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탈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박씨후손들 한복을 한번 입어보는게 소원
박화 가정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朴万伶(81,前排中,박화 삼촌),朴华(69,前排右),卢翠芳(69,박화부인,前排左),朴成军(49,박화아들,后右三),王玉兰(42,며느리,后左三),朴鸿伟(16,박성군 둘재아들,后左四),朴利娟(40,박화딸,后右二),王一依(9,朴利娟막내딸).
중국에 가장 일찍 진출한 조선족으로 마지막 터전을 지키고 있는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청룡진 박씨촌(秦皇岛青龙县朴氏村)에 9월 12일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베이징 정음우리말학교에서 박씨마을을 찾아 간것이다.
이날 행사에 도시우리말학교협의회 부비서장이며 베이징우리말학교 사무실 주임을 맡고 있는 배귀봉 사장과 베이징시 연교정음우리말학교 정우 상무부교장 및 친황다오 북대하신구 소학교 김진일 교장 선생이 참가했다.
이날 박씨마을 방문은 북대하신구 조선족소학교 김진일(金镇一) 교장선생님(사진后左一)의 주선으로 박리연(朴利娟)과 연락이 되어서 이루어졌다. 김 교장은 당날 모든 스켓줄을 뒤로 미루고 자가용으로 박씨마을까지 안내했다. 동시에 연교정음우리말학교 정우 부교장(后右一)이 베이징과 친황다오 간 왕복 근 600킬로를 함께 했다.
이들은 마을에 있는 박화 가정에서 지나온 역사 이야기와 실상을 듣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박화는朴小丽,朴成军,朴利娟,朴丽英등 아들딸 4명을 두고 있었으며 큰딸朴小丽과 막내딸朴丽英은 이날 집에 있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박화의 셋째딸朴丽娟은 16살 때 베이징에서 출근하다가 20살에 결혼, 자식 3명을 두고 있다. 그녀는 한식을 아주 즐기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떡볶이, 한복을 한번 입어보는게 소원이라면서 얼굴에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소개에 따르면 350년 역사를 지나오면서 여러가지 원인으로 족칭(族称)이 만족, 한족으로 바뀌어 오다가 1982년 국가민족정책으로 조선족으로 회복이 되었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과 족칭의 바뀜으로 민족의 문자, 언어는 물론 민족특성마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조선족이라는 민족의식은 몇백년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았다.
족보가 없다보니 무슨 박씨인지도 모른다고 한다.초창기 350여 세대가 있었지만 현재는 30여호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자신들의 운명을 바꿀려고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산골이라 벼농사도 짓지 못하고 땅에서 나올 수 있는 건 옥수수와 밤, 호두(核桃)뿐인데다 도와줄 사람도 없다보니 쌀밥도 재대로 먹지 못하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김치, 된장도 먹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18년 전에 누군가 족보를 가지고 와서 연변을 통해 조선으로 가자고 했는데 집에 시집온 여자들이 전부 현지인들이라 자기 고향을 떠나는 것을 반대해서 가지 못하고 남았다고 한다.
시간이 너무 지나서 그 때 요청을 한 사람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현재 마을사람들에게 제일 중요하고 급한 일은 문자와 언어를 배우는 것보다 지금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허나 마을사람들만의 노력으로 빈곤탈출(脱贫)하는 일이 너무 어려운 일이기에 우리민족사회의 도움이 절실한 시점이다.
배귀봉 부비서장은 이번 방문에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350여년 전 중국에 진출한 조선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자기 민족을 고집하는 박씨촌 사람들에게 존경심이 절로 간다고 말했다. 동시에 이번 국경절기간인 10월 3일에 정음우리말학교 교사연수회 참가 선생님들을 모시고 박씨마을을 찾아 여러가지로 도움을 줄 방도를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 흑룡강신문 박영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