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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책의 날’, 쉑스피어를 읽다

[인터넷료녕신문] | 발행시간: 2020.04.23일 09:18



한권의 책을 읽는 것은 한 세계를 읽는 일과 같다. 4월에 피여나는 봄꽃처럼, 우리 마음에 책 한권이 피여나길 소망하는 계절이다. 4월 23일은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 유네스코에서 독서를 장려하고 저작권을 보호하는 취지로 제정한 기념일이다.

국제출판인협회가 스페인 정부를 통해 유네스코에 ‘책의 날’을 제안했고 여기에 로씨야 정부가 제안한 저작권 개념을 포함해 1995년에 제28회 유네스코총회에서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이 제정됐다.

4월 23일은 또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성 호르디’ 축제일을 기념해 책과 장미를 선물하는 날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대문호 쉑스피어와 세르반떼스가 세상을 떠난 날이기도 하며 프랑스 소설가 모리스 드뤼옹, 이슬란드 소설가 할도르 칼란 락스네스, 뉴질랜드 미스터리 소설가 나이오 마시 등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해마다 약 80개국이 이날을 기념해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고 있으며 우리 지역에서도 각종 기념행사가 펼쳐졌다.

코로나19 여파로 각종 출판행사가 줄줄이 취소된 지금, 나만의 ‘방구석 서재’에서 누구나 한번은 읽어야 할, 하지만 누구도 쉽게 다가서기 힘든 최고의 작가 쉑스피어를 읽어보는 것도 좋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이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던 인류 최고의 유산, 윌리엄 쉑스피어, 그는 37편의 드라마(10편의 비극, 17편의 희극, 10편의 력사극)와 2편의 장시, 154편의 소네트를 남겼고 이를 통해 보여준 문학적 탁월함과 천재성으로 400여년 동안 끊임없는 찬사를 받아왔다. 그 명성의 크기 만큼 과연 그러한 사람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끊이질 않았고 ‘윌리엄 쉑스피어’는 하나의 필명으로 다수의 작가들이 공동 작업한 결과라거나 당대의 천재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혹은 녀왕의 총애를 받았던 옥스퍼드 백작이 실제 저자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바대로 쉑스피어는 대학을 다니지 않았고 작품의 위대함에 비하면 지나치게 평범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인간의 실제 삶,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다. 비평가 새뮤얼 존슨의 말 대로 그는 “삶과 세태의 모습을 충실히 비추어주는 거울”이였고 그의 진정한 위대함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다른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개별적 인간이라면 쉑스피어 작품 속 인물들은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種)”이다.



윌리엄 쉑스피어는 1564년 4월 잉글랜드 중부 워릭셔의 작은 상업도시 스트랫퍼드어펀에이번에서 8남매중 장남으로 태여났다. 쉑스피어의 출생일은 잉글랜드의 수호성인인 성 조지 기념일인 4월 23일로 기념되고 있지만 정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4월 26일 영아세례를 받은 기록이 있고 세례는 출생 3일 후에 하는 전례에 비추어서 4월 23일로 추정하고 있다. 이날은 또한 52년 후 쉑스피어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녀왕 시대의 스트랫퍼드는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100마일가량 떨어진 인구 2000명가량의 작은 상업도시로 양모와 양가죽 판매의 중심지였다. 농부의 아들이였던 부친 존은 성공한 장갑제조업자이자 상인으로 쉑스피어가 태여난 이듬해 시의회의 의원이 되였다. 1568년에는 오늘날 시장에 해당하는 지방행정관이 되는 등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윌리엄이 12세가 되던 1576년부터 하락세를 타기 시작한다. 무허가 양모거래, 고리대금업 혐의로 고소를 당하고 벌금과 부채를 감당하기 위해서 안해의 부동산을 저당 잡히기도 한다.

당시 보통 남자아이들이 그렇듯 쉑스피어도 아주 어린 나이(7살)에 지역 그래머스쿨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라틴어 문법과 론리학, 수사학을 배웠고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호레이스 등의 로마 고전을 읽고 라틴어 공부의 일환으로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면서 쉑스피어의 학교교육은 여기에서 중단되지만 이 시기의 고전과 라틴어 교육은 그에게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동시대 극작가들이 약점으로 지적했던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나 낮은 사회적 신분은 그가 위대한 극작가가 되는 데에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쉑스피어는 아마도 고향을 찾아온 지방순회극단의 공연을 통해 연극이 만들어내는 마술적이고 신비한 세계를 경험했을 것이다. 부친이 지방행정관으로 일하던 당시 스트랫퍼드에서는 12개가 넘는 극단이 18회에 걸쳐서 공연을 한 바 있다. 어린시절 고향에서 경험한 다양한 민속축제와 전통적인 생활 관습들 그리고 자연에서 보낸 일상 역시 후날 그가 상상력과 뛰여난 관찰력, 예리한 언어감각으로 다양한 인간 모습을 만들어낼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됐다.

