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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한 목소리와 따뜻한 마음으로 행복을 전한다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0.12.25일 13:43
  중국국제방송 조선어부 리정옥 전 아나운서의 이야기

  산좋고 물맑아 가수나 아나운서가 많이 나온다는 화룡시의 한 시골에서 태여난 리정옥씨는 천성인지 아무튼 소학교 때부터 목소리가 류달리 청아하고 발음이 똑똑하여 학교랑독콩클 때마다 그녀의 이름이 비여본적이 한번도 없었단다.

  초중을 졸업하고 농촌에 하향했을 때에도 매번 회의장소나 밭머리에서도 신문을 랑독하는 그의 목소리가 하냥 울려퍼졌다.

  기회가 그녀를 살며시 찾아 왔다. 연변인민방송국에 가서 방송원시험을 칠 기회가 차례졌다. 첫 시험은 바다에 돌던진격이였다. 신심을 잃지 않고 그녀는 새벽에 일찌기 일어나 랑독연습에 게으르지 않았다.

  몇달후 두번째 방송원시험을 맞게 되였다. 첫번이 다르고 두번째가 달랐다. 그녀는 긴장을 누르고 심호흡을 크게 한다음 침착하게 랑독을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의 천성적인 기질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리정옥 아나운서

  마침 오매불망에도 기다리던 방송원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그것도 연변방송국이 아니고 조국의 수도 북경에 있는 국제방송국이였다.

  하얀 소망으로 다가오는 부드러운 새벽의 향기처럼 곧 터져오르는 꽃망울처럼 그녀 인생의 새 출발이 눈부신 기대속에서 서서히 막을 열었다.

  아나운서의 책임감의 중요성을 모르는 그녀가 아니였지만 훌륭한 아나운서로 되기가 그처럼 고달픈줄은 미처 몰랐다. 안타까워 남몰래 흘린 눈물은 그 얼마이며 식사도 잊고 새운 밤도 얼마인지 모른다.

  끈질긴 노력은 헛되이 흘러버리지 않는 법이다. 그 사이 그녀는 조선중앙방송위원회의 초청으로 반년동안 리상벽, 백정선 두 스승을 모시고 화술을 배웠고 한국방송공사 KBS에 연수도 다녀왔다. 그녀는 김태근아나운서와 함께 1990년제11차아세아운동회 때 개막식, 페막식실황방송을 하였고 제43차세계탁구선수권경기때도 실황방송을 하여 청취자들의 찬양과 사랑을 모았다.

  가정 배경

  리정옥은 아버지 리철훈과 어머니 전인순사이에 셋째 딸로 홍색가정에서 태여났다. 할아버지 3형제 모두가 독립운동의 유공자이다.

  할아버지 리군주는 항일운동에 뛰여다니느라 집에도 별로 오지 못했다.

  일제와 한간들의 눈을 피해 할아버지는 밤중에 피뜩 들렸다가 날밝기 전에 집을 나서군 했고 때로 천정에 숨어있기도 했다.

  보통 산에서 헤매다보니 풀뿌리와 나무잎으로 주린 창자를 달릴 때가 많았다. 한번은 너무 허기차서 겨우 빈집에 기여들었는데 대야에 물렁물렁한것이 잡히기에 뭣인지도 가릴새 없이 삼켜버렸다. 날이 밝은 다음 보니 전부 구데기였던것이다. 그래도 구데기덕분에 살아난 셈이다.

  함께 독립운동에 나섰던 분들에 의해 할아버지는 허약한 신체를 지탱하지 못하고 산에서 운명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였다.

  둘째 할아버지는 일찌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쏘련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객사했다는 소문도 있고 지주집에서 일하다가 맞아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셋째 할아버지 리군익은 화룡에서 당지부서기로 활약하다가 1930년 2월에 일본놈들한테 체포되여 화룡현(시)투도구일본형무소에 갇혔다가 룡정일본형무소를 거쳐 지금의 한국 서대문감옥에 전송되였다.

  그는 각종 혹형을 당하면서도 조직을 말아먹지 않았고 혁명동지를 팔아먹지 않았다.

