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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수기]첫빵 매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1.03.03일 10:22



계동현조선족학교 김경희교사

  1983년 교사대오를 건설한다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16세의 꽃나이로 제1기 흑룡강성 오상조선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4년간의 사범생활은 나의 교육생애를 위한 첫받침돌을 든든히 다져놓았다. 기초가 든든하면 삼간집도 짓는다고 했던가.

  1987년 처음으로 교단에 섰다. 신봉중심소학교 4학년 담임교원 임무를 맡았다. 그때 나이 20세. 학생들과 나이차가 7살, 나이 제일 많은 학생과는 4살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4년간의 사범생활, 한달간의 실습생활은 실제교원생활과는 비교가 안되게 경험이 태부족이였다. 사범학교에서배운 지식을 써먹어야 하는데 주위의 선생님들의 토배기방법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사범학교에서 배운 류남현선생님의“강독과교수법”을 체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나를 알아보고 학교령도에서는 처음으로 나에게 전향우질과 공개교수를 내놓을것을 요구하였다. 나는 선뜻이 맡아나섰다.“성냥파는 처녀애”란 과문이였는데 류남현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의, 식,주(衣,食,住)를 틀어쥐고 환상과 현실을 대조시켜 일매지고 일목료연한판서를 조직하면서 강의했는데 한결같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후로부터 현, 시, 성의 교학경색, 공개수업, 우질과교수가 줄쳐 나를 맞이했다.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교학은 4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내에 적당량의 교수목표와 교학임무를 충분히 준비된 교수안과 교원의 다면능력을 발휘하여 완성하면 되는것이라 그나마 쉬웠는데 동생같은 애들의 첫 담임생활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였다. 성냥갑안에 버드나무벌레를넣어 놀래우기도 했고 거마리, 최기를 돌돌 말아 꽁기똘이라고 놀래우기도 했으며 뱀껍질을 가져다가 꿈틀거려 놀래우기도 했다. 워낙 작은 벌레라도 겁에 절어 소학교때부터 사범때까지 등산가서도 벌레만 눈에 밟혀 보배종이 하나 못찾던 나였으니 얼마나 놀랐을가? 그래도 그 시각을 넘기고 나면 난 또 꼬박꼬박 담임교원으로서 해나가야 할 일들을 빈틈없이 밀고나갔다.

  (내가 감당해야할 첫 애들인데 이대로 물러설수야 없지.)

  얼굴이 해쓱히 질려 달달 떠는 누나같은 애어린 선생님이 자기네 보기도 가여웠던지 아니면 매 40분간 교학에서 받은 좋은 인상에서였던지 아니면 내가 자기들한테 줄곧 쏟아붓고 있는 열정때문이였는지 개구쟁이들은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늦게까지 애들을 보도해줄때마다 사과, 포도, 놀, 살구 등 밭에 과일들을 따다 살그머니 내 책상우에 놓아주는애들, 과자, 순대토막, 조개떡, 단설기 등 집에 있는 맛있는 것들을 조용히 넘겨주는 애들로 사랑이 다가왔다. 해떨어져 퇴근하는 시간이면 몇몇 남학생들은 자각적으로 호위병처럼 집까지 바래여주는 역할을 감당하는것이였다. 선생님과 같이 걸으면서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것이 일종의 향수라고 하면서 말이다. 말썽꾸러기 곰이란 애가 반비를 도적질한것을 지혜롭게 해결해낸 일, 구석장군 홍광학생 피우던 담배를 깔끔히 끊게 한 일들이 애들의 생각을 고쳐먹게 했는지도 모른다. 사생의 마음이 합쳐지니 단결의 힘도 커져 처음으로 향 우수반급의 영예까지 지니니 애들은 더구나 내 주위를 감돌았다. 아침문을 떼고 보면언제 누가 갖다놓았는지 조그마한 나물주머니가 늘 나를 맞아주었고 산골에 집이 있는 애들은 산나물이며 산열매, 샘물 등을 가져와서는 맛보라고 했다. 가는정 오는정이라 했던가.그 애들이 커서 고중2학년이 된 어느날 저녁이였다. 내가 살고있는 세집으로 애들이 단설기며 과일들을 사들고 왔다. 아닌밤중에 홍두깨 내미는 격으로 들이닥친 그들이 리해안돼서 영문을 물으니 글쎄 소학교때 어쩌다가 가만히 알아둔 나의 생일이 누구의 생일과 하루차이란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이렇게 문득 찾아왔던것이다. 생각밖의 기쁨에, 행복감에, 긍지감에 젖어 애들과 처음으로 즐겁고 신나는 생일을 보냈다.

