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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탄탄대로에서]제4집 웅대한 계획을 세우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9.11.18일 16:04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4) 제4집 웅대한 계획을 세우다



기차가 무한장강대교 철도다리를 지나고 있다.



성황을 이룬 무한장강대교 통차식

1956년 5월 31일, 모택동은 선상에서 무한장강대교 공정건설에 관한 회보를 청취하였다. 이는 새 중국 창립 후 장강에 건설하는 첫 도로철도 량용 대교이다.

그날은 날씨가 화창했다. 기분이 좋고 흥미진진한 모택동은 갑자기 장강에서 수영하겠다고 제의하였다. 이는 그가 처음으로 장강을 횡단하는 것이다. 사산(蛇山) 북안에서부터 한구(汉口) 담수못까지 이르는 15키로메터 구간을 모택동은 물속에서 옹근 두시간을 헤염쳤다. 물속에서 그는 건설중인 장강대교를 지나갔다.

며칠 후 모택동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수조가두·수영〉(水调歌头·游泳) 이라는 글을 썼다.



무한장강대표 건설현장

대규모적인 경제건설을 일으켜 새 중국을 번영하고 부강한 현대화국가로 건설하는 것은 몇세대에 거쳐 추구해온 꿈이였다.

그러나 건국 초기, 새 중국의 건설자들은 대내로는 ‘가난하고 빈궁한’ 집안살림에, 대외로는 제국주의의 봉쇄에 직면해있었다.

새 중국 창립 초기에 감숙 옥문에서 촬영한 한조의 장면에서 보다 싶이 그 때 중국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석유를 채굴했다. 목숨을 걸고 일한다 해도 전국의 원유 생산량은 12만톤 밖에 안되였다.

모택동은 감개무량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탁자와 의자를 만들수 있고 차잔과 차주전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알곡을 심어 밀가루로도 낼 수 있지요. 또 종이도 생산할 수 있지요. 그러나 자동차, 비행기, 땅크, 뜨락또르는 한대도 생산할 수 없단 말입니다.

중국인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결심하고 어려움을 맞받아 나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1953년부터 한차례 대규모 경제건설이 중화대지에서 활기 넘치게 전면적으로 전개되였다. 자체의 독립된 공업체계를 세우는 것이 새 중국의 웅위로운 포부였다.

1953년, 우리 나라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 전국인민들에게 공업화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분투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쏘련이 중국을 도와 건설하는 156개 건설대상을 표징으로 하여 중공업, 에너지, 원자재, 기계제조 등 기초공업 항목을 중점적으로 발전시켰다.

모택동은 처음 쏘련을 방문했을 때 스딸린자동차공장을 참관한 적 있다. 조립 생산선에서 줄줄이 내려오는 자동차를 보던 그는 손을 땅바닥으로 힘 있게 내리뜨리며 수행원들에게 “우리도 이런 큰 공장이 있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1953년 7월 15일, 새 중국의 첫 자동차공업기지인 장춘제1자동차제조공장이 황량한 교외에서 정초식을 거행했다.

준비 초기에 어떤 사람은 쏘련의 첫 자동차공장의 이름이 ‘스딸린자동차제조공장’인 것처럼 우리의 첫 자동차공장의 이름을 ‘모택동자동차제조공장’이라고 짓자고 제의했다. 또 어떤 사람은 ‘새중국자동차제조공장’이라고 이름하자고 제의했다. 모택동은 제1자동차제조공장이라고 부르는 데만 동의하면서 “우리는 곧 제2, 제3의 공장을 세워야 합니다.”고 말했다.

공화국의 첫 자동차를 생산하면서 기술일군들이 자체로 제작한 자동차 부품이 2,335종에 달했고 각종 공정시공 도면과 비표준 도면이 10여만장에 달했으며 도면을 그대로 그려내는 투사원(描图员)만 해도 100여명이나 되였다.

그 해 제1자동차공장 건설에 자금을 도합 6 억원 투입하였는데 이는 전국 6 억 인민이 인당 1원을 투입한 것에 해당된다.



모택동이 힘차게 쓴 ‘해방’ 두 글자

1956년 7월 13일, 첫 해방표 자동차가 시험제작에 성공하였다. 첫 트럭이 생산선에서 내려오기전 어떤 사람은 제1자동차공장의 제품을 ‘모택동호’라고 명명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모택동은 흔쾌히 붓을 들고 웅장하고 힘찬 ‘해방’이라는 두 글자를 써내렸다.



첫 해방표 자동차가 시험제작에 성공하였다.