  그러다가 광복전날에 교수형으로 일생을 마감했다. 해방후에 렬사로 추대되였다.

  셋째 할아버지가 서대문감옥에 갇히였을 때 할머니가 손수 두루마기를 지어 갖고 간적이 있다.

  면회는 못하고 입던 옷을 내온걸 보니 피로 얼룩졌고 손바닥만한 피고름이 말라 붙어있었다. 할머니는 너무 기가 차서 그의 옷을 안고 땅을 치며 통곡했었다. 비록 얼굴은 못 보았지만 면회로서는 그번이 마지막이였다.

  셋째 할아버지 력사자료는 한국보훈처에 보관된 "독립군 제6권"에 등록되여 있지만 묻힌 자리를 찾지 못하고있다. 리정옥씨가 몇번인가 한국에 가서 애써 찾았으나 번마다 허탕을 쳤다. 그는 코로나가 일소된후 다시 나가 찾아볼 예정이다.

  정옥씨 아버지도 할아버지 뒤를 이어 어려서부터 지하활동에 나섰다.

  25살에 남편을 잃은 할머니는 숨어다니며 삐라도 뿌리고 비밀편지도 날랐으며 옷을 지어 유격대에 보내주기도 했다. 해방후 할머니는 현로동모범까지 되였다.



리정옥씨의 부모님.

  아버지는 1956년 5월 29일에 입당했다. 1960년도 길림성 로동모범이 되여 메달을 수여받았고 또 우수당원으로 당선되여 회중시계도 수여받았다.

  이러한 훌륭한 가정토대에서 태여난 정옥의 형제들은 모두 공부도 잘했고 품행도 좋았으며 점차 나라의 력군으로 자라났다.

  큰언니 리옥성은 인민대회당에서 모주석의 신변에서 11년간 근무했고 둘째 언니는 공급판매합작사 영업원이 되였고 정옥씨는 중국국제방송국의 어엿한 아나운서로 사업했고 남동생은 아버지뒤를 이어 화룡연초공사 종업원으로 출근했으며 막내 동생 리옥녀는 셋째 언니를 따라 연길시방송국 아나운서로 되였다.

  광활한 천지로

  1968년 10월, 정옥이는 초중을 졸업하고 집체호로 나가게 되였다.

  바로 화룡시내서 67킬로미터 떨어진 하늘아래 첫 동네라 불리우는 숭선공사(향) 하천대대(촌)였다.





집체호 시절(앞줄 오른쪽).

  숭선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경치가 자못 수려하고 공기 좋고 물이 더없이 맑았다. 구비구비 에돌아 빠진 산길은 나무하러 다니는 산길이고 봄이면 산나물 캐고 가을이면 버섯 캐러 다니는 길이다.

  연변노래 '붉은해 변강을 비추네'에 '강물을 가로 막아 산에 올리니...' 이 구절이 바로 홍기하를 가로 지르는 원봉도수관을 가르킨다. 숭선에서는 양수기로 두만강의 물을 60미터 높이에 있는 산우에 끌어올려 비옥한 옥답으로 만들었다.

  바로 유명한 원봉관개수로는 당시 연변의 초대 주장인 주덕해동지의 직접 지휘하에 숭선의 군중들은 자신의 로동과 지혜를 모아 건설한 수리공정이다. 이 수로는 1956년 10월에 착공하여 1958년 5월에 완공되였다.

  세세대대로 감자국에 깔깔한 조밥만 먹어오던 하천의 농민들은 주덕해 덕분으로 토막나무를 때면서 기름진 이밥을 먹게 되였다.

  숭선에는 유명한 군함산이 있다. 산의 형상이 군함과 비슷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군함산에 올라 조선의 선녀봉을 굽어본다는 말이 전해지고있다.

  두만강을 사이둔 숭선에는 상천촌과 하천촌이 있는데 정옥이네 집체호가 바로 군함산아래 하천촌에 자리잡고있다.

  편벽하기로 더 말이 없고 산골에서 우산골이라 할 정도지만 농촌에서 태여난 정옥이를 놓고말하면 대수롭지 않았다. 특히 상해같은 대도시에서 온 지식청년들에 비하면 꽃이였다.

