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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정의 이야기로 들여다 보는 살맛 나는 한 촌마을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0.07.14일 10:25
  (흑룡강신문=하얼빈) 빈곤한 강변 갯벌 마을이 였던 장가항시 영련진 영련촌은 오늘날 전국 60만개 행정촌중에서도 이름있는 뜰뜰한 촌으로 변모했다.

  우리는 영련촌의 세 가정의 이야기를 통해 영련촌이 가져온 시대적 변화를 견증하고 이웃간에 화목하고 서로가 지킴이 되여주며 돕고 이끄는 정신적 따뜻함을 느껴본다.

  “기울임 없이 공정 공평하게”



  원주민 고수금네 가정(영련촌 제공)

  고수금은 영련촌 갯벌 개간민이다. 촌의 농산물시장 관리직에 있다가 2006년부터 영련촌 촌민위원회 파가이주 사무실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했는데 지금은 남편과 함께 영련진의 로인아파트에 살고 있다. 이들의 아들 며느리는 영강그룹의 종업원이며 이 집 네식구는 다 영련촌의 사원이다.

  고수금 량주의 일과는 아침에 채소시장을 한바퀴 도는 걸로부터 시작된다. 근근히 채소거리를 사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돌아보면서 함께 살아온 마을 사람들을 만나 서로 안부라도 나누기 위해서이다. 요즘 마을사람들의 화제는 2020년 촌의 문명가정평선방법이라는데 서로 뒤질세라 문명가정기준병, 금질, 은질 가정에 뽑히려고 애쓰고 있단다.

  영련촌이 가장 가난했던 시기를 겪어온 고수금네 량주는 “우리는 지금 아들, 손녀가 효도하는 돈을 쓸새 없다네. 촌에서 타는 복리금이면 넉끈하니까! ” 하며 오늘날의 생활에 매우 흡족해 한다.

  고수금은 대부분 낮 시간은 마을 자매들과 함께 촌 로년활동센터에 나가 보낸다. 탁구, 당구, 강락구 등 놀이를 즐기고 때로는 장기도 한판씩 둔다. 날씨가 좋지 못할 땐 몇몇이라도 집에 모여서 함께 건신 체조라도 즐기고. 저녁 식사후 시간은 량주가 함께 하는 시간인데 텔레비죤 방송도 시청하고 인터넷에 접속해 유희도, 채팅도 즐기는데 전혀 심심할 새가 없단다.

  “지금 같은 생활을 30년 전이였다면 꿈이나 꾸었겠나?”

  영련촌에 발을 들여놓던 첫 몇 해를 돌이키면서 고수금은 습관적으로 웃으면서 손을 가로 젓는데 음성도 높아지는듯했다. “내가 이 촌에 처음 왔을 땐 촌이 너무 못살았지. 도적은 왜 또 그리 많던지. 처녀들이 이곳으로 시집오려 하지 않았다네.”

  글쎄 영련촌의 서기 오동재가 처음 부임돼 오던 날 린근의 농장사람들이 좀도적 세 사람을 앞세우고 찾아 왔는데 그 세사람은 다 그 농장에서 붙든 영련촌 촌민들이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마 그날의 그 정경이 오서기를 크게 진동시켰을 거네. 우선 배를 곯게 하지 말자고 그해로 그는 촌민 300여명을 이끌고 어장을 만들었네. 그 뒤로 륙속 작은 공장도 앉히고 강철공장도 세웠는데 영련촌의 셈평은 그때로부터 차차 좋아지기 시작했지!” 라고 고수금은 그때를 돌이킨다.

