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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100주년] ‘총대에서 정권이 나온다’는 이렇게 제기된 것이였다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1.03.03일 15:11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1927년 3월-1928년 상반기 사이에 살해당한 중국공산당원과 혁명군중 수가 31만여명에 달했다. 그중에 공산당원은 2만 6,000여명이였다.

  제5차 당대회 소집부터 1927년 11월까지 당원 수는 근 5만 8,000명에서 만여명으로 감소했다.

  공회와 농민협회가 도처에서 취체당하고 해산되였으며 공농 운동은 저조에로 나아갔다…

  1927년 대혁명이 실패한 후 공산당인과 혁명 군중들은 야만적인 도살을 당했다. 중국공산당은 적에 의해 와해되고 소멸될 엄중한 위험에 직면했다.

  이런 험악한 환경 앞에서 누가 감히 혁명을 할 것인가? 어떻게 혁명을 견지할 것인가?

  나젊은 중국 공산당은 추호의 두려움을 모르는 뛰여난 품격을 보여줬다. 모택동이 후에 말한 바와 같이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은 결코 놀라 쓰러지지 않았고 정복당하지 않았으며 몰살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땅에서 기여 일어나 몸에 묻은 피 흔적을 깨끗이 닦고 동료의 시신을 정성껏 매장하고는 또 계속해 투쟁했다.”

  총에서 정권이 나온다

  1927년 7월 27일, 주은래를 서기로 한 중공 전적위원회가 설립되였다. 혁명을 만회하기 위해 7월 31일, 전적위원회는 8월 1일 새벽 4시에 남창에서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남창봉기의 일부분 령도저들(좌로부터 주은래, 엽정, 주덕, 류백승).

  1927년 7월 31일 저녁, 남창성은 전투를 앞둔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각 부대 책임자들은 전적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여러 공격 지점들에 만단의 전투준비를 해놓았다. 봉기군의 복장 표지는 목에 붉은 넥타이를 매고 밤에 왼쪽 팔에 흰 수건을 매는 것이였다. 구령은 “강산통일”이였다.

  봉기 시간이 1초 1초 박두해 오고 있었다. 홀연 총지휘부에서 주은래는 하룡의 보고를 받았다. 제20군 1퇀의 한 부영장이 적에게 투항하고 변절했다는 것이였다. 주은래는 과단하게 결정을 내려 기의 시간을 8월 1일 새벽 2시로 앞당겼다.

  째지는 듯한 총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을 갈랐다. 순간 포소리 울부짖고 함성이 하늘을 진감했다. 전적위원회의 지도하에 하룡, 엽정, 주덕, 류백승 등이 인솔한 군대 2만여명이 4시간 남짓한 치렬한 전투를 거쳐 최종 남창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남창봉기는 무장으로 국민당 반동파에 반항하는 첫 총소리를 울렸다. 피와 불의 언어로써 중국 공산당인들이 강포를 두려워 하지 않고 혁명을 견지하는 견강한 결심을 선고했다.

  남창봉기가 일어난 6일 후, 중공중앙은 호북 한구에서 ‘8.7’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모택동은 “정권은 바로 총대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저명한 론단을 내놓았다. 회의는 토지혁명과 무장기의를 진행하는 방침을 확정했으며 대오를 정돈하고 잘못을 시정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낼” 임무를 제기했다. 이로부터 중국 혁명은 대혁명 실패에서 토지혁명 전쟁 흥기에 이르는 력사적인 전변을 시작했다.

  정강산혁명근거지를 건립

  8.7회의 후 8월 9일, 모택동은 호남에 가서 추수봉기를 령도했다.

  봉기는 처음에 중심 도시인 장사를 공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적아간 력량 차이가 너무 현저한 강대한 반혁명 군대의 저항으로 하여 그 손실이 엄중했다. 이에 모택동은 과단하게 명령을 내려 진공을 정지하고 봉기군을 남쪽의 적의 통치력량이 박약한 농촌 산구에로 전이하도록 했다. 이로써 혁명 력량을 보존하고 재발전을 도모했다.