조립 생산선에서 내려온 첫 12 대의 해방표 자동차는 공장을 한바퀴 돌고 나서 시내로 향했다. 첫 해방표 자동차를 몰고 거리에 나선 운전기사 마국범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였다. 행복한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로운전사〉라는 노래까지 지어주었다. ‘50세 운전기사 웃음꽃이 싱글벙글, 손풍금 타면서 이야기꽃 피우네. 열여덟에 자동차 씽씽 몰고 외제차도 척척 수리했다오. 중국의 국산차 어떻게 생겼을가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정말 공장에서 나왔다네.’

중국의 첫 승용차인 동풍표 승용차도 장춘제1자동차공장에서 탄생했다.

1958년 5월 21일 이른아침, 붉은색 승용차 한대가 중남해에 들어서 록색 잔디밭을 두바퀴 돌더니 안전하게 멈춰섰다. 차문이 열리자 모택동이 만면에 희색을 띄우며 차에서 내렸다. “기쁘네요, 끝내 우리가 만든 승용차를 타보네요!”

불타는 그 시절은 용광로 앞 활활 타오르는 불과 함께 로동자들의 흥겨운 얼굴을 비쳐주었다. 공업에로 진군하는 새 중국은 수많은 건설자들의 불면의 밤을 격려해주었다.

그것은 조국을 위한 창업이였다! 조국을 위해 창업하는 것 만큼 사람들의 흉금을 넓혀주고 정신을 분발시켜주는 일은 없었다.

불타는 그 시절, 고산에서 평원에서 사막에서 고비사막에서 조국의 방방곳곳에서 평균 매일 건설대상이 한개 착공되거나 준공되였다.

1956년 7월, 심양비행기공장에서 첫 신형 분사식 전투기를 생산했다.

1957년, 중국은 T54형 땅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58년, 첫 동방홍 뜨락또르가 탄생되였다.



락양뜨락또르공장에서 생산한 뜨락또르

락양뜨락또르공장의 건설로 하여 중국인은 자체로 뜨락또르를 제작하는 력사를 시작하였다. 담진림 부총리는 “경작지에서 더는 소를 사용하지 않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라며 흥분되여 말했다.



자체로 제조한 중형 기계는 기계설비의 자급능력을 대폭 제고시켰다.

대경의 푸라얼(富拉尔基)과 태원 등 중형 기계공장이 건설되면서 중국은 자체로 중형 광산채굴설비, 공정기계 등을 제조할 수 있게 되였고 이로써 기계설비의 자급능력을 대폭 제고하였다.

예전에 철못, 성냥마저 수입해야 했던 중국은 처음으로 자체의 독립적이고 비교적 완전한 공업체계를 구축하였다.

새 중국의 웅대한 건설 설계도는 현대 기초공업 건설 현장에서 험산준령과 광활한 고원에서 펼쳐졌다. 여기는 ‘중국사람들의 경관도로’로 불리우는 318국도이다. 평원, 고산, 초원, 빙하가 펼쳐진 경관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곳을 달리노라면 당년의 건설자들이 암벽에서 어떻게 생명과 선혈로 서장으로 가는 통로를 뚫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1950년초, 해방군은 명령에 따라 서장을 향해 진군하였다. 모택동은 진군을 지시하면서 ‘한켠으로 진군하면서 한켠으로 길을 닦을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11만명에 이르는 중국인민해방군과 공정기술 일군들은 당지의 백성들과 함께 망치, 쇠끌, 삽과 괭이 등 원시적인 도구를 손에 쥐고 몸에 바줄을 묶고 산허리에서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목숨이 바줄 한줄기에 걸려있어도 움추리지 않고 한걸음한걸음 조금씩 라싸를 향해 나아갔다.

아안(雅安)에서 서장에 이르는 통로를 관통시키기 위해 3000여명의 장병들이 영용히 희생하였다. 거의 키로메터당 장병 한명이 쓰러졌는데 그들의 평균 나이는 23살 밖에 안되였다.

말을 타고 두번 서장에 가보았던 간고한 경력으로 하여 개국 장군 모생충은 골무드(格尔木)에서 라싸까지 이르는 현대도로를 건설하려는 구상을 싹 틔우게 되였다. 도로를 닦기 위해 모생충은 청해에서 북경에 달려가 조선전장에서 금방 돌아온 로장관 팽덕회를 찾아 회보했다. 반년 후 중앙에서는 모생충의 청장도로 건설보고를 비준하였다.

