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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탄탄대로에서]제12집 세계에 융합되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9.12.03일 15:29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12) 제12집 세계에 융합되다

--2001년 11월 10일, 중국 세계무역기구 가입, 회원국들과 동등한 대우 권리 향수

  중국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후 각항 승낙을 전면적으로 리행



예전의 양산항은 모든 게 ‘제로'였다. 그렇게 발걸음을 떼기 시작해 황페하기만 하던 섬에 세상에 널리 이름 난 동방의 대항구를 신속히 일떠세웠다. 오늘날 장강입구밖, 동해에는 상해 양산 심수항이 수천메터의 강안에 아득히 뻗어있고 철홍색의 궤도주행식 크레인이 수풀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컨테이너들이 들쭉날쭉 들어서있다. 장강연안 중심지역의 화물들이 여기에서 구라파주, 아메리카주, 서부아프리카 지어는 더 멀리로 운송돼나간다. 양산항은 중국과 세계의 융합 속도, 그 깊이와 범위를 세인에 보여주었다.



국가박물관에 가면 당신은 이런 몇건의 문물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입세방망이(入世槌), 싸인팬, 의정서. 이런 것들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력사적 증명이며 중국과 세계의 격동과 충돌과 융합의 력사적 증명이기도 하다.

2001년 까타르 수도 도하, 당지 시간으로 11월 10일 18시 34분, 세계무역기구 제4차 부장급 회의는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 결정을 심의 채택했다. 이로부터 중국은 세계무역기구 제143번째 회원국으로 된다.



2001년 11월 11일, 중국대외무역경제합작부 부장 석광생이 까타르 수도 도하에서 중국정부를 대표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 의정서에 싸인하고 있다. /신화사

세계무역기구의 전신은 1947년에 설립된 관세 및 무역 총협정이다. 중국은 관세무역총협정의 최초 23개 체약국중의 하나였다. 새 중국이 창립된 후 체약국의 지위 회복과 관련한 담판을 진행하지 않았기에 관세무역총협정은 중국이 20세기 80년대 실질적으로 가입하지 않은 마지막 하나의 중요한 국제기구로 되였다.

1978년 중국은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수출이 갈수록 많아졌는데 그중 3분의 1은 방직품이였다. 1981년 관세무역총협정은 다자 방직품 담판을 진행,〈다자간 섬유협정>을 체결해 방직품의 글로벌 쿼터를 배분했다. 중국은 비록 체약국은 아니였으나 방직품 수출 대국임은 틀림없었다. 1984년 관세무역총협정은 이 협정에 가입하려는 중국의 신청을 동의했다. 따라서 중국의 방직품 수출은 크게 늘어났다.

 



개혁개방을 실시하면서 중국의 방직품 수출은 크게 늘어났다.

대외경제무역 활동이 끊임없이 확대되는 새로운 형세에 적응하기 위해 1986년 7월 10일, 당시 제네바 주재 중국대표단 대사를 담임하고 있던 전가동은 중국정부를 대표해 관세무역총협정에 신청을 교부했다. 이로부터 중국의 ‘복관(复關)', ‘입세(入世)’ 담판은 그  서막을 열었다.

담판의 초기 단계 중국과 여러 측의 담판 초점은 다름 아닌 중국 경제는 과연 시장경제가 맞냐였다.

제네바에서 거행된 중국팀 제12차 회의에서 중국대표단 단장은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중국도 시장경제를 운행하고 있다. 우리가 운행하는 것은 사회주의 조건하에서의 시장경제이다. 이 같은 선포는 당시 관세무역총협정 본부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또 그 때로부터 중국의 무역체제에 대한 심사를 종결지었다.

