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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전학삼 탄생 109주년 기념 스토리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20.12.15일 14:06
다재다능한 전학삼, 젊은 시절의 꿈은 기차를 만드는 것



 

저명한 과학자 전학삼.

저명한 과학자인 전학삼(1911.12.11ㅡ2009.10.31)은 우리 나라 유인항천분야의 기초를 다진 사람이며 국산 미사일 연구의 대가이다. 중학교 시절에 전학삼은 모든 과목에서 성적이 우수했다. 대학입학시험을 추리기 전에 그의 수학선생님은 전학삼의 수학성적이 우수하다면서 수학계에 지망할 것을 희망했다.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그가 문장을 잘 쓴다면서 중문계에 지망할 것을 추천했다. 그리고 미술선생은 그에게 예술에 타고난 재능이 있다면서 미술을 전공하기를 바랐다.

나중에 전학삼은 철도공정을 선택하고 기차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1929년 그는 상해교통대학 공정기계학원에 시험을 쳐 입학했다.



상해교통대학 관현악대 단원으로 있던 시절(앞줄 왼쪽 첫번째).

1930년 여름방학, 전학삼은 상한병에 걸려 일년 휴학하면서 항주에서 병치료를 했다. 당시 그의 부친은 그림을 그리는 선생을 청해 전학삼에게 가르치도록 했는데 전학삼은 국화 화법을 금방 장악했다. 후에 대학을 졸업할 림박에 전학삼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1934년급 졸업생 통신록 겉면을 직접 설계했다.

전학삼은 그림에 소질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농후한 흥취를 가지고 있었다. 대학 시절에 그는 학교의 관현악대에 가입했으며 매일 반시간씩 시간을 내 호른(圆号)을 연습했다. 반에서 학습성적이 제일 우수했던 그는 한번은 장학금을 타자 곧바로 상해 남경로에 달려가 음반을 구입했다.

1933년 6월, 수리학시험을 치고나서 과임선생은 반급에서 전학삼이 만점을 맞았다고 칭찬했다. 시험지를 받아쥐고 흝어보던 전학삼은 한문제가 틀린 것을 발견하고 손을 들고 “선생님, 제가 만점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전학삼의 시험지를 다시 들여다보던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험지에 96점이라고 고쳐서 적었다. 그러면서 “전학삼학생은 실사구시하고 자신에 대한 요구가 엄격합니다. 나의 머리속에는 만점입니다.”라고 말했다.

전학삼은 공정열력학을 가르치는 진세영교수를 매우 존경하였다. 한번은 진교수가 만점을 줘야 할 전학삼의 시험지에 99점을 매겼다. 그러면서 “이렇게 점수를 주는 원인은 전학삼이 줄곧 성적이 우수한지라 자만해할가봐 의도적으로 100점을 주지 않았다.”고 말해줬다. 그 말을 듣은 전학삼은 진교수를 더욱 존경하게 되였다.

지도교수가 전학삼에게 사과를 하다



 

1935년 8월 미국 류학의 길에 오른 전학삼.

1935년 8월, 전학삼은 상해에서 배를 타고 미국 류학의 길에 올랐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그는 미국학생들이 중국사람들을 얕잡아보는 태도에 격분해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이 비록 미국보다 락후하지만 누가 감히 나하고 학습에서 한번 붙어볼래?”

기말시험 때 교수가 낸 문제중에 한문제가 매우 어려웠다. 대부분 학생들은 풀지 못했다면서 교수가 학생들을 괴롭힌다고 의견을 토로했다. 교수사무실 문 앞에 붙여진 전학삼의 시험지와 점수를 보고 학생들은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거기에는 교수가 큼직한 글씨로 최고 점수인 A자를 쓰고 또 그 뒤에다 ‘+’ 3개나 련속 달았던 것이다. 그후로부터 학생들은 전혀 다른 눈빛으로 전학삼을 바라봤다.



론문을 담았던 봉투에 영어로 “완성고” 그리고 다시“어떤 것도 최종적인 것이란 없다.”라고 쓴 글이 적혀져 있다.

