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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님은 왜 잊을 수가 없을가?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20.03.21일 15:12
-고 김창섭선생님을 그리며



고 김창섭선생님

나는 30년만에 글을 쓴다. 기사도 아니고 통신도 아니고 공문도 아니다. 

동창들 위챗에서 김창섭선생님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연일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과 밀려드는 후회와 온갖 감회로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도 몰래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본능처럼 되살아났다.

내가 김창섭 선생님을 처음 뵙던 날은 지난 1971년 훈춘현 량수공사 남대중학교에 입학하던 날이다. 당시 량수공사에는 중학교가 량수에 밖에 없었다. 하여 13개 행정대대 학생들이 모두 걸어서 량수중학교로 다니다 보니 고생이 막심하였다. 해가 짧은 겨울에는 동트는 새벽에 등교했고 달을 등에 지고 집에 돌아왔다. 자녀들의 어런 로고를 헤아려 당시 량수 령남의 북대, 경영, 남대 등 다섯개 촌에서 자력갱생으로 남대촌에다 중학교를 지었다. 경제난에 시달리던 궁핍한 그 시절, 한푼의 돈이라도 아끼느라 늘 학생들을 학교 짓는 번중한 로동에 내몰았다. 그리하여 선배 형님, 누나들이 죽을 고생을 했단다.

드디여 교정의 종소리가 울렸다. 신입생은 다섯개 촌에서 모여온 120여명으로 세개 반급을 나누었다. 담임선생님은 어떤 분일가? 호기심과 설레임으로 기웃거리는데 중등키에 호리호리한 체격, 갸름한 얼굴의 선생님이 교단에 올라섰다. 그리고 칠판에 ‘김창섭’이라는 이름자를 곱데 쓰시더니 “동무들, 동무들의 중학교 입학을 축하합니다! 제가 오늘부터 동무들의 담임을 맡게 되였습니다. 우리 함께 우리 학급을 잘 꾸려가기 위해 노력합시다!”라고 힘 있게 말씀하셨다.

중학교 선생님이면 멋진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지식분자 틀거지가 다분한 분일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웃집 형같이 편안하고 무던한 인상이였다. 4월의 어느 날 저녁, 우리가 소조공부를 하느라 가마목에 모여앉아 있는데 문뜩 선생님께서 찾아오셨다. 우리들이 소조공부를 어떻게 하는가 알고 싶어서 오셨다고 했다. 그러더니 소조장인 나더러 소조공부 진행정황을 말하라고 하셨다. 처음 선생님과 가까이하고 말하자니 몹시 긴장해났다. 선생님께서는 대담하게 생각나는 대로 얘기하라고 격려해주셨다.

나는 어려운 수학, 물리 등 리과는 잘하는 동학들이 배워주고 문과는 집에 조한사전이나 신화사전이 있는 동무들이 갖고 와서 함께 보고 소조공부가 끝나면 각자 서로 가지고 온 여러가지 도서들을 나눠서 본다고 말씀드렸다. 무엇인가 수첩에 부지런히 적으시던 선생님은 소조공부도 잘 조직하고 소조장도 말을 조리있게 잘한다고 칭찬하셨다. 그리고 앞으로 사회의 유용한 인재가 되려면 공부를 잘하여야 한다고 거듭거듭 당부하셨다. 그날 선생님의 칭찬을 받은 나는 흥분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선생님은 귀가길에 우리 마을을 벗어나다가 50대 정신환자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쫓아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10여리 험한 산길을 정신 없이 뛰여 가셨던 것이다. 그때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금방 전근해 오셨고 살림집은 10리 떨어진 정암촌에 있었던 것이다. 철없던 시절 우리는 누구도 그날 저녁 선생님을 묵어가시라고 만류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학교에서는 밭을 다루어 목장, 목이버섯 등 다종경영을 했는데 농번기마다 방학을 했다. 특히 몇해 동안 줄곧 60리 떨어진 까울령에 잣나무 심는 식수로동을 하였다. 한창 힘을 쓸 때인 우리도 피로가 겹쳐 녹초가 되군 하였는데 워낙 신체가 허약한 선생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가. 까울령은 온통 돌천지여서 나무를 심기가 정말 말째였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한대를 심어도 살도록 심어야 한다며 위치 선정부터 웅뎅이 파는 일, 나무를 바로 세우고 발로 꽁꽁 디디며 파묻는 일까지 항상 깔끔하게 본을 보여주셨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인력, 재력, 물력을 얼마나 랑비하게 되는지 모른다며 우리들을 일깨워주셨다.