  비록 농촌에서 태여났다하지만 일찌기 화룡시내로 이사했고 농사일 한번 못해본 정옥씨는 일이 서툴기 형편없었다. 하여 항상 남들뒤에서 서성거렸다. 남보다 맥은 곱절 빼지만 미립이 트지 않아 전혀 일축이 나지 않았다.

  정옥씨는 어려서부터 승벽심이 강했다. 공부뿐만 아니라 랑송, 노래, 춤 모든면에서 앞자리를 점해야 했다.

  16살에 부모들이 한사코 반대하는데도 마다하고 화룡1중 장정대에 끼여들어 소흥안령, 대흥안령의 설산을 넘고 눈보라를 헤치며 끝내 북경에 도착하여 천안문광장에서 모주석의 접견을 받았었다.

  그는 악렬한 환경에서도 말못할 난관에 봉착해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익히면서 차츰차츰 묘리를 장악하게 되였다.

  이처럼 애쓴 보람으로 기음, 밭갈이도 척척 하게 되였고 톱질이며 흑칼질도 남성들 못지 않았으며 30근짜리 시멘트포대도 어께에 메고 산꼭대기까지 오를수 있었다.

  자신의 꾸준한 노력으로 정옥씨는 집체호로 간 일년 반사이에 생산대 부녀대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3년간 화룡현모주석저작학습 기준병으로 당선되여 표창받았다.

  그래도 정옥의 머리속에는 방송원이 되려는 일념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선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원들의 목소리에 그는 넋을 잃은듯 귀담아 듣군했다.

  그는 회의전이나 밭머리쉼에도 신문을 읽어주면서 랑독의 기량을 닦았다.

  정옥씨한테는 순박하고 정직한 농민들이 그처럼 좋았다.

  집체호 호장은 늘 집체호로 찾아와 구들목을 짚어보기도 하고 땔나무, 쌀이며 실어왔고 이웃에 아주머니들은 김치며 된장이며 남새까지 가져다 주군 했다. 마을사람들이 어찌나 살갑게 구는지 여기서 부모의 따뜻한 정을 느낄수 있었다.

  하천에서 옥석으로 가려면 강을 건너야 했다. 강이라 해도 일반적으로 물이 무릅우를 넘기지 않지만 물살이 센축이였다.

  한번은 소수레에 5~6명이 앉아 집으로 오는 길에 이 강을 건너다 한쪽 수레바퀴가 돌에 걸려 소가 멈춰섰다. 무슨 일이나 선두에 잘 나서는 리정옥인지라 물에 텀벙 뛰여들어 "이랴" 하면서 소고삐를 낚아챘다. 이때 수레끌채가 휘청하며 정옥이를 치는바람에 정옥이는 뒤로 넘어지고 소가 정옥의 발을 밟으며 건너갔다. 칠팔백근 되는 황소한테 밟힌 발등은 대뜸 만두처럼 팅팅 부었다. 그는 사람들한테 업혀 위생소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이틑날에도 그는 절뚝거리며 생산대일에 참가했다.

  숭선은 고산지대라 아침에 특히 차가웠다. 벼씨를 뿌리거나 모내기를 할 때면 살얼음이 간 논판에서 바지가랑이를 걷어올리고 일했다. 장화도 없이 살얼음에 묻힌 두발은 진짜 칼로 살을 에이는듯한 고통이였다. 책에서나 읽어오던 아픔을 그는 농촌에서 직접 체험하였다.

  이렇게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지금은 숭선이 진으로 부상하여 제1진이라 불리우고 해관은 제일관이라 부른다.

  정옥이는 학교에서 지식을 배웠고 집체호생활에서 지혜를 배웠다.

  특히 농촌에서 잔뼈가 굳어지고 의지를 련마하게 되였으며 농민들의 심후한 감정을 진정으로 느끼게 되였다.

  농촌생활은 정옥이로 하여금 모든면에서 성숙되게 하였으며 부지런하고 근면하고 착한 농민들의 근성은 정옥이의 생활면에서 본보기로 되였고 사업에서 등대로 되였다.