  1995년 ‘먼저 부유해진 데서 뒤떨어진 데를 이끌자 ’는 상급의 요구하에 영련진에서는 촌들을 합병하기 시작했다. 대가정에 갑자기 외적 식솔이 새로 늘어나는데 어떻게 하면 니거 내거 가리고 따지지 않겠는가? 오동촌서기가 “원 촌민한테 1만원 현찰 보조를 발급하는 형식으로 일괄해 원 영련촌민의 공로를 사들이는” 방법을 내놓았다. 하여 그때로부터 “영련 대문에 발 들여놓는 이는 바로 영련사람”으로 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 사발 물을 선후 분별없고 기울임 없이 공평하게 든다’는 작법에 대해 고수금도 많은 촌민들처럼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안그러면 원 영련사람들은 무료로 가스비, 자녀 학비 등을 누릴 수 있었는데 촌을 합병하는 바람에 인구가 많아지면서 이 부분 대우는 없어져버렸으니까. 그러고도 원 영련사람들이 고생하면서 벌어놓은 집체 자산을 후에 온 사람들과 고루 나누어야 한다니 속으로는 원망이 없을 리 없었지...”라고 고수금은 말한다.

  원주민들의 은근한 원망소리들 앞에서 오동재는 대면하는 이들마다에게 “원 촌민들의 기여가 많고 희생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촌을 합병하는 것은 보따리를 안는 것이 아니라 발전공간을 함께 넓혀가자는 것이기에 서로한테 리로운 것이고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원촌민들과 새 촌민들간에 대우가 다른 것으로 알륵이 생긴다면 그건 미래 발전에 영원한 격차를 남기게 된다. 또한 이 문제는 오래 끌수록 처리하기 더 어려워지게 된다 .”

  오동재의 당시의 진담은 고수금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 뒤의 몇년간, 영강그룹의 생산규모 확장과 새농촌건설의 수요로 하여 영련촌은 여러차례의 파가이주, 재개발을 겪게 되였다. 만약 ‘원집 크기에 따라 분배하는 ’상규적인 재분양 방법을 실시한다면 잘 살던 집은 그냥 잘 살고 가난했던 집은 그냥 가난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나 영련촌에서는 ‘재개발과 재 분배는 무관, 재개발에 든 가정에는 집 한채씩, 로인들은 로인아파트에 입주한다 ’는 분배정책을 채택했다. 재개발에 드는 파가호에는 1차성적으로 해당 표준에 따라 보상금을 지불하고 재분양 시에는 결혼증에 따라 집 한채씩 분양받을 수 있게 했으며 퇴직한 로인들은 2.4만원이란 보증금만 내면 80평방메터되는 로인아파트에 들수 있었다.

  허나 가정마다 다 주택이 있게 하자는 그런 보다 공평한 분배정책도 실시하는데 그저 순리롭지만 않았다. 촌민위원회에서 파가이주사업을 책임지고 있던 몇년간에 고수금은 불평자들이 찾아와 책상을 뒤엎고 괭이를 휘둘러 댄 바람에 몸 빼 달려나온 험한 일을 한두번 당한 것이 아니였다. “그 일에 입이 부르틀 지경이였지. 다행스럽게도 후에 이웃들도 동원돼 입을 모아 일들이 풀렸다네. 실로 ‘혼자 잘 산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고 다 같이 잘 살아야 잘 사는 것’이란 말이 딱 맞네!” 지금 살고 있는 로인아파트를 가리키는 고수금이나 이웃 촌민들 할 것 없이 오늘날 이들은 더없이 흡족해한다.

  “토론 석상에서 토론하는 것은 마을어구서 티각태각하는 것보다 낫다”



  륙위홍(왼쪽으로부터 네번째)과 그의 동료들. (영련촌 제공)

  새 촌민 륙위홍네

  륙위홍은 2008년 9월 영련촌에 마지막으로 합병되여 온 새 영련촌사람이다. 재봉일도 해보았고 문체용품상점도 경영한 적 있는 그는 2010년 영련촌영합사회구역주민위원회의 집중구 구장으로 초빙되였다가 2017년 1월부터 사회구역 제2네트워크사업련락부 책임자로 일터를 전이했는데 지금은 소주시인대대표이기도 하다. 2008년에 영련촌에 편입된 새 촌민인 륙위홍으로 볼 때 촌의 공공사무에 참여한지 10년이 된다. 원주민과 새로운 합병 촌민들간에서의 소통에서 그는 종래로 그 어떤 간격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서 그는 “한마을, 한집안이니 서로 믿고 서로 의지하는 그런 어울림 속에서 자신이 이 대가정을 위해 뭔가는 기여할 수 있는 것에 다들 기뻐한다. ”고 한다.