이렇게 보통 사람들의 삶과 언어를 통해 깊은 통찰력을 학습한 쉑스피어는 수사적인 정교함과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기교 등을 내세웠던 당대의 대학교육을 받은 극작가들이 결코 할 수 없었던 일, 즉 모든 계층의 관객이 즐길 수 있는 연극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1582년 18세가 되던 해, 쉑스피어는 우스터 주교로부터 특별허가를 받아 여덟살 년상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한다. 앤은 다음해 5월 첫딸 수잔나를 낳고 1585년 쌍둥이 남매 주디스와 햄넷을 낳았다. 그러나 아들 햄넷이 11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는 불행을 겪기도 한다.

이후 쉑스피어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부친이 저당 잡힌 부동산을 되찾는 소송에 관련된 기록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1592년 극작가 로버트 그린이 자신의 팸플릿에서 그를 ‘우리의 깃털로 치장하고서 벼락출세한 까마귀’로 묘사한 것으로 보아 이때는 이미 런던 연극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쌍둥이가 태여난 1585년부터 1592년 사이의 7년은 쉑스피어의 생애에서 흔히 ‘잃어버린 시기’로 불린다. 기록이 없는 이 시기에 그가 무슨 일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들이 있으나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스트랫퍼드를 방문한 극단을 따라 런던으로 와 배우와 극작가로서의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미 결혼을 한 쉑스피어가 길드에 연습생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겠지만 비교적 계약이 느슨한 극단에 들어가는 일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쉑스피어가 런던에 왔던 1580년말에서 90년대초, 이 도시는 지방으로부터 류입되는 사람들로 계속 팽창하는중이였다. 헨리 8세 당시 5만명에 불과하던 런던의 인구는 엘리자베스 녀왕 시대 20만명에 이르렀고 런던은 흑사병과 각종 범죄가 야기한 사회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유럽 각지로부터 새로운 문물이 류입되며 국제적인 도시로 발돋움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런던에서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오락이 바로 대중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이였다.

로버트 그린의 팸플릿에 등장했던 1592년, 쉑스피어는 이미 《헨리 6세》 3부작과 세네카와 키드의 복수 비극을 모방한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로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쉑스피어가 이처럼 초기부터 극작가로서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그가 당시에 가장 인기 있는 극단인 로드 체임벌린 극단 소속이였다는 점, 훌륭한 배우들이 있었고 수천명에 이르는 각계각층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대중극장이 존재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크리스토퍼 말로 토머스 키드 같은 대작가들이 이 시기 세상을 떠나 유력한 경쟁자가 없었던 것도 호재로 작용했을 것이다.



쉑스피어는 1590년에서 1597년 사이에 라파엘 홀린셰드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년대기》에서 가져온 영국 력사를 바탕으로 두개의 력사극 4부작을 썼고 1593년에서 1600년 사이에는 10편의 랑만 희극과 두편의 비극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와 《로미오와 줄리엣》을 썼다. 1592년과 1593년 사이 흑사병의 창궐로 극장이 문을 닫게 되자 극작품을 쓰는 대신 장편 설화시 와 을 집필, 후원자인 사우샘프턴 백작 헨리 위슬리에게 헌정한다.

하지만 1594년 극장 문이 다시 열리면서 쉑스피어는 이제 극단 주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되고 이후 오로지 극단을 위해서만 작품을 쓴다. 대략 일년에 두편의 작품을 썼고 주주로서 그리고 전임 작가로서 극장수입의 일부를 배분받았다. 당시 극작가들은 대개 극단에 소속되지 않고 작품을 팔아서 수입을 얻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쉑스피어는 후원자에 의탁하지 않고 저작권료로 생계를 유지한 최초의 직업 극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극작을 하는 동시에 배우로도 계속 일했는데 벤 존슨의 희극 《십인십색》과 비극 《세자너스》에 출연했고 자신의 작품 《햄릿》에 나오는 유령, 《뜻대로 하세요》의 아담, 《헨리 5세》의 코러스를 맡기도 했다.

이렇게 경제적 상황이 호전되자 1596년, 부친의 념원이였던 가문의 문장을 다시 신청한다. 농부의 손자인 그가 이제 젠트리 계급으로 신분이 상승한 것이다. 1599년에는 템스강 남쪽 서더크에 글로브 극장을 신축하는 데 참여했고 극장 수입의 일부를 받는 것외에도 스트랫퍼드와 런던의 부동산 매입과 곡물 투자로 부를 축적하는 수완을 보였다. 1597년 구입, 림종시까지 머물렀던 뉴플레이스는 당시 스트랫퍼드에서 두번째로 큰 저택이였다.



말년의 쉑스피어는 주로 스트랫퍼드에 머물면서 일이 있을 때면 런던으로 갔다. 작품활동도 뜸해져 1613년 이후 마지막으로 쓴 두편의 희곡(《두 귀족 친척》과 《헨리 8세》)은 그의 뒤를 이어 극단의 전임 작가가 된 존 플레처와 공동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1616년 4월 23일, 쉑스피어는 고향 땅에서 52세를 일기로 사망했고(사인은 알려져있지 않다) 스트랫퍼드 홀리 트리니트 교회의 성단소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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