40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이 피땀으로 심어놓은 잣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어 멀리에서 바라보면 마치 검푸른 바다와 같다. 거기에서 해마다 천송이 만송이 잣송이가 열리고 있으니 바라만 봐도 마음이 설레이며 그때 그 현장에서 솔선수범하던 김창섭 선생님의 모습이 우렷이 떠오른다.

1974년 겨울, 학교에서는 “문을 열고 학교를 꾸리라”는 상급의 지시에 따라 달포가량 한족촌인 하동촌에 가서 한어교학을 하였다. 두개 조선족학급의 80여명 학생들이 이불짐을 둘러메고 한족농민들 민가에 입주했다. 우리는 낮에는 두만강언제를 쌓는 로동에 참가하고 저녁에는 집주인한테서 한어말 공부를 하였다. 선생님은 집집이 돌아다니며 우리들에게 한어말을 잘 배우려면 우선 귀가 밝아야 하고 입술이 얇아야 하며 얼굴이 두꺼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부끄러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말연습을 하라고 하셨다.

두만강언제로동에 참가했던 하루, 그날 따라 겨울치고 따스한 날씨였다. 나는 솜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열심히 일했는데 정오가 다가오자 갑자기 먹장구름이 몰려오며 날씨가 돌변하였다. 부랴부랴 옷을 주워입었으나 등곬이 으스스해 나면서 추워나더니 그날 저녁부터 고열이 나고 편도선까지 부어 물 한모금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딱하게 여긴 주인집 전아저씨는 위생소에 가서 약을 구해왔고 아주머니는 좁쌀죽을 쑤어 뜨끈뜨끈할 때 먹으면 병이 빨리 낫는다며 자주 나에게 권하였다. 그 정성에 감동된 나는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생활중에 마음속 깊이 느끼는 감동을 글로 적어두라고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라  그 시대 문구를 넣어 〈계급의 정은 바다보다 깊다〉는 글을 써서 선생님께 바쳤다.

선생님께서는 “참 잘 썼다”며 이런 저런 수정요구를 제기하시는 것이였다. 그리고 수정된 글을 등사기로 인쇄하여 학생들더러 참고하라면서 선배, 후배들 학급 조선어문시간에 내놓으셨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조용히 나를 부르시더니 “글 쓰는 싹수가 보인다”며 계속 노력하면 꼭 전도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독서를 많이 하고 남들이 쓴 우수한 문장을 참답게 읽고 분석하면서 많이 배우라고 하셨다.

그때는 다들 살기 어려울 때이지만 우리 집은 그중에서도 더구나 가난한 ‘빈곤호’였다. 형제가 많아 학비가 문제였는데 셋째형이 나를 계속 공부를 하라며 자기가 퇴학하고 농사일에 뛰여들었다. 문학에 꿈을 실은 나는 시간 나는 대로 책을 읽었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고리끼, 오스뜨롭스끼의 저서를 비롯한 쏘련 소설이며 중국의 4대명작들…그때 둘째형이 학교인쇄공장의 구매담당으로 일하면서 책 보는 일은 덮어놓고 지지해 주었다. 장춘, 연길 등지에 출장갔다가도 꼭꼭 나에게 책을 사다 주었다.

1975년경 때리고 부시고 무리지어 싸우던 문화혁명이 거의 사그라들던 그맘 때쯤 김창섭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독서유용론’을 강조한다는 죄로 란폭하고 무례한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선생님이 살고 계시는 정암촌은 일제통치시기 한국충천북도 옥청군의 100여세대가 단체이주를 해온 마을이여서 그 마을 사람들은 청주나 감주를 마시면서도 '두만강 푸른물에 노젖는 배사공' 등 노래를 즐겨불렀다.