  륙위홍이 들고 다니는 가방속에는 보플이 인 노트 하나가 들어있다. 그 노트속에는 1000여가구 주민들의 일반 정보들이 깨알같이 적혀있다. 하루에도 수없이 들추어보다나니 보플이 다 일었다. “새 노트를 바꾸려는 참이다. 인구가 많다나니 도저히 다 적어내지 못하겠다 ” 촌민마다의 정황을 이름만 대면 손금보듯 장악하기 위해 륙위홍은 매일 집집이 돌아 다니며 료해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

  아침 8시-11시반, 오후 1시-4시 시간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륙위홍이 아파트들을 순시하는 시간으로 지켜진다. 인구, 주택 상황, 계획생육 등 기초적인 정보를 채집하여 사회관리정보플랫폼에 통일로 기입해 보관서류를 형성하자는 목적 외에도 그는 집집마다 노크하면서 사회구역에 대한 봉사 요구와 건의 사항을 료해하고 이런 저런 모순, 분규, 문제, 우환 등을 미연에 알아내고 있는데 자신이 하는 일에 기쁘고 보람스러워한다.

  사회구역의 일이 그토록 자질구레하고 번거롭지만 그녀는 사람들과 교류하기를 즐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대가정의 도우미 ’로 되였으니 큰 일 작은 일 할것 없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봉사를 잘해야 하고 중점적으로 돌보아야 하는 로인군체에 대해서는 더구나 잘해야 하지 않겠느냐 한다.

  사회구역 대다수 로인들의 눈에 륙위홍은 언녕 그들의 ‘딸 ’로 되였다. 집을 매매하는 일에서부터 하수도수리문제까지 그는 매 로인댁의 문제들을 빠짐없이 체크한다. “쇼륙(小陆), 어서 들어와 좀 앉게 ” 륙위홍이 찾아올 때면 로인들은 열정적으로 반겨준다.

  물론 륙위홍이 해결할 수 없는 시끄러운 일도 있다. “이를테면 생각이 꽉 막힌 집도 있는데 그럴 땐 억울할 때도 있지만 다행스럽게 이웃들에서 나서서 같이 해득시켜준다. 말하는 사람이 많으면 도리는 자연히 납득되는 법이니까. ”

  일상 사회구역문제에 대해 조해하는 외에 촌의 경제합작사 사원 의사(议事)회의에 참가했던 경력에서도 륙위홍은 많은 것을 느끼였다고 한다. “우리 촌에는 촌민이 1만여명 되는데 어느 때든지 자기와 관련한 리익분배에 이의를 가지는 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어떻게 조률하겠는가? 모두 같이 앉아서 회의를 진행해 리치를 따져야 한다고 본다. ”

  륙위홍은 이렇게 말한다. “기실 의사회의를 소집하자고 제기하는 허다한 촌민들은 억지를 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규정에 대해 리해가 충분하지 못해서일 뿐이다. 도리를 의사석상에 내놓고 집단적으로 의논, 토론한다면 모순자 끼리끼리 마을어구서 티각태각하는 거보다 훨신 낫다고 본다. ”

  “지금 촌의 크고 작은 일들은 다 촌민들이 토의하여 결정한다. 단 보조비, 파가 안치, 토지 징용 등 문제에 관계된다면 전체 촌민대표대회를 소집하는데 사람마다 투표권리를 리행한다. ”

  륙위홍으로 하여금 놀라게 한것은 의사제도가 부단히 완벽해 짐에 따라 촌민들의 사상관념이 서서히 전변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말을 하고 싶어하던 데로부터 말을 할줄 알게 되였고 어찌는가 구경이나 하자던 데로부터 도리를 헤아려 들으려 하게 되였다 .”누가 촌의 아중마들은 길가에 모여 앉아 혀를 놀려 남의 흉만 볼줄 알 뿐이라고 했는가? 우리 영련촌에서는 누구든 담론하는 것은 시사정치이고 관심하는 것은 년말 총결산이며 사원들의 권리 향수가 공평하느냐 하는 문제이고 아파트 문명공약이 제대로 됐느냐 하는 등 공공 화제이다 .”며 륙위홍은 자부감을 배로 느낀다고 한다.