  배움의 길에서

  1972년 6월 15일, 정옥이는 중국국제방송국 청사에 들어섰다. 우중충한 고층건물과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오른 발사탑을 멍하니 바라보는 정옥의 부풀어 오르는 심정이야 그 어디에 형용하랴?!





  자기가 밤이고 낮이고 꿈꾸어오던 리상이 드디어 실현되였다고 생각하니 온 세상의 자랑과 긍지와 행복을 독차지한듯 싶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이번에 6천여명의 응시생들이 5번에 걸쳐 나중에 몇몇이 방송원에 합격되였다.

  정옥이는 김태근, 서창술 두 선생과 함께 국제방송국에 입사했다.

  이전엔 전부 방송원이라 했는데 한국과의 문화교류가 형성되고 국교가 건립된후 방송원 호칭이 아나운서로 변해갔다.

  국제방송국은 완전히 배움의 전당이였다.

  절대 대부분이 대학을 졸업했고 여러해 사업한 경험이 있고 다재다능한 분들이였다.

  전례없는 운동바람에 중학교도 변변히 졸업못한 정옥이는 회의때 자기 심정조차 제대로 표달할수 없었다.

  배우자! 정옥씨가 처음으로 다진 커다란 결심이였다.

  배우는것은 일종의 신앙이다. 그는 우선 로방송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발성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방송원의 자질을 높이는것이 선차적인 과업이였다.

  학교나 농촌에서 신문을 읽는것은 랑독이지 방송이 아니였다.

  방송이 그처럼 힘든줄 처음으로 느끼게 되였다.

  어떤 난관이 있다해도 방송을 포기할수 없었다. 포기하지 않는것이 실력임을 그는 깨닫고 있었다.

  그는 남들이 퇴근한 후에도 혼자 사무실에서 각고의 노력을 들여 실무에 연찬했다.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차례지는 법이다.

  중국국제방송국의 파견으로 조선중앙방송국에 가서 반년동안 리상벽, 백정선 등 유명한 방송원을 모시고 열심히 배우게 되였다.

  여기서 그의 실력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때문인지 국제방송국에 돌아와서도 그의 방송흐름은 평양식에 가까왔다.

  김일성주석이 중국을 방문한 뉴스를 방송했을 때 재중조선대사는 평양방송인가 착각했다고 칭찬했으며 평양의 방송원들도 절찬의 편지를 보내왔다. 정옥의 방송은 항상 시원시원한 멋이 있었다. 특히 그는 조선의 청취자들의 칭찬의 편지를 수태 받게 되였다.

  일본에 거주하는 어떤 한국인은 리정옥의 방송을 애청한다면서 프로를 록음해 보내달라고 소형록음기까지 보내왔다.

  1990년 중국에서 진행된 제11회 아시아운동회의 개페막식을 정옥이는 김태근선생과 함께 8만명을 용납하는 북경로동자경기장에서 실황방송을 하여 절찬을 받았으며 천진시에서 거행된 제43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실황을 역시 김태근선생과 함께 성공적으로 진행하면서 조직에서 맡겨준 임무를 원만히 완수하였다.

  이 두번의 실황방송은 정옥이가 방송에서 새로운 궤도에 진입했음을 표징해 주었다.

  김태근선생과 화음이 잘 맞았다. 때문에 국제성을 띤 운동회실황이나 년말특집프로는 늘 이들 둘한테 차례지군 하였다.

  생방송이 힘든것은 사전에 준비했던 원고가 수시로 상황이 바뀌면서 내용이 첨가되거나 삭제되면서 고치고 또 고치군 하였다. 이때면 랑독능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유가 민첩해야 하고 즉흥과 림기응변이 관건이였다. 이 면에서 태근선생이 남보다 특출했다.

  생활이나 사업에서 힘이 되는 사람이 따로 있다. 실천에서 보면 태근선생이 정옥의 방송생애에서 항상 커다란 힘이 되여주는 그런 사람이였다.

  서창술선생과 함께 제16회 당대회 실황방송을 할 때도 드높은 정치각성으로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였다.

  국제방송국 첫 대외 생방송뉴스를 조선어부에서 선참으로 진행하였는데 정옥씨가 담당하게 되였다.