  이듬해 생일에는 이제 대학가고 군대가고 한국가고 하해하고 해서 산지사방에 흩어지면 만나기 힘들다면서 함께 생일을 쇨것을 미리 약속요구해왔다. 그 당시 엄마집에서 출근했는데 한칸엔 학생애들, 한칸엔 학교선생님들, 한칸엔 친구들, 주방칸엔 친척들로 생일호황기를 이루었다. 이칸 저칸 넘나들며 생일축하를 받고 서로 각이한 생일파티를 즐기는 묘한 기분에 삶의 의의를 한껏 느꼈다. 그뒤로 지금까지도 고향에 다녀가는 애들마다 꼭꼭 나를 찾아와서는 한자리에 앉아 회포를 나누군 한다. 어떤땐 나절로도 나한테 물어본다. 4학년, 5학년 2년밖에 가르치지못했는데 애들은 왜 내가 이렇게 인상 깊지? 숱한 애들을 2년씩 가르쳤는데 왜서 얘들이 특별히 인상 깊지? 역시 답은 제일 처음 맡은 애들이라 쏟은 정도 어설프게나마 류다른데 그 원인이 있다는 답이 나왔다. 첫사랑은 금을 주고도 못산다 했던가.

  학교에서는 나의 업무능력에 신임이 갔던지 소선대보도원직무를 맡겨주었다. 나는 선뜻이 그 중임을 받아메고 소선대보도원공작을 열심히 추진해 나갔다. 그때부터 매년마다 현 우수소선대보도원영예를 따내서 나에대한 학교의 중시에 보답을 하였다. 따라서 소학교고급교사자격도 손쉽게 따게 되였다. 공은 쌓은데로 간다 했던가.

  후에 같은 사범학교후배가 우리 학교에 분배되여 왔다. 역시 류남현선생님의 강독과교수법을 학습한 후배인지라 강독과교수를 이끌고 나가기엔 충분했다. 그런데 작문과 교수는 어느 선생님이나 기피하고 쉬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선뜻이 작문과 교수를 맡아나섰다. 그맘때면 교학경험도 웬간히 쌓았고 담도 어느 정도 커졌으며 더우기 이미 여러차례 글들을 써서 신문, 교육잡지에 발표하고 시, 성에 우수론문들을 수차 발표했었던터라 작문교수의 감을 잡는데는 큰 장애가 없었다. 처음으로 현 작문과 공개교수를 내놓았을때 40분시간내에 서두, 본문, 결말을 갖춘 우수작문 몇편 발굴해내 한결같은 박수갈채를 받아안았고 그중 두 작문을 다듬어 소학생보에, 꽃동산에 실었다. 그리고 교수후기도 써 교육잡지에도 실었다.

  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학생들도 작문에 신심이 생겨 글쓰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교원이 즐겨 가르치고 학생들이 즐겨 학습하니 애들의 글이 륙속 소년보, 소년아동, 별찌, 아동세계, 꽃동산 등에 실렸고 최미영, 리빈, 한영, 김윤천, 안영, 황지혜... 등 학생들은 희망컵, 만방컵, 류석종컵, 홈타민컵, 새별컵, 등 글짓기콩클들에서 대상, 최우수상, 은상, 동상의 영예들을 여러차례 지녔다. 초중, 고중에 가서도 더 멋진 글들을써내서 휘황한 성적들을 따내는 애들을 보며 긍지감을 금할수 없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고 시 조선어문 골간교수란 무게있는 영예도 따라서 따내게 되였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했던가.

