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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대학 백세 교수 대학에 장학기금 설립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20.07.21일 10:01



장학기금 기증서에 싸인하는 당유기교수.

7월 11일은 우리 나라 저명한 화학가이며 교육가인 중국과학원 원사, 북경대학 교수 당유기옹이 백세를 맞이하는 날이다. 이날 그는 자신과 작고한 부인 장려주의 이름으로 북경대학 당유기ㅡ장려주 장학기금을 설립하여 북경대학 화학분자공정학원과 의학부의 우수한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발급한다고 밝혔다.

중국 화학 발전을 위하여 일생을 공헌한 당유기교수

국제화학계에서 이름난 당유기 원사와 ‘중국 시험관어린이의 어머니’로 불리는 장려주, 이들 과학가 부부는 우리 나라의 교육과 과학연구 사업을 위하여 모든 것을 헌신한 분들이다. 당유기 원사는 1920년 7월 11일 상해에서 태여났으며 1937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고중을 졸업하고 청화대학에 진학하려고 준비하던 중 항일전쟁의 전면 폭발로 청화대학에서 상해지역의 학생모집을 취소하는 바람에 상해 동제대학을 신청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44년 당유기는 미국류학의 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그는 경절화학과 분자생물학 등 선진지식을 학습하였다. 1949년 새중국이 성립되였다는 소식을 접한 당유기는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려고 작심하였다. 그러나 미국 이민당국에서는 과학분야의 지식을 배운 모든 중국류학생들은 일률로 출국을 금지한다는 사법당국의 명령을 받게 된다. 당유기의 스승도 그가 중국으로 돌아가련다는 것을 알고 극력 만류했다.



1947년 미국류학 시절의 당유기.

당유기는 “비록 중국의 조건이 미국에 비하여 간고하지만 그러나 필경은 저의 조국입니다. 중국의 화학연구 수준은 미국에 비해 많이 뒤떨어져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저는 돌아가서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당유기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마침내 조국의 품 속으로 돌아왔다.

1951년 당유기는 1년 동안 청화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52년 전국적인 대학교 내 학과의 개편으로 북경대학 화학계로 옮겨오게 되였다. 그렇게 되여 그는 반세기 넘게 북경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과학연구사업을 해나갔다. 결정체화학교재가 없는 상황에서 당유기는 직접 강의내용을 작성했으며 그것을 가지고 대학생들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대학교원들을 상대로 결정체화학교수를 보급해나갔다.

당유기는 우리 나라의 결정체결구와 결구화학 연구 분야에서 기초를 닦아놓았으며 자발단층분산리론을 창립하고 화학생물학의 신개념을 제출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과학의 국제화를 위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기초연구에 중시를 돌릴 것을 건의하였으며 과학연구인재의 양성에 중시를 돌릴 데 관한 등 많은 면에서 공헌을 세웠다.

장려주, 생명과 과학의 길에서 난관을 헤쳐나가다



1952년 1월 고향인 상해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기념사진을 남기다.

당유기의 부인 장려주는 1921년 상해에서 태여났으며 중학시절의 꿈은 비행기를 만드는 것이였다. 1937년 그가 남경국립중앙대학 항공공정계에 입학한 지 얼마 안돼 항일전쟁이 폭발했다. 장려주는 다른 대학으로 전학하여 의학을 전공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그는 미국 콜롬비아대학과 뉴욕대학에 가서 산부인과 내분비학과 국부해부학을 연수하였으며 후에는 또 홉킨스대학에서 부인과병리와 부인과수술을 학습하였다.

1950년 장려주는 영국황실산부인과학원 졸업증서를 따냈다. 인생의 행로에서 한창 승승장구하고 있을 무렵, 그는 단연히 하던 일을 포기하고 조국으로 돌아오기로 작심하였다. “내가 출국한 것은 다름 아니라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지식을 배웠으면 응당 조국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1951년부터 줄곧 귀국하려고 생각하였다.”



1951년 장려주는 류학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오는 배에 올랐다.

귀국 후 장려주는 지인의 소개로 화학가인 당유기교수를 알게 되였으며 두 사람은 1952년 결혼식을 올렸다. 북경대학 의학원 부속병원 산부인과에 들어간 장려주는 그때로부터 북경대학 의학원과 평생의 인연을 맺어갔다. 1958년 북경대학 의학원 제3병원이 창설되면서 장려주는 병원 건설 사업에 직접 참가하였으며 산부인과 주임을 담임하고 의료사업에 혼신을 몰부었다.

산부인과 의사로서 장려주는 그 누구보다도 불임증환자들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로서의 마음으로 불임증환자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려고 작심하였다. 이렇게 장려주는 1982년부터 시작하여 연구경비와 실험설비 등이 부족한 상황에서 시험관아기 연구 사업에 착수하였다. 6년 동안의 노력을 거쳐 1988년 3월 10일 드디여 우리 나라에서 첫 시험관아기가 북경대학 제3병원에서 태여났다.

 

‘중국 시험관아기의 어머니’로 불리는 장려주.

그후 장려주는 계속하여 관련 연구에 정력을 몰부었으며 국내 첫 배자수란관내이식아기, 국내 첫 증란시험관아기, 국내 첫 동용배태시험관아기 등 새 생명들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태여났다.

당유기와 장려주, 우리 나라 화학계와 산부인과의학계에서 전기적 이야기를 써낸 이들 부부는 국가의 과학연구사업 발전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한 수많은 우수한 중국과학가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출처: 인민일보 편역: 리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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