  뉴스를 마치고나니 정옥이의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이때 국제방송국에 주요령도들이 록음실밖에서 정옥의 방송을 듣고 있었다.

  생방송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령도동지들은 정옥이와 일일이 악수하면서 첫 생방송의 원만한 성공을 축하했으며 저마다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이 장면을 찍은 사진이 국제방송국잡지표면에 번듯이 실리였다. 이 잡지 앞표지는 일반적으로 국제방송국 국장들의 대외활동사진을 싣는데 이 앞표지에 올라보기는 조선어부에서 처음 있는 사례이다.

  방송을 하면서 정옥이가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것은 자신이 먹물이 적다는 점이였다.

  한편의 원고를 받아쥐였을 때 정치적인 깊은 리해능력과 정치기후, 력사배경, 지리환경 등 여러면의 지식이 소요된다. 이런 다방면의 지식이 있어야만 원고의 내용을 파악할수 있고 방송내용을 자기것으로 만들어 소화시킬수 있었다.

  그는 정치학습은 물론 문화지식을 높이는데 모를 박았다.

  그는 연변대학 통신학부에 들어가 5년동안 학습을 견지했다. 그때 어음론, 문장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되였다.

  속담에 둔한 새가 먼저 난다고 했다. 정옥이는 개미가 뼈를 녹이는 정신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문학개론, 고대조선어 등 과목의 심도가 깊어질수록 리해가 힘들었다. 그럴 때면 그는 교원들이 주숙하는 호텔에 찾아가서 습득하군 했다.

  정해진 교실도 없이 간고한 환경에서 끝끝내 대학졸업증을 받아쥐였다.

  정옥이는 36년간 방송생애에서 훌륭한 아나운서가 되려면 우선 덕과 문화지식이 겸비돼야 하며 풍부한 생활상식, 품위, 성숙된 기본공이 있어야만 언제 어디서나 당과 인민이 맡겨준 방송임무를 드높은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드팀없이 잘 할수 있다는것을 깊이깊이 느끼게 되였다.

  자식만은 온전히 키울터

  정옥이는 사업을 열심히 하면서도 항상 아들, 딸을 념두에 두고 있었으며 자식을 잘 키워 나라의 력군으로 성장시키리라 마음속으로 다지고 또 다지였다.

  할머니는 늘 "어떤 나무끝에서 어떤 나무잎이 자라니라"라고 했고 아버지는 " 근본을 잊지 말고 일을 잘해라"고 당부하셨다.

  정옥이는 이 말씀인즉 선조의 덕성을 꼭 이어받으라는 뜻으로 새겨 들었다. 때론 엄한 부모로 때론 다정한 친구가 되여 자녀들의 교육에 신경을 쓴 덕에 매일이다싶이 무탈하게 자라나는 아들과 딸이 대견스럽기만 했다.

  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중국라디오영화텔레비방송국 자료실에 배치받았을때 함께 출근하고 점심에 마주앉아 도시락을 함께 먹는 재미가 인생에 제일 큰 즐거움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일년을 넘기지 못했다.

  아들은 얽매인 시간이 싫고 남의 눈치를 보며 일하기 싫다면서 그 좋은 직업을 사직하고 다른 일을 하겠다고 고집세웠다.

  다 큰 아들을 업고 다닐수도 없고 매로 복종시킬수도 없고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직껏 정옥이는 애들이 기가 죽을가봐 종래로 손을 댄적이 없고 큰소리 한번 없이 차근차근 도리를 설명해 주었던것이다.

  아들일 때문에 슬그머니 골머리를 앓던중 하루는 중국은행에서 리자를 대폭 낮추어 대부금을 발급한다는 뉴스를 방송하게 되였다.

  이때 그의 뇌리를 탁 치는것이 있었다.

  원래는 15만원을 정기저금을 해서 리자와 로임을 합해 생활하려던 타산을 접고 대부금을 맡아 국제방송국 앞에 가게 하나를 세맡았다.

  그는 아담하게 식당을 꾸려 아들한테 맡겨주었다. 아들도 성수나 했다.