  2004년, 현 조선족교육의 수요로우리 학교는 진소학교와 합병하게 되였다. 나로 말하면 새학교, 낯선교장이였는데 따낸 성적이 있고 능력을봐내서인지 나를 현 우수교사로 추천하였다. 성적은 무게를 대표한다고했던가.

  2005년, 소질보고(述职报告)와 경선(竞选)을 거쳐 새로운 소학교교장이 선정되였다. 마침 현 조선족소학교에 하나뿐인 소학교초고급교사자격명액이 차례졌는데 학교에서는 내가따낸 성적들이 충분하니 도전해보라고 하였다. 나는 좋은 기회라 여겨있는 성적들을 모두 라렬하고 밤낮을 이어 자료들을 작성하여 끝내 전현 조선족학교들에서 유일한 한명의 소학교초고급교사자격증을 따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때 나이 38이였다. 티끌모아 태산이라 했던가.

  2014년, 조선족학교 대교장, 소학교교장을 동시에 새로이 임명하였다.그해따라 몸이 많이 불편해 안되는 신체로 억지로 출근을 이어나가고 있던중 처음으로 조선족학교에 곤난교사보조금이 2명액 내려왔다. 학교에서 그중에 한명으로 나를 추천해 주었다. 학교 령도들에서 나의 로고와 곤난을 알아줌에 너무 감동되였다. 고진감래라 했던가.

  2020년 대교장이 또 새로이 선정되였다. 나도 어느덧 55세 퇴직나이를 눈앞에 둔 로교사로 되였다. 아마도교사생애 마지막교장일듯 싶다. 문학을 중시하고 애들작문을 중시하여 팍팍 힘을 실어주는 교장선생님의 든든한 뒤심이 있어 조문조 연구원중임도 한나이 어린 세대에 넘겨주고 지금은 뒤에서 슬그머니 받들어주고 있는 자세를 취하며 계속하여 애들 작문지도에 정열을 쏟음과 함께 나자신의 퇴직후 글쓰기배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요즘들어 나의 작문도 애들 작문도 중앙조선어방송,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청년생활, 할빈문학, 로년세계, 한국kbs 보고 싶은얼굴 그리운 목소리 방송, 동북아신문, 한민족신문 등에 륙속 실리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길은 발밑에 있다고 했던가.

  지금까지 걸어온 교사생애를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첫빵 매를 많이 맞았다. 또 첫빵 매를 맞기 좋아하였다. 그리고 찾아오는 첫빵 매를 피한 적도 없다. 되려 첫빵 매를 맡겠다고 자진할때가 많았다. 첫빵 매는누구도 맞아본것이 아니라서 그 경중을 모르고 그 매자체가 내가 응당 감수해내야만하는 것으로 안겨져 내가처음으로 그 매를 맞으면서 그 매를맞는 과정을 즐기고 그 과정에서 마음껏 나를 단련하고 기술을 련마할수 있기때문이다. 성공은 늘 준비가된 자에게 찾아온다고 했던가.

  첫빵 매는 나의 교사생애에서 훌륭한 채찍이 되였을 뿐만아니라 이후 퇴직생활에서도, 우리 민족의 문화와 얼을 지켜나가는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것이라는 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우리 민족어로 우리의 글로 우리의 생활의 이모저모를 첫빵매를 맞아가며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우리 민족의 얼을 지켜나감에 든든한 지킴이 역할을 감당할것을 다진다.

  첫 방매는 첫빵 매여서 나는 좋았다.

/김경희, 계동현조선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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