체 구성원중에는 중국사회과학원 일본판사처대표, 중국국제려행사 일본사무소소장, 중국국제도서출판사 일본사무소소장, 남개대학 일본연구소 소장 등 당시 중국의 각 기관의 중역을 맡고있었던 조선족동포분들이 다수 있었다. 김교수는 동방학우회 설립과정에 김호웅교수가 엽서로 된 "손에 손잡고" "함께 일어서자" 등 격문으로 모임참가를 열성가득하게 독려했던 기억을 감격에 찬 어조로 되살리였다.



  후날에 연변대학교 고문직도 력임한 동훈선생은 일본내에서의 지원뿐만 아니라 또 자신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중한수교 한참 이전인 1988년부터 정판룡교장과 합의하여 매년 연변대학 교원 7-8명에게 일본류학비를 지원해줬다. 동훈선생은 그야말로 초창기 류학생들의 멘토적역할을 해주면서 조선족동포들의 인적네트워크와 공동체구축을 뒤받침해준 인격자로 추정된다. 그때 마침 김교수는 츠쿠바대학에서 일본 최고의학부인 동경대학 대학원석사과정으로 진학하게 되였다.

  동방학우회는 그해 6월하순에 제1차 공식활동으로 고려신사견학을 조직하였고, 제2차 활동으로는 국제고려학회에 참가하였으며 8월에는 2주동안 25명 가까이 가족동반 모국방문단으로 한국을 체험하였다고 한다. 고베항에서 출발하여 현해탄을 넘어 부산을 거쳐 포항제철, 천안독립기념관 등을 견학하면서 서울로 상경하였다. 후날 통일원장관 및 국무총리를 력임한 이홍구 대통령외교안보특별보좌관이 접견해주었고 강연도 겸해주었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서울대규장각, 현대사회연구소 등도 견학하여 매우 가치있는 모국방문과 좋은 추억이라고 상기하였다.

  그해 년말엔 동경YMCA의 회의장소에서 재일교포들과 송년회도 하였다. 김교수는 동방학우회에서 견식과 시야를 많이 넓혔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토록 훌륭한 단체였지만 초창기의 주요 구성원이였던 단기 방문학자들의 귀국 등으로 지도부 공백이 생기고, 인원류동이 많다보니 안타깝게도 유명무실하게 되여 침체기에 처하게 되였다고 깊은 아쉬움을 느꼈다. 동방학우회의 침체원인중에 인원류동 등 여러가지 요소도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이고 궁극적인 원인은 초창기의 조선족들이 경제기초가 너무 빈약했다는 것이다. 후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통감한다고 김교수는 진단한다.



  1992년 초여름에 성립된 연변대학 일본학우회는 연변대학으로서는 해외에서 처음으로 되는 학우회조직이여서 매우 획기적인 경사였고, 그때부터 흥성하여 현재까지 순조롭게 운영되는 모범적인 학우회로 발전되여 왔다. 김교수는 연변대학 일본학우회의 초창기 멤버로서의 제2기, 3기 회장을 력임했다. 학우회의 초기역할은 공항마중 등 연변대학 류학생에 대한 초기안착에 필요한 각종 배치, 수속 등을 지원해주는 일이 주요업무였고 반가운 학우의 정으로 충실히 수행하였다고 한다.

  1997년에 그는 박사론문작업때문에 근 4년을 봉사한 학우회의 회장직을 내려놓고 박사론문을 마치고나서 천지클럽(1995년에 설립됨, 현 일반사단법인천지회)의 존재를 알게 되여 반가운 마음과 열성으로 참가하게 되였다.

  1997년 가을 쯤에 천지클럽의 확장기에 합류하여 리사, "천지인문"잡지의 편집담당 등 봉사활동을 하였다.

  천지클럽은 1998년에는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되는 대규모 조선족운동를 개최하면서 일본전체의 조선족동포를 부드럽게 아우르는 대표단체로 흥성하게 되였다. 후에 천지협회로 개명됐고, 2007년쯤 다소 활동이 뜸했던 천지협회는 주요구성원들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면서 해외코리안네트워크인 World-OKTA CHIBA지회에 다수 합류하여 초기 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고 한다.

  김교수는 1999년에는 조선족연구회(현 조선족연구학회의 전신)의 설립에 초기멤버로 참여하고 그후에 공식 출범한 조선족연구학회에서는 초기 리사직도 력임하였다.