  정옥이는 할머니한테서 배운 감자전, 된장찌개, 각종 김치, 찰떡 등 조선족들이 즐기는 전통음식을 만들었는데 점차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올 같은 코로나로 해서 다른 식당들에서는 문을 닫는다고 아우성인데 아들이 꾸리는 식당만은 손님들이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상황이다.

  아들 며느리가 정성들여 경영한데서 상가를 새로 사서 식당을 옮겼다.

  딸 리나는 북경시 해정구에 위치한 제11중심학교에 다닐 때 학습성적이 줄곧 앞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초중 3년간 련속 3호학생에 뽑히였다.

  리나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캐나다로 건너갔다. 그는 토론토(多伦多) 방송국에 입사하여 한어와 영어로 사회를 맡아하면서 토론토지역에서 명성이 대단했다.

  그는 영화 부자(父子)에서 무술을 하는 녀협객 역을 감당했으며 한국료리광고에 자주 나왔다.

  리나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이름이 뜨르르했지만 작은 도시인지라 발전전도가 크게 없다고 생각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지금 미국에서 리나는 통역을 잘하는 중국인으로 지목되여 여러 잡지표지에 실리면서 인기를 몰아오고 있다.

  정옥이 손녀이름이 리가엽(李佳晔)이다. 아름다울 가에 빛날 엽자이다. 가엽이는 6살 때 중국국제문화예술센터에서 주최한 동방지성예술콩클에서 독무로 은상을 수여했고 그 이듬해 역시 무용으로 북경시에서 금상을 안게 되였다.

  가엽이는 지난해 국경 70주년 경축할 때 천안문광장에서 습근평주석의 뒤를 따라 인민영웅기념비에 화환을 드리는 영광을 지니였다.



조손3대가 모인 리정옥씨 형제자매들.

  리정옥의 손끝에서 자라난 자식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제앞에 일을 잘 감당하여 정옥이는 가슴이 뿌듯해 난다.

  리정옥이는 바로 이처럼 3대가 화기애애하게 조화로운 사회를 이루어가고있다.

  기부문화

  정옥씨는 천성인지 남을 돕는것을 락으로 여겨 왔다.

  종업원가속이기에 정옥이네 생활이 필경은 산골의 애들보다 많이 나았다.

  그는 도시락에 맛나는 반찬이 있으면 산골애들과 나누어 먹군 했다.

  될성나무는 어려서부터 집체호 있을 때 한동안 유치원교양원으로 있으면서 애들한테 춤과 노래를 배워주고 글자를 배워주는 외 애들의 옷을 씻어주고 머리를 깎아주고 단추도 사다가 달아주고 해진 옷을 기워주었다.

  기부문화는 헌신정신에서 온다.

  정옥이의 이런 헌신정신은 아마 할머니로부터 본받은 것 같다.

  항일시기 할머니는 산에 가서 참나무껍질나 잎을 뜯어다 즙을 내서 흰 목천에 물을 들인후 옷을 지어 유격대에 보내주었다.

  유격대의 위탁으로 김전환이라는 고아를 키워서 19살 되던 해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시켰다.

  전방에서 한쪽팔을 잃고 2등공을 세웠으며 화선입당까지 하고 돌아온 그한테 착한 처녀까지 마주세워 가정을 이루어주던 마음씨 착한 할머니였다.

  정옥의 어머니도 이웃을 썩 잘 도와주었으며 공가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군 했다.

  어머니는 손재간이 특별하여 온 동네의 시집가는 신부 첫날옷과 이부자리 그리고 첫돌 생일옷도 도맡아 했다.

  1977년 7월 농촌을 지원하라는 상급의 지시에 호응하여 어머니는 합신이라는곳에 콩기음 매러 가게 되였다.

  어머니는 혈압이 높아 아버지가 극력 말리는데도 당의 호소에 적극 나서야 한다면서 고열에 콩밭기음을 매다가 밭고랑에 쓰러진채로 영영 일어나지 못하였다.

  정옥이는 평시에도 늘 "은혜를 베풀거든 보답을 바라지 말고 은혜를 받았으면 곱절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이를 좌우명으로 행동의 준칙으로 삼았다.

  1999년 6월에 개최된 전국조선어방송계통 우수종목평의시에 그는 선뜻이 5천원을 기부했으며 2000년 7월에 진행된 중국국제방송국 조선말방송개시 50돐기념행사에 만원을 기부했다.