  “촌민이 아니지만 영련촌은 집처럼 편안하다 ”



  리금량네 .(영련촌 제공)

  새로 가입한 시민 리금량네

  리금량은 강소성 련운항시 관남현 사람이다. 2005년 서안건축과학기술대학 법학 본과 졸업후 영강그룹에 와 사업하기 시작했다. 선후로 기초건설, 입찰사무, 법무, 심계 등 여러 직무에 전전하면서 단련받아 지금은 영강그룹 감독 심계부에서 일보고 있다.

  리금량의 안해 유소연은 안휘성 지주지역 사람이다. 그녀는 2009년 안휘 공정대학사회사업전업을 졸업하고 영련에 와 지금은 전직 사회복지사무직에서 일한다.

  14년전 25살나는 리금량한테 각 향촌들은 대체상 고향인 련운항시 관남현의 농촌과 별 다를 바 없다는 관점이였다. 그래서 졸업하는 해 그는 도시에 남아 소위의 회사생활을 하느냐 아니면 배운 전업과 전혀 맞지 않는 , 그것도 농촌에 자리한 영강그룹에로 가느냐 하는 선택앞에 서게 되였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보다 크고 보다 정규적인 단련을 받아보려는 동경심에서 2006년 그는 처음으로 영련촌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처음엔 놀랐지요. 와보니 농촌에도 이렇게 시대에 뒤지지 않는 현대화 전망설계가 있단 말이지요. 줄줄이 몰라보게 고층 아파트들이 일떠서고 있었고 더는 땅에 억매이지 않는 촌민들이 기업에서 출퇴근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자주적으로 창업하고 있었는데 생기가 넘치는 촌의 분위기와 살기 좋은 생활환경은 당시의 일부분 도시들도 울고가게 했고 나한테 믿음직스러운 귀속감을 주었지요.”라고 리금량은 추억한다.

  “생활이 따분하지 하지 않을가, 왕따 당하지는 않을가 하는 오기전의 우려는 말끔히 가셔졌지요.” 리금량은 향촌들의 봉페되고 배타적인 의식은 외래인으로 하여금 비주류화되게 하지 않을가, 일도 어지럽고 힘든 일들이 아닐가 했는데 의외로 오자마자 평등한 대우를 느끼였다며 “이런 포용성, 개방성은 많은 도시들에서도 갖추기 어려울 것입니다. ”고 한다.

  “비록 우리는 ‘촌민’이 아니지만 영련에서 대가정 일원처럼 살고 있는 느낌입니다. 영련의 개방,겸용하는 환경과 투명, 공개적이고 성숙되고 완벽한 인사, 대우, 승진 체계는 사람들로 하여금 여기서 사는 게 편안하고 만족스럽고 분투목표가 있게 하고 노력하면 노력하는 것만큼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

  리금량한테 “농촌에서 견디여 내겠는가? 큰 도시로 나가서 발전해볼 생각은 없었는가 ?”고 물어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리금량한테 직업은 근근히 일한만큼의 수입을 얻고저만 종사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는 생활상에서의 획득감을 더 많이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영련의 인성화관리, 따뜻하고 살기좋은 환경, 평등 투명한 경쟁기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련을 선택하게 하는 ‘자석’으로 된다고 리금량은 말하며 이런 것들은 다른 곳에서 근근히 봉급을 올리는 것만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고 한다. 중요한 건 여기엔 집과 같은 따뜻함이 있는 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라 한다.

  /구시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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