  김교수의 본업인 학자경력으로는, 동경대학석사과정에서의 전공은 "비교문학 비교문화"였고 론문은 "고려신사"에 관한 연구였고 그후 계속된 박사과정은 "일선동조론"에 관한 연구였다. 동경대학의 박사수료생들이 드문 당시에는 희귀한 경우여서 중문판 화교신문에도 게재될 정도로 화제인물로도 취재받았다. 박사수료후는 동경의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다가 2000년 봄에 지방도시에 있는 니이가타산업대학(新泻产业大学)부교수로 취임하면서 교수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김교수는 지방도시에 거주하면서 그동안 지속해왔던 조선족동포사회의 활동에는 물리적으로 참여하기 여러워 주로 연변대학일본학우회, 조선족연구학회 활동에 참가했다. 그러다가 2019년 초에 다수 조선족동포단체를 수평적으로 련합하는 조선족련합회설립에 관해 구상하고 실천에 옮긴 핵심발기인중 한사람으로 다시 조선족동포사회의 발전과 번영에 기여하고 있다.



  김교수의 경력을 보면 지방도시로 이주하기전까지는 초창기 일본의 조선족동포관련 단체의 운영에 줄곧 핵심구성원의 한사람으로서 참여해왔고 또 많이 기여해온 사실을 엿볼수 있다.

  김교수는 니이가타산업대학에서는 제자들을 지도하여 대표적인 산학련휴프로젝트로 그 지역의 기업, 정부 등과 공동으로 력사적인 요소를 살린 지방특산물 죠몬쿠키(绳文饼干)와 료칸쿠키(良寛饼干)를 기획부터 제조, 판매까지 총괄했다. 그리고 그 상품을 력사적요소를 부여한 스토리텔링으로 브랜딩하여 2020년 동경올림픽과 련계시켜 지역의 국회위원, 동경올림픽위원회, 중앙정부 관련부서 등에도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지역에 대한 공헌으로 지역관계자들한테서 큰 호평을 받았다.

  일본에는 창업기부터 과자만 100년이상 만들어온 회사들도 즐비할 정도로 과자 관련 상품이 려행객들한테 아주 인기좋은 선물이다. 려행을 즐기고 온 자가 평소에 신세를 졌거나 친분이 있는 주변사람에게 전달하는 필수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생활과 세계최고급 두뇌기구에서의 지적체험

  지방도시에서의 학자생활에 집중했던 김교수는 2009년초에 갑자기 지방도시에서 장기간 매몰될 수도 있다는 이름모를 위기감을 느끼고 밖으로 나가려고 마음먹게 되였다. 그런 그가 굳은 결심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2009년 9월 미국 서해안의 세계TOP20 대학인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교(UCB)의 동아시아연구소 한국학연구센터에서 1년동안 방문학자생활을 시작하게 되였다.

  미국행이 계획보다 순조롭게 성사된 계기는 연변대학 주최 두만강포럼에 참가하였다가 알게 된 시카고대학의 한국인교수의 추천과 도움이였고 그의 주선으로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교(UCB) 동아시아연구소 한국학연구센터장을 력임했던 한국계 원로학자인 이홍영교수의 휘하에서 방문학자가 되였다.

  김교수는 범동포적인 인연을 중히 여기였고 또 그런 인연들을 최대한 살려서 세계적범주의 시야를 넓히고 고차원의 식견을 쌓는데 무척 부지런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참말로 귀감이 되는 광범위한 정보수집력과 확고한 실천력이다.

  대학교는 교외에 자리잡고 있었고 모노레일전철로 약 40분 거리에 사시장철 기후가 온화한 샌프란시스코에는 대규모 차이나타운, 일본거리, 코리안타운도 있어서 불편함이 전혀 없이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어서 쾌적하고 즐거웠다고 한다. 김교수는 미국에서 배운것이 정말로 많다고 한다.

  김교수는 방문학자기간동안 일부 봉급을 일본의 소속대학교에 반납하면서 캘리포니아에서 방문학자를 마치고 1년만으로는 아쉬움이 느껴서 2년째는 아예 1년 휴직을 신청하고 사비를 써가면서 학문을 다지고 시야와 견문을 넓히려고 마음먹었다.