  전이 도중, 극히 어려운 처경으로 하여 많은 이들이 정서가 저락되였고 적잖은 사람들이 부대를 떠나갔다. 9월 29일, 부대는 강서성 영신현 삼만촌에 이르러 모택동의 령도하에 개편을 진행했다. 이를 력사상 “삼만개편”이라고 한다. 삼만개편을 통해 봉기군의 정신 면모는 일신되였다. 한 련장은 안해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날마다 행군하면서 전투를 하고 있으며 돈도 없고 옷도 없지만 정신적으론 더없이 유쾌하다. 전에 우미한 생활을 누리던 시대에 비해 훨씬 좋아졌다. 그것은 자유롭고 그 누구의 억압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동지들 사이에도 한마음 한뜻으로 일치단결되여 있다.”

  10월 27일, 봉기 부대는 정강산에 도착해 이곳에 혁명근거지를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그 원인은 우선, 당지 농민무장 수령이 대혁명의 세례를 받았기에 공농혁명군과의 련합을 원했다. 둘째, 정강산은 지세가 험준하여 수비에 유리하고 공략하기 어려웠다. 셋째, 주위의 여러 현들에 자급자족하는 농업 경제가 있어 부대 식량 마련이 쉬웠다. 넷째, 두 성 변계에 위치한 데서 국민당이 통치하는 중심 도시와 떨어져 있고 적들의 통치 세력이 박약했다.

  당시 국민당 신군벌들 사이에서 전쟁이 터진 데서 공농혁명군은 밖으로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였다. 1928년 2월, 정강산혁명근거지가 초보적으로 건립되였다.

  모스크바에서 소집한 중공 제6차 대표대회

  남창봉기와 추수봉기에 이어 중국공산당은 12월 11일 광주봉기를 발동했다. 봉기군은 한때 광주의 절대 부분 지역을 점령하고 쏘베트정부를 설립했다. 적아간 력량의 현저한 차이로 수비가 어렵게 되자 봉기 총지휘인 엽정은 적들의 주력이 아직 광주로 되돌아오기 전에 봉기 부대를 철퇴시킬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공산국제의 대표 노이만의 반대를 받았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은 관계로 봉기군은 끝내 실패를 고했다. 장태뢰 등 많은 혁명자들이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실천은 국민당 신군벌이 중심 도시에서 강대한 무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도시 무장봉기 혹은 대도시 공략을 통한 혁명 승리 쟁취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재차 증명했다.

  중공중앙은 형세를 잘못 예측했고 주객관 조건을 불구하고 일부 지역에서 무장봉기를 거행하도록 맹목적으로 요구했으며 당내의 ‘좌’경 정서가 점차 조장되였다. 하여 제6차 전국 당대표대회 소집이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사안으로 떠올랐다.



  모스크바 근교의 중공 제6차 대표대회 개최지(자료사진)

  1928년 6월 18일-7월 11일, 국내는 백색공포가 극히 엄중한 데서 제6차 당대표대회가 모스크바 근교의 5.1촌에서 개최되였다. 대회에는 모두 142명 대표가 출석했다.

  6차 당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지적했다. 당전 중국의 정치 형세는 두 혁명 고조 사이에 처해 있다. 당의 총로선은 군중을 쟁취하는 것이다. 당의 중심 사업은 백방으로 폭동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간고한 군중 사업을 하는 것이며 력량을 축적하는 것이다. 이는 당의 사업 방침의 한차례 중요한 전변이였다.

  6차 당대회 이후의 2년간 전 당은 당조직을 회복하고 재건했으며 군중 투쟁을 령도해 진행했다. 중국 혁명은 회복과 발전에로 나아가는 국면이 나타났다.

  6차 당대회에도 부족점이 있었다. 여전히 도시 사업을 중심 위치에 놓았고 중국 혁명의 장기성과 복잡성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중국 혁명에서 농촌근거지 건립이 특수하고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더욱 많은 혁명자들은 이런 기의들을 거치면서 농촌에로 가야만이, 특히 대혁명의 폭풍 영향을 받은 농촌에로 가야만이 혁명 발전의 광활한 천지가 있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각지의 기의에서 보존되여 내려온 혁명 무장들은 농촌에 심입해 유격 전쟁을 전개하면서 금후의 홍군과 농촌 혁명 근거지의 건립과 발전에 기초를 닦았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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