그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라도 나라를 빼앗긴 설음, 고향을 등진 애환을 풀어냈는데 그것이 죄가 되여 “김선생님은 술을 마시면 썩어빠진 남조선노래를 부른다”고 또 비판을 받았다. 그것이 딱히 무슨 감투인지는 알 없으나 어린 마음에도 존경하는 김창섭선생님이 비판을 받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후에도 나와 김참섭선생님과의 인연은 계속되였다. 지난 1986년도에 나는 훈춘당교에 다니면서 짬짬의 시긴을 리용하여 《눈내리는 밤》(《연변녀성》에 게재)이라는 수필을 쓴 후 선생님께 우편으로 보내 고견을 청했다. 김창섭선생님께서는 그때 밀강중학교의 지도자로 계시면서 분망한 가운데 친히 펜을 들어 빠뜨린 문장부호까지 찍어주시면서  또 "참 잘 썼다"는 평과 함께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해 주셨다. “문학이란 인간학인 것이요. 인간들 속에 깊이 들어가 소재를 찾아야 이렇게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단숨에 읽어내려 갈 수 있는, 거북함이 없는 속이 따뜻해지고 후련해지는 문장이 나올 수 있는 것이요.”

선생님의 이런 깨우침에 힘입어 나는 “언제까지나 겉맛이 들지 않은 담백하고 고소하며 콩국수같이 시원하고 깊은 맛이 우러나는 문장을 써야겠다.” 고 속다짐을 하군 하였다.

그해 가을 나는 훈춘에 회의하러 갔다가 오는 길에 밀강중학교 사택에 있는 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불쑥 찾아들어 송구스러워 하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나의 손을 오래도록 잡고 친자식을 만난듯이 기뻐하셨다. 내가 당학교학습을 마치고 량수향 당위 선전위원으로 사업한다고 말씀드리자 선생님께서는 “큰 관리나 작은 관리나 다 백성을 위한 관리”라고 하시면서 “처마밑에 섰으니 머리를 숙이고 백성이 좋아하는 관리가 되여야 한다.”고 참으로 무거운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였다.

우리가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사모님께서는 소박한 주안상을 차려왔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부어올린 술잔을 기울이시면서 제자가 부어주는 술이 참으로 맛이 좋다고 하셨다. 나는 이제 성행정학원에 3개월간 연수를 가게 된다는 말씀도 부모님께 여쭈듯이 자랑스럽게 말씀드렸다. “큰 학교에 가서 체계적으로 잘 배우고 공문쓰기 기초도 잘 닦으라.”고 선생님은 재삼 분부를 하시는 것이였다. 그날의 그 술향기 속에 사제간의 정은 더 깊이 무르익어갔다. 이제 다시 그 술향기를 풍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후 80년대 유선텔레비죤방송이 갓 보급될 때 량수향당위에서는 하서촌을 돌파구로 자금신청에 나섰다. 이 보고서를 쓰는 임무가 나한테 맡겨졌다. 나는 이 보고의 핵심은 하서촌이 두만강역 변경마을이라는 지리적위치임을 강조하였다. 안테나를 세우고 텔레비죤방송을 시청하면 신호접수도에 따라 낮과 밤의 방송이 국계의 혼선을 탄다고 하였다. 주당위 선전부에서는 이 보고를 보고 아주 만족해 하였고 해당 상급부문의 동의를 거쳐 하서촌은 도문시에서도 가장 처음 유선텔레비죤방송을 보급한 마을로 되였던 것이다.

내가 공직에서 30여년간 일하면서 책임심과 정직함을 간직하고 특히 공문을 씀에 있어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면 그건 모두 김창섭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의 인도와 사심없는 가르침 덕분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도 존경하고 따르고 싶고 그리운 이가 있다. 김창섭 선생님이야 말로 나에게는 바로 그런 분이시다!

/ 성송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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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의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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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함니다. 잘 보앗습다!
저의 모교 저의 첫 직장 남대중학교 71년에 설립, 처음으루 알게 되였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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