  여러 경로로 런던대학,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교, 컬럼비아대학, 하버드대학의 중국, 일본, 한국 연구소에 신청을 하였는데 두루 다 받아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서 하버드대학을 선택했는데 미국의 한국계 원로학자인 이홍영교수와 한국인부인을 둔 호주출신 백인교수가 실력을 인정하고 추천해준 관계도 있었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는 정말로 운이 좋아서 가능했다고 겸허히 기억을 되살리지만 신청했던 대학의 연구기관들은 모두 다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쟁쟁한 권위있는 싱크탱크여서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였고 실력이 상당이 인정받았음이 틀림없다.

  미국 체류중, 김교수는 근로감사절 등 각종 명절에랑 한국계뿐만아니라 중국인 학자, 화교들과도 많이 어울리면서 친목과 교류를 다졌고 그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특히 한 화교원로학자가 조선에 관심이 많았고 한류에도 관심이 많아서 깊은 교류를 하면서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상이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도 사이좋게 어울리고 교류할 수 있었던 것도 조선족 특유의 다언어, 다문화배경, 빠른 환경적응능력 등 장점이 작용한 덕택이라고 감회를 풀었다. 오히려 신사적이지만 신중한 일본인들과의 교류가 생각보다 힘들어서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김교수는 연구활동외에 영어실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버클리시에서 운영하는 무료영어수업을 8개월동안 부지런히 다녔다. 가장 감명깊었던 것은 인종과 신분에 상관없이 무료로 모두에게 균등한 영어학습기회를 제공해주는 선진문화였다고 감탄한다. 불법체류자에 대해서도 체류자격을 불문하고 약 20달러 등록금만 상징적으로 받고 학비는 전액 무료로 수업기회를 제공해주면서 중요한 인권중의 하나인 기본교육권리를 보장해주었던 것이 가장 인상적이여서 느낀바가 많다고 한다. 교사들도 본업을 은퇴하고 봉사를 즐기는 자원봉사자들이여서 재미있게 가르쳐주면서 정기적으로 가벼운 파티를 통하여 이문화교류기회를 조성하였고 각자의 다양성이 존중되고 마음껏 표현되도록 보장해주었다고 한다.

  김교수의 캘리포니아대학에서 하버드대학에로의 이동은 미국대륙횡단렬차에 총 5일동안 몸을 싣고 기차려행삼아 시카고를 거쳐서 은혜를 입었던 시카고대학의 교수와 재회하고 회포를 푼후 하버드대학의 본거지인 보스톤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보스턴에서는 연변의 조글로사이트에서의 련재를 하면서 알게 된 초면의 조선족출신 하버드대학의 방문연구자였던 김만수박사가 보스톤에서의 숙소 등을 사전에 알아봐주고 안내해주었다. 그분의 덕을 많이 받아서 지금도 그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미국생활에서 한국계, 중국계 그리고 조선족동포의 도움을 두루두루 많이 받았었다. 하버드대학에서는 중국연구소, 한국연구소, 일본연구소를 자주 드나들면서 영어로도 연구결과발표를 하면서 세계 최고의 두뇌들과 지적 교류와 인적 친목을 다졌다. 그 중에는 세계 각국뿐만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정재계인사들도 객원연구자로서 많이 와있었다. 지금은 본국으로 귀국하여 학자, 관료 등 직무를 수행하면서 그 나라의 사회정책설계자로 역할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글로벌기업 삼성전자의 총괄사장을 력임했던 분으로부터 "삼성전자의 중국진출 초창기에 조선족동포들의 협력과 도움을 많이 받아서 항상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감사의 뜻을 정중히 받았다고 한다.

  김교수는 2009년부터 캘리포니아대학 동아시아연구소 한국연구센터에서11개월, 하버드대 Fairbank 중국연구소에서 10개월 미국연구생활을 마치고 유구한 력사와 선진문화를 자랑하는 유럽을 체험하고자 영국으로 향했다. 런던대학 아시아아프리카스쿨 일본연구센터에서 3개월가량 방문학자로 있었다.

  총 2년동안 미국과 유럽의 최고학부의 최고권위싱크탱크에서 세계적범주의 지성, 시각, 스케일과 글로벌스탠더드를 깊이 체득한 경험을 김교수는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다.

