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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탄탄대로에서] 제5집 원대한 포부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9.11.19일 16:23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 제5집 원대한 포부



핵공업 북경 지질연구원에는 개업지석(开业之石)이라는 우라늄광석 표본이 소장되여있다. 우라늄은 핵분렬 반응을 실현하는 기본 물질이다.

1954년 가을, 중국 지질부는 광서에서 우라늄광석을 발견했다. 지질대원들이 채집한 우라늄광석은 즉시 중남해 모택동의 사무책상 우에 놓였다. 모택동은 이 우라늄광석 표본을 손에 들고 눈여겨보면서 “이는 운명을 결정하는 보물”이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1955년 1월 15일, 모택동은 중공중앙 서기처 확대회의를 소집하고 중국 원자력과학연구 현황 등 문제에 관한 리사광, 전삼강과 류걸의 회보를 청취했다. 그는 오늘 우리는 소학생이 되여 원자력 문제와 관련해 당신들의 강의를 듣겠다고 말했다. 리사광이 검황색 우라늄광석 표본을 꺼내들자 전삼강이 방사선 탐측기로 우라늄광석에 대한 시범을 보였다.

모택동은 “이 일은 꼭 틀어쥐여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적기입니다. 우리한테 인재만 있다면 자원은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기적도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회의에서 당중앙은 원자력사업을 발전시키고 든든한 국방력을 다질데 관한 전략적 결책을 내렸던 것이다.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끼 상공에서 핵폭발한 구름버섯은 제2차 세계대전의 가속화를 종결한 한편 서방 대국들의 핵무기 경쟁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새 중국 창립 시 세계는 이미 핵시대에 들어섰다. 서방 핵무기의 위협은 거대한 그림자마냥 중국인의 가슴 속을 파헤쳤다. 일찍 1949년 3월, 새 중국 탄생 전야 핵물리학자 전삼강의 건의를 청취한 주은래는 프랑스에서 일련의 핵 과학연구용 기기, 설비와 도서자료들을 사들일 것을 그에게 위탁했다.



새 중국 창립 전후, 1,500여명 해외 고급 지식분자들이 민족부흥과 화염 속에서 되살아나는 꿈을 안고 많은 어려움을 물리치며 의연히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회귀는 새 중국 제1대 과학연구체계를 세워놓았다.

1955년, 저명한 과학자 전학삼은 주은래의 직접적인 도움 아래 미국에서 귀국했다. 그는 귀국 후 즉시 미사일 발전 구상을 제기했다.

1956년, 국가에서는 원자력 평화리용을 12개 중점 임무중의 첫 항목으로 하는 과학기술 발전의 첫 전망계획을 제정하는 한편 미사일과 원자탄을 연구제작하는 보다 큰 이 2개 항목을 배치했다. 그해 4월, 모택동은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우리는 과거보다 많이 강합니다. 금후에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입니다. 비행기와 대포가 더 많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원자탄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우리가 업수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런 것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중국의 ‘2탄 1성'의 연구제작에는 핵탄, 미사일과 인공위성이 포함된다. 핵탄에는 원자탄과 수소탄이 포함된다. 연구제작 사업은 점진적으로 전개되였다.

1956년 4월, 주은래는 중앙군사위회의를 사회하면서 미사일기술 발전에 관한 전학삼의 계획구상을 청취했다. 회의 후 섭영진을 주임으로 하는 국방부 항공산업위원회가 설립되여 미사일 연구제작과 항공산업 발전사업을 책임졌다. 모든 사업이 조용하고도 재빠르게 진행되였다.

1956년 10월, 국방부 제5연구원 즉 미사일연구원이 설립되고 전학삼이 원장을 맡았다. 재빨리 핵무기연구원이 설립되고 최첨단 핵물리 전문가들이 대량 모였다. 연구제작시험기지와 공업기업을 건설하는 새 중국의 방대한 공사가 전면적으로 가동되였다.





포화와 초연 속에서 싸워온 중국 군인들은 전쟁 년대의 혁명정신과 우량한 전통을 지니고 공장, 광산과 과학연구소에 들어가 국방 현대화로 나아가는 새로운 원정길에 올랐다. 수십만명에 달하는 공병, 철도병 부대와 건축업자 대오들이 사면팔방에서 드넓은 서북으로 비밀리에 진군했다.