1954년 5월 11일, 모생충은 19명의 간부, 1,200여명의 현지 백성들과 전사들을 거느리고 골무드 강반, 곤륜산 입구, 추마르강에서 전장을 열어제꼈다. 그들은 한쪽으로 길을 닦으면서 한쪽으로 통차를 했는데 79 일 만에 도로를 호흐시르(可可西里)까지 수리하였다. 모생충은 낮에는 망치를 휘두르고 밤에는 천막에서 잤다. 그는 “청장도로를 건설하려는 결심은 동요할 수 없다. 죽더라도 라싸로 향진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꾸준히 고무격려했다.

착공 7개월 4일 후, 25개의 설산이 도로건설자들에게 공략되였다. 자동차가 골무드에서 직접 부다라궁까지 다다를 수 있게 되였다. 1954년 12월 25일, 천장(사천―서장), 청장(청해―서장) 두 도로가 개통식을 갖고 도로가 없던 력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1957년말에 이르러 중국의 대부분 현과 진에서는 자동차가 통했다. 전국적으로 도로개통 거리는 25만여키로메터에 달하였다.

북경, 상해, 광주, 성도 등지에서 일련의 민항 비행장을 건설하고 동남아시아, 유럽과 아프리카로 통하는 항로를 3갈래 개척하였다.

물과 강은 문명을 낳고 길렀을 뿐만 아니라 위험과 재난도 가져다주었다. 자고로 중국은 시종 수재의 피해를 빈번히 받아온 나라였다. 수해를 다스리고 해로움을 리익으로 도모하는 것은 국민경제를 회복하고 발전시키며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긴박하고도 간고한 과업이였다.

1950년 여름, 회하의 특대 홍수 피해상황을 보고받은 모택동은 눈물을 흘렸다. 보고는 다음과 같이 썼다. 수해 경작지 면적이 4,350만무, 리재민들은 ‘뛰쳐나가거나 나무 우에 올라갈 사이도 없이 물에 빠져 사망했다(나무 우에서 뱀에게 물려죽은 사람도 있다).’ 모택동은 당장에서 다음과 같이 회시하였다: 수리부에 통지하여 수일내에 회화를 다스릴 계획을 세우되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십시오. 이 계획은 8월에 반드시 세워야 합니다. 정무원에서 통과 뒤 가을 초반부터 착공해야 합니다. 그는 “인민을 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공산당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회하를 다스리는 공정은 새 중국이 전 류역에 대해 다목표를 세우고 다스린 첫 대형 수리공정이다. 전국적으로 2,000여만명이 수리공정 건설에 직접 참여하고 약 7억원 투입하였다. ‘부자가 함께 건설장에 나서고 형제가 앞다투어 신청했다. 녀성도 뒤질새라 용약 나서고 부부가 함께 출정했다.’ 이는 당년 회하를 다스린 진실한 상황을 형상적으로 보여주었다.

‘새 중국의 제1댐’으로 불리는 불자령 저수지댐은 바로 이 시기에 건설한 것이다.

새 중국의 첫 철근 콩크리트 아치형 댐을 건설하려고 보니 누구한테도 경험이 없었다. 모이승, 전령희, 황문희… 수많은 전문가, 기술일군들이 이곳에 와서 기술론증에 참가했다. 로동자들은 낮에 시공하고 밤에 공부하면서 기술혁신 4,000여가지를 실현하였다.

1954년 11월, 불자령저수지가 준공되였다. 통계에 따르면 저수지가 건설되여서부터 지금까지 불자령저수지는 이미 루계로 230여차의 홍수를 차단했다.

회하, 형강의 홍수 분류, 황하 하류 홍수방지 공정 등 기간 항목이 건설됨에 따라 수해가 빈번히 발생하고 재해가 끊이지 않던 중국의 많은 지역의 상황은 초보적으로 개변되였다.

저수지가 있다고 해서 가뭄과 장마가 들어도 수확을 보장할 수 없었다. 몇천년이래 농민들이 각자 경작해온 토지는 통일적인 관개계통이 없었다. 새 중국의 수억명 농민들은 또 수로를 닦고 물을 끌어들여 토지를 정돈하는 등 농토 기본건설을 시작해야 했다.



농촌의 광활한 토지 우에 붉은기가 나붓기고 있다. 새 중국 농민들의 공헌은 거대했다.

그 불타는 시절은 집체화의 길로 나아가는 농민들도 격려하였다. 농촌의 광활한 토지 우에 붉은기가 휘날리고 있다. 이는 수억 농민들이 조상이 남겨놓은 토지에서 위대한 창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웅위로운 농업 기초공정은 농업의 안정과 풍작을 보장하여 생산량이 뚜렷이 증가되였다. 또한 현대 농업의 발전에 필요한 기초조건을 마련해주었다. 새 중국의 농민들의 공헌은 거대한 것이였다.