  김교수는 캘리포니아에서는 미주한국일보의 인터뷰, 한국인방송 출연, 대만계화교가 운영하는 잡지에서의 련재 등도 하였다. 보스톤에서는 "보스톤코리아"신문에 련재도 함으로서 글을 보고 찾아오는 분들과 지적교류를 도모해가면서 뜻깊게 보냈다고 회상한다. 당시 하버드대학 한국연구소의 방문학자들도 련재요청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여서 모두들 부러워했다. 그는 그 리유를 조선족이란 독특한 존재, 즉 특수성 덕택이였다고 분석한다.

  또 하나 인상깊었던것은 캘리포니아의 버클리한인교회에서 만난 조선족부부였다고 한다. 길림대학석사, 북경대학박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류학하여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엘리트부부였다. 남편은 물리학과 IT를 전공하여 버클리의 모 연구소에 근무했고 부인은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교 연구소직원으로 재적해 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정한 생활을 보고 있었다 한다.

  김교수는 영국 런던에서의 3개월동안 체류기간 영국 일주려행과 유럽 11개국 일주려행을 하면서 견문을 넓혔고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대영박물관, 런던국립미술관, 현대미술관 등 명성있고 권위있는 거대한 뮤지엄들을 반복적으로 방문하면서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깊게 공부하였다. 생활상에서는 버스로 40분거리에 있는 런던외곽의 뉴몰든 코리아타운(당시 한국인 약 2만명, 조선인 약 200명 주거함)을 자주 다니면서 동포들의 삶도 관찰하였다.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조선족젊은이들은 스스로 흔들리지 않는 좌표축을 굳건이 확립하여 긍적적인 마인드를 지니고 당당하게 글로벌세계에서 활약하기를 기대한다. 우리의 그다지 길지 않은 인생에 균형감을 항시 유지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철학과 사상을 확립하고 굳건히 자기의 길을 개척해가는 도전과 실천이 더욱 값지다고 생각한다. 사유방식과 언행이 어딘가에 국한되기 보다는 문명사회와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글로벌시민의식과 세계적범주의 시야를 갖고 그 나라에서의 기본의무를 다 하면서 기본권리도 때로는 련대를 통하여 당당히 쟁취해나갈 필요도 있다. 굳이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동아시아를 잘 안다고 착각하지 말고 동아시아적발상에서 탈피하여 세계적 차원에서 사유하고 실천하기를 권한다. 아시아만 보아도 태국 등 동남아국가랑 인도랑은 각국의 독특하고 고차원의 문화도 존재하므로 시간적여유가 되면 많은 곳을 려행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중 하나이다. 국제통용언어인 영어실력을 지니고 정보수집망을 확대해가면서 많은 나라와 이 문화를 스스로 체험하면서 시야와 견식을 넓혀가는 실천도 바람직하다. "

  김교수가 일본땅을 처음 밟을 때의 1980년대말은 미쯔비시지쇼(三菱地所)란 부동산대기업이 약 8억5천만달러(당시)에 미국뉴욕의 상징중 하나인 록펠러센터를 사들일 정도로 일본의 자본으로 미국땅의 절반을 삼키고도 남는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 정도로 최고봉의 호황을 누리던 화려한 시기였다. 당시는 경제발전측면에서 미국을 릉가할 파죽지세로 초고속성장을 이루는 가장 선도적인 국가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김교수는 약 20년동안 최고봉의 경제대국으로부터 버블붕괴로 인해 침체기에 들어가는 저성장 안정시대의 일본의 전반 양태를 몸소 경험한 한사람이다.

  그뒤 김교수는 일본식과 아시아적인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적지 않은 나이에 미국과 유럽의 최고급 두뇌기관들에 도전장을 던지면서 고차원적 학자생활을 향해 정진하였다.

  김교수는 젊은 세대뿐만아니라 많은 조선족동포에게도 귀감이 되는 대표적 학자임에 틀림없다. 김교수는 일본에서 동경대학학술상, 지역공헌상 등 여러번 상을 수상했고, 시조, 하이쿠, 와카, 한시, 현대시를 여러 언어로 창작하는 다양한 실적이 있는 분이지만 지면상의 관계로 다 소개하지 못했음을 아울러 밝힌다.

  기나긴 장문이지만 최대한 가감없이 김교수의 다양하고 깊은 성찰이 담긴 조선족동포공동체의 구상, 실천활동경력과 학자생활을 펼쳐보임으로써 도전과 향상을 원하는 많은 동포들에게 힌트가 되고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자그마한 계기라도 되였으면 한다.

  /글 문걸, 사진 김권철 특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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