1993년말, 강택민은 미국 대통령 클린톤과 회담을 진행할 때 ‘복관’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의 중국의 세가지 원칙을 천명했다. 첫째, 관세무역총협정은 하나의 국제적 기구로서 만일 중국이라는 이 제일 큰 발전도상 나라가 참가하지 않는다면 완정하지 못하다. 둘째, 만약 중국이 참가한다면 의심할 나위도 없이 발전도상 나라로 참가할 것이다. 셋째, 중국이 이 기구에 가입한다면 그 권리와 의무는 반드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중국의 복관입세 세번째 수석담판대표 곡영강(2001년 취재): 중국의 발전 전도에 대해 그들은 꿰뚫어보고 있었다. 때문에 중국이라는 이 대시장에서 다시 말해 미래의 잠재한 이 시장에서 일정한 점유률을 챙기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이 때문에 그 많은 조건부를 우리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담판)의 어려움의 근원이였다.



1995년 1월, 세계무역기구가 관세무역총협정을 대체했다. 같은 해 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정식 신청하면서 중국은 세계무역기구 37개 회원국과 차례로 일진일퇴식의 쌍무 담판에 들어갔다.

담판 과정에 기복이 심하고 첩첩산중인 정형들이 무시로 나타났지만 그래도 제일 복잡하고 제일 어려웠던 것은 중미간의 담판이였다.

담판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강택민은 이런 힘 있는 말을 했다. 우리는 절대 주대가 없어서는 안된다. 미국과의 교섭은 계속되여야 한다. 우리 나라가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는 문제에서 그들이 제기한 각박하고도 무리한 요구에 대해 우리는 절대 양보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견결히 일축해야 한다. 나라와 민족의 리익을 수호하는 것은 우리의 근본원칙이다.

중미 담판은 무려 25차나 진행되였다. 1999년 11월 10일, 최후의 담판이 북경에서 진행되였다. 중미간 무역기구 가입 협의 담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서도 우리의 최대 한계는 미국이 제시한 조건과 그 거리가 의연히 아주 멀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경제고문이였던 스퍼링은 책상을 치며 일어나 중국담판대표단에 “당신들의 이 조건으로는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할 수 없다!”고 허세를 부렸다.

중미 쌍방은 각자의 리익을 위해 격렬하고도 날카롭게 맞섰으며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당중앙의 정확한 결단과 지도 아래 6일 낮과 밤 동안 지속된 중미간의 간고한 담판은 최종 윈윈의 결과를 거두었다.



미국 전임 무역대표 바르세프스키: 중국 담판 대표는 태도가 아주 단호했으며 아주 예지적이였다. 그들은 시종 중국의 국가리익을 단호히 수호했다. 담판 과정에서 그들은 한결같이 원칙을 고수했는데 이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1999년 11월 15일 오후 4시, 석광생(당시 대외무역경제합작부 부장)과 바르세프스키는 북경에서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는 데 관한 량국 시장 진입 쌍무 협의를 체결했다. 2001년 9월 중국은 최후의 담판 상대인 메히꼬와 협의를 달성했다. 이로써 중국은 세계무역기구 회원들과의 모든 시장 진입 쌍무 담판을 마쳤다. 세계무역기구의 대문을 열어젖히는 데 중국은 장장 15년이라는 품을 들였으며 끝내는 기타 세계무역기구 회원들과 동등한 대우와 권리를 향수하게 되였다. 이는 우리 나라 대외개방이 하나의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음을 표징한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후 중국정부는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는 데서의 각항 승낙을 전면적으로 리행했다.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후의 첫해인 2002년 바로 5,300여종 상품의 수입 관세를 대폭 인하했다. 관세 총수준은 2001년의 15.3%에서 12%로 내려갔다. 2010년에 이르러 중국의 화물 관세 인하 승낙은 그 리행을 전부 마쳤으며 관세 총수준은 2001년의 15.3%에서 9.8%로 내려감으로써 발전도상 나라의 평균 수준보다 훨씬 낮았다.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후의 10년간 중국은 그 수입이 대폭 늘었다. 평균 매년 7,500억딸라의 상품을 수입했는데 이는 무역파트너를 위해 1,400여만개 취업일자리를 창출한 것에 맞먹었다. 중국에 있는 외자기업의 리윤은 루계로 2,617억딸라로 년 평균 30% 새로 성장했다. 오늘날 중국은 언녕 세계 제2대 수입국으로 되여 세계 각국에 실질적인 리익을 가져다주고 있다.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호베르토 아제베두: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은 중국에 미래 성장의 저력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세계무역기구가 중국에 아주 적극적인 영향을 가져주었다고 본다. 중국 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든 무역파트너에 말이다.