천산 남쪽에 있는 쿠얼러시(库尔勒市) 중심부에는 18퇀거(团渠)라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이 동상은 새 중국 창립 초기 변강을 개간하고 지킨 무수한 장병들의 빛나는 형상에 대한 진실한 묘사이다.

1949년에 왕진은 중국인민해방군 제1병퇀을 거느리고 진군하여 9월 25일 신강을 평화적으로 해방시켰다. 뒤이어 군구는 〈전체 군인들은 일률로 로동생산에 참가하여야 하며 그 누구도 로동생산 밖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반포하였다. 이리하여 신강에 국방사단 한개만 보류하고 기타는 모두 한손에는 총을, 다른 한손에는 삽을 들고 새 전장으로 달려갔다. 작전지도가 생산지도로, 포병 조준기가 수평의로, 군마가 밭갈이말로, 말등자가 보습기로 변해버렸다. 10여만 장병들은 천산의 남북에서 열기 넘치는 대생산운동을 불러일으켰다.

1954년 10월, 중앙정부는 ‘중국인민해방군 군구 생산건설병퇀’을 설립하였다. 그 후 전국각지의 많은 우수한 청년, 제대군인, 지식인, 과학기술자들이 병퇀 대렬에 가입하여 건설에 뛰여들었다. 그들은 비바람을 맞으며 변강에 뿌리내리고 발전을 추진하고 민족단결을 증진하며 사회안정을 수호하고 나라를 공고히 하기 위해 불멸의 력사적 기여를 했다.

우리 나라 흑룡강 북부의 삼강평원, 흑룡강 연하평원과 눈강류역의 광대한 지역은 한때 황페한 지역으로서 ‘북대황’으로 불리웠다.

20세기 50년대에 대규모 개간을 거쳐 지난날의 ‘북대황’은 오늘날 ‘흑토를 만져도 기름이 흘러나오고 젓가락을 꽂아도 발아하는’ 북대창으로 변모했다.

1950년 9월, 북경에서 전국 전투영웅과 로동모범 대표회의가 열렸다. 조국 각지와 각 전선에서 온 전국 전투영웅과 로동모범 대표가 조국의 수도 북경에서 한자리에 모였다. 그중에는 로동부녀 대표들이 적지 않았다.



중국의 첫 녀성 뜨락또르운전수 량군



 량군의 원형에 근거하여 1960년에 발행된 인민페 1원짜리 종이화페

량군은 새 중국의 첫 녀성 뜨락또르운전수이다. 그의 사진은 신문에 게재되였는데 50년대 녀성청년들이 동경하는 본보기로 되였다. 1960년에 발행된 인민페 1원짜리 종이화페는 그의 원형에 근거하여 설계해 인쇄, 제작한 것이다.

영웅들은 북대황으로 달려가 흑룡강을 건설하였다. 1977년까지 륙속 14 만명의 전역한 장병들과 수십만명의 황무지 개간 청년들이 북대황으로 달려갔다. 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원히 흑토 속에 잠들었다.

간고분투하고 영용하게 개척하며 전반 국면을 돌보고 사심없이 기여하는 북대황정신은 황무지를 개척한 용사들이 중화민족에게 남겨준 불멸의 재부이다.

새 중국은 급속히 성장하였다. 승전보가 하나 또 하나 날아왔다. 제1차 5개년 계획에 규정된 주요 지표는 1956년에 1년 앞당겨 완수되였다. 1957년 9 월 25일, 무한장강대교에서 통차식이 거행되였다. 중국우정총국에서는 이를 위해 두장으로 된 기념우표 ‘무한장강대교’를 발행하였다.

급속히 발전하는 조국은 공업화 국가를 건설하는 새로운 지식이 더 많이 필요하고 빠르게 성장하는 청년들이 더욱 많이 필요했다.

1957년, 재차 쏘련을 방문한 모택동은 특히 모스크바에서 중국 류학생들을 접견하였다. 그는 “세계는 당신들의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당신들의 것으로 귀결됩니다. 청년들은 활기가 넘치는 왕성시기에 놓여있소. 마치 아침 8―9시의 해와 같단 말입니다. 희망을 당신들에게 기대합니다.”라고 말했다.

령수의 간절한 희망은 중국의 열혈청년들을 격려하였다. 씩씩하게 성장하는 그들은 필연코 웅위로운 청사진의 제작자이자 중견력량이 될 것이다.

/CCTV방송, 편역: 길림신문 박명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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