1958년 4월, 감숙 주천은 미사일발사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핵무기시험기지는 최종 신강 롭누르로 확정되였다. 이로부터 원자탄과 수소탄 연구제작을 위해 십여만명의 과학연구일군과 시험참가부대가 친우들과 작별하고 고향을 떠나 각종 교통수단을 리용해 대서북에 이르렀다. 그들 가운데 90%가 35세 미만이였다.

중국 서북에 위치한 시험기지의 생활조건은 극히 간고했다. 한여름의 지표 온도가 60여도에 달하고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리고 돌이 굴러떨어졌다. 광풍은 천막을 들어올리고 날리는 돌은 자동차의 바람막이유리를 부수기도 했다. 물은 아주 소중했다. 아침의 세면수로 퇴근 후 손을 씻고 밤에 발을 씻고 빨래도 했다.

한 연구설계원은 이렇게 회억했다. 땅에서 1메터 높이도 안되는 지하실이 바로 정착구 모든 직원들의 주택이였다. 지하실에서 살기가 그다지 춥지는 않았지만 지하실 꼭대기에서는 끊임없이 모래가 흘러내렸다.

다른 곳에서는 침대보를 몸 아래 깔고 사용한다지만 이곳에서는 침대보를 공중에 걸어놓아야 했다. 새로 온 동지들은 처음에 잘 리해하지 못했지만 하루밤 묵은 후에는 그 뜻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걸어놓지 않으면 하루밤만 자고 나도 온갖 구멍에 모래가 가득 찼기 때문이였다.

지하실에서 밥을 먹을 때면 누구도 밥그릇을 공중에 드러내놓지 못했다. 모두 모래의 공습을 막기 위해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고 몸으로 그릇을 가리는 똑같은 자세를 취해야 했다.




최초 중국의 미사일, 원자탄 연구제작은 쏘련의 기술원조를 받았다. 1957년 10월 15일, 중쏘 쌍방은 국방 신기술 협정을 체결하고 1957년부터 1961년말까지 쏘련이 로케트, 항공기술, 원자탄 연구제작 등 면의 기술을 중국에 제공하기로 규정했다. 이런 원조는 중국의 미사일, 원자탄 연구제작의 시작에 극히 중요한 역할을 일으켰다.

1956년 6월, 정세가 급변했다. 중쏘 모순이 격화되면서 쏘공중앙은 갑자기 중공중앙에 편지를 보내 중국에 원자탄 견본을 제공하는 관련 기술자료 등 항목을 중단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하루밤 사이에 쏘련정부는 수십개의 협정과 수백개의 계약을 파기하고 중국에 있는 모든 전문가들을 철수시켰다. 일부 중대한 과학연구 대상들이 중도에 중단되고 건설중이던 일부 공사들이 시공을 멈추었다. 중국의 첫 원자탄 실험은 뼈에 사무치는 ‘596'라는 명칭을 갖게 되였다 .

이때 중국의 국민경제는 전례없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거대한 자금을 들인 국방 첨단과학기술 대상을 그대로 착수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만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이 날카롭게 엇갈라졌다.



모택동은 결심을 내리고 첨단기술을 추진해야 하며 늦추거나 그만두어서는 안된다고 명확히 지시했다. 섭영진은 원자탄을 표징으로 하는 첨단무기를 제작하는 동시에 우리 나라의 현대화 과학기술을 이끌고 앞으로 전진하도록 해야 한다는 립장을 명확히 했다.

분발노력하는 중국공산당인들의 웅대한 포부와 웅심은 종래로 동요되지 않았으며 일떠선 중화민족은 의지를 꺾지 않고 간고하고도 확고하게 자기의 길을 끝까지 걸어나갔다. 쏘련 전문가들이 철수한 지 83일이 되는 날, 중국 자체로 제작한‘패기탄’으로 불리는 미사일 동풍 1호가 하늘로 솟아올라 목표물을 정확히 명중했다.

이는 중국인민해방군 장비사상 중요한 전환점이였다.

연구실험 사업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대규모 협업을 조직했다. 1962년 11월, 중앙은 주은래를 주임으로 하는 15명의 전문위원회를 설립하고 미사일과 인공위성의 연구제작을 통일적으로 위원회의 지도범위에 편입시켰다.




 

1964년 중국의 첫 원자탄 폭발 성공.