절강 의오는 현급시이다.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후의 몇년간 여기의 무역수출량은 수십배로 늘었다. 매일 이른아침 의오의 소상품시장이 문을 열기만 하면 수만을 헤아리는 가게들에서 화물을 발송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이 진렬한 것은 근근히 샘플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배후에는 수만개 공장과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중국 로동자들이 있다. 세계무역기구 가입 후인 2002년 의오는 세관판사처를 내왔다. 판사처는 2009년 전국 첫 현급시 세관으로 승격했다.

세계무역기구 가입은 의오에만 변화를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전 중국에 변화의 물결을 몰고 왔다. 중국과 세계의 련계는 종래로 이처럼 끈끈해본 적이 없었다.



2001년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원년이다. 은행, 보험, 증권, 자동차, 전신, 석유화학, 관광, 건축, 교육써비스 등은 다투어 대문을 열어 한패의 이름난 외국 기업들이 륙속 중국시장에 발을 들여놓게 했다. 초기에는 대량의 외국상품과 외자기업이 중국에 몰려들면 중국의 산업에 재난성 충격을 가져다주지 않을가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승냥이가 왔다”로 중국인들의 우려를 형용했다.

자동차업은 세계무역기구 가입 후 ‘제일 가슴 조이는’산업으로 인정되였다. 세계무역기구 가입전 중국의 자동차업은 장기간 지난 세기 80년대에 시행해온 자동차 목록에 따라 관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영기업의 자동차 제품은 늦도록 목록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면서 중국은 세계를 향해 문호를 활짝 열었다. 합자기업은 중국의 자동차 업종으로 하여금 완성차 개발흐름, 제조공예, 첨단인재 등 여러 면에서 혜택을 보게 했다. 민영기업도 시장 개방을 계기로 합법적인 생산허가증을 내게 되였다.

당년 지리(吉利)자동차 리사장 리서복은 생산허가증 신청을 위해 절강과 북경 사이를 뻔질나게 오갔다. 만일 허가증을 손에 쥐지 못하면 그의 기업은 파산에 직면하게 될 판이였다.

2001년 12월,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지 사흘째 되던 날 국가경제무역위원회는 리서복에게 중국 첫 민영기업 자동차 생산, 제조, 판매 허가증을 내주었다.

절강지리지주그룹 리사장 리서복: 이는 전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의 덕이였다. 개혁개방이 있었기에 비로소 지리가 있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리는 존재하지도, 고고성을 울릴 수도 없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다고 했을 때 나는 이는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우리는 더한층 그리고 더욱 자유롭게 이 업종의 경쟁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였다.

2010년 지리는 볼보(沃尔沃)의 100% 주권을 매입했다. 2018년 지리는 벤츠 모회사인 다임러 AG 주식에 가입, 최대 주주로 되였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면서 시장이 점차적으로 개방되였다. 생산량이 200여만대에서 1,800여만대, 세계 순위 8위에서 세계 제일 생산판매 대국으로 되기까지 중국이 들인 품은 10년도 채 안된다. 동시에 한패의 대형 자동차 생산기업들이 고고성을 울렸다. 지리, 비야디(比亚迪), 치루이(奇瑞) 등 일련의 자주적 브랜드 기업들이 자동차 업계의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처럼 자동차업은 비단 치명적인 재난을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여 중국 경제의 손색없는 버팀목으로 자리매김했다.

세계무역기구 가입은 중국 제품이 세계로 나가는 데 드넓은 플래트홈을 마련해주었다. 2002년이래 세계경제 성장에 대한 중국의 평균 기여률은 30%에 이르렀는데 이는 세계경제 회복과 새로운 성장을 추진하는 중요한 엔진이였다.

