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저녁밥을 먹고 나서 한참 운동을 끝내고 내가 좋아하는 ‘다큐멘트리’ 로 채널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미용 마스크(기계)를 얼굴에 가면처럼 씌웠다. 미용 마스크는 코로 숨쉴 수 있게 구멍도 뚫어놓고 눈으로 볼 수 있게 안경처럼 볼록유리를 끼웠다. 나는 주위 물건은 잘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빛이 강한 텔레비죤 화면은 지장없이 볼 수 있게 설계도 그만하면 잘 하였다고 감탄하였다. 하지만 보다나니 그게 아니였다.
“엉? 화면에 나오는 식품들 색갈이 왜 이러지? 색갈이 도저히 분간이 안되네…”
앞으로 다가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일단 마스크를 벗었다. 그러자 오색령롱한 식품재료 색갈이 한눈에 안겨왔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다시 마스크를 꼈다. 무색? 아니 옛날 흑백텔레비죤에 나왔던 그 색갈이다. 채색이 흑백, 회백색으로 나왔다.
엉? 무슨 영문일가? 호기심이 무척 동했다.
나는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연구를 가동했다. 마스크의 볼록 안경은 투명한 빨간색이다. 텔레비죤외의 집안 구석구석을 다 살펴보았다. 흰벽은 불그레한 색갈로, 화초들은 검회색으로… 이 빨간 안경알 너머로는 모든 색갈들이 본연의 색체를 잃었다.
아, 워낙 ʻ색안경’이 이런 거였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귀등으로 들었던 말을 우연히 실감나게 느끼게 되는 시각이다.
“세상은 색안경을 끼고 보면 아무리 좋은 것도 다 나빠 보인다.”
귀에 익은 말이다.
“색안경: 색갈이 있는 렌즈를 낀 안경. 주관이나 선입견에 얽매여 좋지 아니하게 보는 태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해석은 일단 이러했지만 내 마음의 여운은 이것만이 아니였다.
나는 애들이 흑판의 글씨를 틀리게 보거나 과문의 글씨를 틀리게 보았을 때 공감을 해주지 못했던 적이 한두번 아니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글씨를 똑바로 잘 보고 읽어요.”였었다. 한번은 부랴부랴 안경을 찾아 끼는 학생의 안경을 가져다 내 눈에 껴보았더니 잘 보이기는 커녕 눈앞이 뿌옇게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이 안되고 머리가 어질어질 해났다. 근시안경을 낀 동료의 웃기는 말을 빈다면 안경을 안 끼면 우리 얼굴이 맨 떡판 같다는 것이다.
안경을 끼지 않은 내가 ʻ색안경’을 끼고 섣불리 판단하려고 했던 건 근시안경 사건뿐이 아니라 내 마음의 ʻ안경’이 흐려져 의심의 ʻ안경’, 금이 간 ʻ안경’, 선입견의 ʻ안경’을 꼈던 것이 분명하다.
특히 교원에게 마음의 ʻ안경’을 잘못 껴서 학생들의 행동을 ʻ색안경’을 끼고 보았는지 곰곰히 자신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요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어느 학교나 모두 온라인 수업을 진행한다. 화면너머로 학생들과의 호응은 인테넷 신호처럼 좋았다 끊겼다 한다. 하지만 새로운 령역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학생들의 적응능력과 접수능력, 표현능력 등은 학교에서 상대하며 공부 할 때와 사뭇 다르다. 학교에서 보지 못했던 가정에서 부모와의 교류, 가정례절, 절제능력, 가정로동 정황, 취미 등을 접속하며 학생들의 새로운 면들을 실감하며 알아가고 리해하게 된다. 그래서 요즘 나는 원시안경에 확대경, 현미경까지 동원하여 본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귀로 듣는게 진실이 아닐 수 있고 눈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수 있다.
교육자는 어찌 보면 저울같은 공정성과 진실을 추구하는 감별성, 자기가 접하는 령역의 지식을 처리하는 융합성과 미래를 바라보는 육안을 두루 갖추어야 하는 원견성 등 여러가지 능력과 감각성을 가진 촉각이 예민한 사람이여야 한다. 여기에 사랑의 ʻ안경’까지 끼면 애들이 꽃을 본 꿀벌처럼 따를 것이고 말을 경청하는 청중들이 있고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 한 교원의 인생은 더욱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안경을 끼면 물체가 립체적으로 다각도로 볼 수 있다는 VR안경까지 동원하여 학생들의 립체의 다 각도의 모습, 상상의 모습, 미래의 모습을 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치치할시조선족학교 리연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