  지난 8월 27일 흑룡강신문에 "우리 남편을 살려줘요."라는 제목에 남편 김룡주씨가 급성간쇠약진단을 받고 입원하여 4~5일에 한번씩 피를 바꾸는데 거액의 돈이 들어간다는 딱한 사연을 담은 기사를 본후 정옥이는 친구까지 동원하여 각기 5백원씩 보내주었다.

  어찌 이뿐이랴?! 북경시조선족고려협회 행사에도 5천원씩 두차례나 지원해준 일이 있다.

  농촌에서 재교육을 받은 덕분에 정옥이는 콩을 사다가 메주를 써서 구수한 된장을 만들어 나누어 주는가 하면 강변에 가서 넙적한 돌을 가져다 찰떡치고 팥고물까지 만들어 사무실직원의 결혼식에 이채를 돋구었다.

  하여 정옥이는 방송국의 맏며느리라고 칭찬받았다.

  2003년에 사스가 기승부릴 때 많은 직원들이 정상 출근을 못하게 되였다. 그때도 정옥이는 두말없이 두세사람의 몫을 감당했다.

  한방울의 물에서 해빛을 볼수 있듯이 정옥이의 사소한 일에서도 그의 정신면모를 보아낼수 있었다.

  노력의 성과 커다란 긍지

  열심히 땀을 흘리며 애써 노력하는 사람한테 기필코 노력만큼의 결실과 성과가 따라주기 마련이다.

  정옥의 36년간 방송생애 내역을 살펴보면 찬사가 절로 나온다.

  1988년에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최고방송원칭호를 가졌고 중국공산당제16차대표대회 실황방송프로(합작)가 1995년 제8기전국소수민족방송텔레비연구회 특등상을 탔으며 제43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실황방송프로(합작) 가 제1회 전국조선말방송우수종목평의서 특등상, 1996년 제2회 전국조선말방송 청량리컵 우수종목평의서 방송작품이 일등상, 2007년 11월 중화전국신문공작자협회로부터 공헌영예증서를 수여받았다.

  이런 보람찬 사업실적으로 정옥씨는 "중국당대방송원사회자대전" (中国当代播音员主持人大典)에 수록되였고 2018년 중국번역협회에서 출간한 "자심번역가수상자"(资深翻译家获奖者) 책에도 이름이 올랐다.



조남기장군의 접견을 받고 있는 리정옥 아나운서.



주중조선대사관 지재룡대사부부와 함께.

  정옥이 한테서 잊을수 없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정옥이는 평양에서 학습하는 기간에 조선만수대의사당에서 김일성주석의 연회석에 초대되는 영예를 지니였고 또 한국 김영삼대통령의 손목시계를 선물받았으며 2007년에 인민대회당에서 조남기장군의 접견을 받았다.

  조선대사관에서 진행된 김일성주석탄생 백돐기념련환모임에서 리정옥아나운서는 사회를 담당했고 지재룡대사에게 칭찬을 받음과 동시에 꽃묶음을 받아안았다.

  정옥이의 여가생활도 다채롭다. 최초에 진행된 북경시조선족전통운동대회에서 그는 련 3년간 널뛰기 일등을 하였으며 1986년 국제방송국문예공연대회서 독무로 1등상을 수상했다.

  리정옥은 중국 조선어방송계통에서 첫 녀성방송지도(교수)직함을 획득하였다.

  퇴직후 그는 CCTV인테넷방송국제부 한국어역심을 맡고있다.

  이 직무는 중앙텔레비방송국의 심사를 거친후 비준하는데 심사기한이 4개월이나 걸리였다.

  그 당시 석사생이요 박사, 교수들이 다투어 찾아왔지만 선제조건이 방송실무에 익숙해야 했다. 정옥이는 36년간 방송을 해왔고 직함 또한 교수급이기에 적임자였고 자격이 당당하였다.

  리정옥이는 지금 붉게 타오르는 석양노을을 지켜보며 남은 열과 빛을 최대한으로 발사하기 위해 혼신을 불태우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김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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