1936년 전학삼은 자신의 인생에서 세번째로 되는 선택을 했다. 항공엔지니어를 꿈꾸던 데로부터 항공리론을 연구하기로 작심했다. 그리고 그는 학교에 신청하여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력학자인 카르만교수의 박사생 제자로 들어갔다. 한번은 사생 사이에 한편의 론문을 둘러싸고 쟁론이 붙었는데 화가 치민 교수가 책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런데 이튿날 카르만교수는 사무실에서 전학삼을 보더니 머리를 숙이면서 어제 일이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를 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어제 저녁에 한잠도 못잤네, 잘 생각해 보니 자네 말이 맞더군!”

“나는 중국과학자이다”

1941년 전학삼은 미국 《항공과학학보》에 한편의 론문을 발표했는데 항공령역에서 다년간 풀지 못했던 난제였다. 불과 10페지에 달하는 론문이였지만 이를 위해 그가 쓴 수고는 800페지에 달했고 어떤 수치는 소수점 아래 8자리까지 준확하게 계산했다.

론문이 완성된 후 그는 수고를 종이봉투에 넣고 봉투 겉면에 ‘완성고’라고 적었다. 그랬다가 문득 과학자가 진리에 대한 탐구는 끝이 없다고 생각되여 다시 이렇게 적었다. ‘어떤 것도 최종적인 것이란 없다.’

1954년 전학삼은 미국정부의 탄압으로 연금생활을 하게 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굴할줄 모르는 정신으로 연구에 정력을 집중하여 저명한 《공정공제론》을 출판했다. 책 출판과 함께 미국 과학계의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과학미국인》잡지는 특별보도를 할 것을 희망함과 동시에 전함삼의 이름을 미국과학단체에 올릴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을 듣고 전학삼은 당시 편지에다 이렇게 썼다. “나는 중국과학자이다.”



 

1955년 전학삼과 그의 일가족은 조국으로 돌아오는 배에 올랐다.

1955년 9월 17일, 전학삼은 일가족을 거느리고 마침내 미국에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는 배에 오르게 되였다. 소식을 듣고 많은 기자들이 부두까지 몰려와 전학삼에게 미국에 다시 돌아오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 돌아올 리유도 없다. 이는 내가 오래도록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다. 금후에 나는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하여 중국인민들을 도와 자신의 조국을 건설할 것이며 사람들이 존엄 있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외국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우리 중국사람들도 능히 해낼 수 있다”

귀국후 전학삼은 중국과학원에서 력학연구소를 세우는 일에 착수했다. 어느 한번은 진갱 장군이 전학삼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전선생님,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미사일을 만들어 낼 수 있을가요?” 그러자 전학삼은 추호이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왜서 안되겠습니까? 외국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우리 중국사람들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전학삼이 상금을 받은 돈으로 학생들에게 사준 계산자.

1960년 중국의 미사일사업이 금방 시작되였다. 당시 쏘련에서는 자기네들의 도움이 없다면 중국사람들이 미사일을 근본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학삼은 조금도 의심치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난관을 헤쳐나갔다. 그 시기 그는 서북의 기지에 적게는 열흘에서 반달 아니면 한달씩 머물면서 사업에 몰두했다. 그의 행방이 엄격한 비밀이였기에 안해마저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으며 한때는 실종되였는지 해서 크게 안달아한적도 있었다.

전학삼은 일생 동안 여러번이나 원고료와 강의료 그리고 상금을 기부했는데 제일 많이 할 때는 한번에 100만원이나 되였다. 중국과학기술대학 력학계에서 학생들을 가를칠 때 일이다. 20세기 50년대 말, 60년대 초에 계산자는 력학계 학생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도구였다. 하지만 당시 계산자가 비교적 비쌌기에 적잖은 학생들이 살 수가 없었다. 전학삼은 중국과학원에서 받은 1등 상금 만여원을 내서 학생들에게 계산자 하나씩 사주도록 했다.

전학삼은 미사일과 항천사업에 종사할 때로 그렇고 국방과학연구 일선의 령도직위에서 물러선 후에도 여전히 세계적인 과학기술정보와 세태가 돌아가는 동향을 료해하기 위하여 최근에 출간되는 각종 서적들을 사서 열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2009년 10월 31일 세상을 떠나기 두날전에도 전학삼은 여전히 책과 신문을 읽는 것을 견지했다.

/央视新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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