만약 중국의 개방이‘인입'으로부터 시작되였다면 세계무역기구 가입 후의 개방은 더 많이는 ‘나가기'였다.



2001년 4월 5일, 미국 난카주 캠턴시에서는 성대한 명명식을 거행했다. 바로 당지 경제 발전에 대한 중국 하이얼그룹의 탁월한 기여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정부에서 원래의‘협작대도(协作达到)'를‘하이얼로(海尔路)"로 명명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 중국 기업의 브랜드로 명명한 첫갈래 길이였다.

하이얼그룹리사회 주석 장서민(2008년 취재):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기업은 크게 두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글로벌 기업, 다른 하나는 글로벌 기업을 위해 일하는 기업. 때문에 당신이 만약 글로벌 기업으로 되지 못한다면 역시 글로벌 브랜드로 될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은 글로벌 기업을 위해 일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 자체의 공간과 자체발전의 여지는 두말 할 것 없이 아주 좁아지게 된다. 때문에 나는 세계무역기구 가입은 중국의 기업에 아주 큰 발전 공간을 제공해주었다고 본다. 그러나 살길과 출로는 어디까지나 자기절로 뚫어나가야 한다.

오늘의 하이얼은 이미 손색없는 세계 백색 가전제품의 지명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2017년에 이르러 하이얼은 이미 세계에 29개 제조기지, 8개 종합연구개발쎈터, 19개 해외무역회사를 세웠으며 회사원 총수는 6만명을 넘어섰다. 세계경제의 대해 속에서 시련을 겪고 세상물정을 알아가고…중국 기업이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확고한 결심과 거대한 용기였다.

여기는 인구가 3만명 밖에 안되는 웽그리아 북부의 소도시 카신츠바스카이다. 63세 나는 주하스·죠지프네 조손 3대가 같은 기업인 보스드화학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이 회사는 웽그리아에서 제일 큰 화학공업기업이다. 십여년전 60여년 력사를 자랑하는 이 전통기업은 파산의 변두리에 이르렀다.

회사의 곤경은 죠지프 일가의 생활에 극히 큰 곤혹을 가져다주었다. 이 때 7,000여키로메터 상거한 중국의 한 기업—만화화학그룹이 한창 국문을 나서는 길을 모색중이였다. 보스드를 매입하는 것은 만화의 리상적인 선택이였다. 가치가 12.6억유로 되는 인수합병건은 그 과정이 복잡하고 간고했다. 인수합병을 완성한 후 중국 기업은 보스드에 더욱 선진적인 관리제도를 가져갔다.

2015년 년말, 파산의 위기에 처했던 보스드회사는 수익이 2,000만유로에 달했다. 2017년 기업 리윤은 더구나 4억유로를 넘어섰다. 만화화학그룹도 이로부터 폴리우레탄 업종의 세계 3위에 올랐다.

국제와 국내 두가지 자원, 두개 시장을 빌어 세계에 가져다준 가치와 활력, 이 속에서 혜택을 보는 것은 비단 중국 기업 뿐이 아니였다. 초대국(东道国)이 이 속에서 얻는 리익도 만만치 않았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 국제금융위기의 어두운 그늘이 드리운 속에 아프리카주에 투자한 중국유색그룹은 정중한 승낙을 절실하게 리행했다. 소속 아프리카 기업은 한명의 회사원도 감축하지 않았으며 투자 한몫도 줄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톤의 생산량도 줄이지 않았다. 이는 초대국에 현실적인 리익을 가져다주었다.

세계무역기구의 가입은 중국이 세계에 융합되는 관건적인 한걸음이였으며 역시 세계가 중국이라는 급행렬차에 탑승하는 증요한 계기이기도 했다. 중국은 세계로 하여 풍부해지고 세계는 중국으로 하여 다채로와지고 있다. 중국은 포용할 줄 아는 세계를 수요하고 있으며 세계도 하나의 발전하는 중국을 수요하고 있다.

“중국이 세계에 융합되면서 세계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중국은 이겼다. 세계도 이겼다.



/CCTV방송, 편역: 길림신문 심영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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