1964년 10월 16일 15시, 중국의 첫 원자탄이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터뜨렸다. 1967년 6월 17일 오전 8시 20분, 중국의 첫 수소탄이 성공적으로 폭발되였다. 첫 원자탄 폭발로부터 수소탄이 폭발하기까지 미국은 7년 3개월, 쏘련은 4년, 영국은 4년 7개월의 시간을 들였지만 중국은 단 2년 8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원자탄을 보유한 중국에 대해 서방의 기자는 중국은 원자탄만 있을 뿐 탄도미사일은 없다고 지껄여댔다. 미국 국방장관 맥나마라는 5년내 중국에 운반도구가 있을 수 없다고 예언했다. 그러나 그들은 또 한번 중국인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중국은 첫 원자탄 폭발 3개월전에 이미 자체의 중단거리 탄도미사일을 갖추었다.

1964년 6월 29일, 동방 2호 미사일이 성공적으로 발사되였다. 1966년 3월, 중앙전문위원회는 미사일, 원자탄‘2탄’결합비행시험을 비준했다. 1966년 10월 27일 9시, 동방 2호 핵미사일이 점화되여 하늘로 솟아올랐다. 9분 14초 후 핵탄두는 발사장과 894키로메터 떨어진 롭누르 탄착구 표적 중심의 상공 569메터 되는 높이에서 폭발했다. 이는 중국이 실전용 핵미사일을 보유했음을 뜻한다. 바로 그해에 중국은 전략미사일부대인 제2포병을 건설했다.

중국 전략핵미사일은 중, 단 거리로부터 장거리로, 액체연료로부터 고체연료로, 륙상으로부터 수중에로, 고정진지 발사로부터 은페기동 발사로 발전했으며 잇달아 각종 사이즈, 부동한 사거리의 전략미사일 무기체계를 성공적으로 연구제작하여 부대를 륙속 장비화했다.



‘2탄’연구제작이 활기차게 진행되던 1958년 6월, 모택동과 당중앙은 미사일핵잠수함 연구제작에 관한 섭영진 원수의 보고를 비준했다.

10년 후인 1968년, 중국은 핵잠수함 첫 함정 건설에 착공했다. 20년 후인 1988년 9월 15일, 중국은 최초로 미사일핵잠수함으로 잠지(潜地)미사일을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은 드디여 핵잠수함을 작전플래트홈으로 하는 핵타격 력량을 보유했으며 잠재적인 핵전쟁 가운데서 전략적 반제압 능력을 갖추게 되였다.

중국의 미사일, 원자탄 기술이 중요한 돌파를 가져오고 있을 때 세계 대국들은 륙지로부터 우주로 치렬한 겨룸과 경쟁을 확대해나갔다.

‘2탄 1성'의 공훈 획득자이며 동방홍 1호 위성 기술의 총책임자인 손가동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나라에서 첫 위성을 하늘로 올릴 때는 어려움도 비교적 많았고 조건도 아주 구비되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에서는 당시의 형세 수요에 따라 우리 나라 자체의 힘에 의거해 난관을 극복했다. 외계에서 우리를 완전히 봉쇄했기 때문이였다.



1970년 4월 24일 21시 35분, 인공위성 동방홍 1호는 장정 1호 운반로케트에 탑재되여 우주에 들어섰다. 온 나라가 환성으로 들끓었다. 중국은 쏘련, 미국, 프랑스, 일본에 이어 세계적으로 5번째로 위성을 발사한 나라로 되였다.

2019년 3월까지 중국 우주비행과학기술그룹에는 이미 8가지 장정 계렬 운반로케트를 소유했으며 300차의 우주비행 발사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대지관측, 통신방송, 네비게이션, 과학기술실험 등 4대 계렬의 궤도 운행 위성 200여개가 포함된다.

공화국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2탄 1성'의 연구제작 력사는 웅대하고 휘황찬란했지만 기복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극도로 비밀리에 묵묵히 진행되였다.

첫 원자탄 실험에 대해 등영초도 폭발 성공 소식이 공포된 후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주은래는 그에게도 비밀을 엄격히 지켰던 것이다. 등영초는 다음과 같이 회억했다. 당시 주은래는 주관 책임자에게 이번 실험에 대해 모든 공정기술 일군들은 모두 국가기밀을 고수해야 하며 공사, 실험과 관련 되는 여러가지 상황에 대해 시험에 참가하는 인원 외에 가족과 친우까지 포함해 다른 동지들에게 알려서는 안된다고 요구했다.

연구제작과 실험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은 천지를 진감하는 큰일을 하고도 이름을 숨기고 살았다.



등가선과 안해 허록희가 그들의 자녀와 함께(1958년 북경에서 촬영).



등가선이 가족과 함께 1962년 북경대학 랑윤원에서 촬영.

원자탄을 연구제작하면서 등가선은 제일 먼저 소환령을 받은 핵물리학자중의 한사람이였다. 가족들에게 가족사진만 한장 남겨둔 채 그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해 그의 나이는 34세 밖에 안되였다.

안해와 리별을 앞둔 그날 밤, 그는 안해에게 “나의 생명은 앞으로의 사업에 바치겠소. 이 사업으로 하여 나는 일생을 의미 있게 보내게 되였소.”라고 말했다.

1958년 8월, 고비사막 핵시험기지로 떠나면서 등가선은 통신용 우편주소도 하나 남기지 않았다. 남긴 것은 다만 안해가 남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많은 세월 뿐이였다.

비밀적이고 초라한 가옥에서 등가선과 계산소조는 수동식 컴퓨터에 의거하여 원자탄 폭발과 관련 되는 관건적인 수치에 대해 반복적으로 운산하며 끝내 원자탄 리론 설계방안을 완성했다. 갑작스레 닥친 사고로 하여 등가선는 신체건강의 전환점을 맞게 되였다. 등가선은 아무런 방호도 없는 상태에서 곧바로 사고중심구로 향했던 것이다. 바로 그런 거동이 그의 몸에 도대체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힐 것인지는 누구도 똑똑히 알 수 없었다.

1986년 6월에 이르러서야 병원에서는 등가선의 위급보고를 발표했다. 중앙군사위원회는 그에게 비밀해제를 지시했다. 많은 신문, 잡지는 〈2탄 원훈 등가선〉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묵묵히 일한 28년의 발자취를 보도했다.



54세의 핵물리학자 왕감창(우1)이 원자탄 연구제작에 참가한다는 것은 모든 영예를 포기해야 함을 뜻했다.

54세의 핵물리학자 왕감창은 얼마전 쏘련에서‘반시그마 마이너스초코(反西格玛负超子)'를 발견하여 국제적으로 이름을 크게 날렸다. 성과를 내는 황금시기에 원자탄 연구제작에 참가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함을 뜻했다.

국제 물리학계에 우뚝 솟아있던 왕감창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다 바치겠다”고 대답한 후 자취를 감추었고 서북의 핵시험기지에는 폭발시험을 사회하는 황경이라는 사람이 하나 더 나타났다.



1968년 12월, 곽영회(당시 59세)는 청해 시험기지에서 북경으로 돌아왔다.

1968년 12월, 원자탄 리론 탐색과 연구제작 사업을 책임진 곽영회(당시 59세)는 청해 시험기지에서 사업을 위해 북경으로 돌아왔다.

12월 5일 새벽, 곽영회가 탑승한 비행기는 착륙중 사고가 발생했다.

사람들이 그의 유체를 찾고 보니 극비 과학연구 자료를 담은 서류가방을 몸으로 보호하고저 최종 시각에 곽영회와 경호원은 서로 꼭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극비사업에 장시간 종사하다 보니 곽영회는 가족들과 같이 있는 시간보다는 떨어져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어린 딸애가 생일 선물을 요구하면 그는 미안한 마음으로 하늘의 별을 가리키면서 나중에 하늘에 별 하나가 더 생기면 그것이 바로 아빠가 주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2018년 7월, 국제소행성쎈터에서는 212796호 소행성을 곽영회성으로 정식 명명했다. 그는 또한 렬사 신분으로 원자탄, 수소탄과 인공위성 공훈훈장을 사후 수여받은 첫 과학자로 되였다.

그들은 모든 생명과 격정으로 국가의 사명을 안고 마지막에 눈부신 빛을 발하였다.

그 빛은 우리의 대지를 밝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피와 불로 굳어진 공화국을 밝혀주었으며 또 영원히 굴욕을 당하지 않을 강국의 꿈을 밝혀주었다!

‘2탄 1성'을 연구제작한 과정은 당중앙의 통일 령도하에 전국 각 업종, 각 관련 부문에서 대대적으로 협력하여 난관을 돌파한 과정으로서 힘을 모아 큰일을 해내는 사회주의제도의 우세를 보여주었다 .

‘2탄 1성'의 시험성공은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제고시켰고 국가안전과 세계평화를 수호했다. 이는 국가의 힘의 상징이며 민족 번영발달의 상징이다.

우주에 비하면 인생은 짧고도 잛다.

그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공화국을 떠받치며 세계를 놀라게 한 웨침소리는 공화국 력사에 영원히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

/CCTV방송, 편역: 길림신문 리미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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