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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있는 천년의 흑토지 누가 깨웠나-10만 관병, 북대황과의 결전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1.03.18일 12:20



흑룡강성 할빈시에 위치한 북대황박물관에 '첫 번째 발자국'이란 제목의 판화 한 폭이 걸려있다. 판화를 보면 먹장구름이 낮게 드리운 날씨에 개황탐측대의 몇몇 전사들이 설비를 등에 지고 나무막대기를 짚으며 망망설원을 걸어나가고 있는데 그들의 뒤로는 수많은 발자국이 찍혀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전에 이곳은 춥고 황량한 곳이였다. 북대황의 개척사는 선구자들의 첫 번째 발자국으로부터 시작된다.



판화작품 '첫 번째 발자국'.

  힘차게 나아가자! 힘차게 나아가자! 거친 들판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자!

  신기한 흑토지를 개발하기 위해 10만 명에 달하는 제대퇴역 군인들이 북대황으로 달려가 인류 개황사의 장려한 편장을 써내려갔다.

  북대황의 파란만장한 거대한 변화는 그야말로 대단하다! 한 세대 또 한 세대 북대황인들은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가면서 개척 과정에 늘 진보하려고 애를 썼다.

  그제날의 오래된 거친 들판이 오늘에는 중국의 중요한 상품식량기지로 탈바꿈하였으며 북대황은 '농업분야 항모'를 구축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다.

  힘차게 나아가자! 오래된 거친 들판을 향한 선전포고

  올해 91세인 로당원 왕재방(王在邦)은 해방군전사로 1949년 개국대전 열병식에 참석한 바 있다. 이듬해, 그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작전에 참가했다. 1958년 4월, 왕재방은 안해와 함께 3박3일 기차를 타고 흑룡강의 변경도시 밀산에 도착해 북대황 개발에 뛰여들었다.

  왕재방과 상황이 비슷한 몇만명의 제대퇴역 관병들이 그 해 북대황 개발의 '집결호'를 울렸다. 10만 명의 관병들이 붉은기를 휘날리며 행낭을 등에 짊어진채 산림을 헤치고 소택지를 건너 북대황 복지에 도착했다.



  1954년 6월, 왕진(王震) 장군이 흑룡강 탕원현을 방문하여 공사중인 철도병전사를 위문한 적 있다. 관병들이 개황을 거쳐 얻은 식량, 채소를 보고 난 왕진은 대규모의 제대퇴역 관병을 흑룡강에 남겨 '농장을 건설하고 국가를 위해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왕진 장군은 당시의 철도병 부사장 여우청(余友清)을 찾아 얘기를 나누었다. 그 이튿날로 여우청은 작은 가방을 메고 경위원 한 명과 함께 현지 답사에 나섰다. 그들은 잡초가 우거지고 야생늑대가 출몰하며 소택지가 곳곳에 분포되여 있는 북대황 복지에서 풍찬로숙하며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1955년 1월, 철도병부대의 첫 농장인 850농장이 설립되였다.

  짧은 2년 사이, 철도병의 여러 사단의 제대퇴역 관병 1.7만명이 북상하여 선후로 852, 853, 854 등 12개 8자로 시작하는 농장을 설립했다.

  서남포위토벌, 항미원조에 참가했던 리승청(李胜清)은 1958년 850농장에 왔다. 현지에 발을 붙이지마자 그는 1959년 초 하남 고향에 있는 부모님, 처자, 형제 그리고 장인장모님을 모두 모셔왔다. 그들은 리승청과 함께 북대황 개발과 건설에 뛰여들었다. 오늘날 북대황에는 리승청 일가족 4대의 피땀이 스며있다. 현재 그의 두 아들과 두 딸 모두 농업생산 제1선에서 일하고 있다.



  850농장의 건설은 제대퇴역 관병들의 북대황 개발에 경험을 제공해주었고 수많은 관병들이 팀을 무어 거친 들판을 행해 진군했다. 1958년, 개발 고조를 맞이한 북대황에 10만명에 달하는 제대퇴역 관병이 몰려왔다.

  개발, 드넓은 흑토지에 식량 요구

  850농장의 첫 관리구 첫 작업소는 왕진 장군이 개황의 불씨를 짚힌 곳이다. 당시 이곳은 소택지로, 산짐승이 출몰하고 눈바람이 기승을 부렸을 뿐만 아니라 잡초 높이가 허리를 넘어섰다.

  북대황개발건설기념관에는 그 해 사용했던 밭갈이도구, 호미가 진렬되여 있다. 정군(丁军) 관장은 당시 농기구가 없어 제대퇴역 관병은 일본침략자들이 남긴 지하공사장에서 주어온 폭탄껍질, 고철 등으로 농기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1955년 5월, 꽁꽁 얼었던 대지가 녹으면서 관병들은 농장건설의 첫 봄을 맞이했다. 일부 지대가 낮은 곳에 살얼음이 아직 남아있었던터라 가축들은 그곳에서 발굽을 들어올리지 못해 걸음마다 휘청거렸다. 그떄 여우청은 사람이 쟁기를 끌자고 제안했다. 반백살이 거의 된 그가 진흙탕에 뛰어들어 앞장서서 쟁기를 끌며 개황에 힘을 실었다.



북대황개발건설기념관에서 정군관장이 그 해 사용했던 농기구를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2일 동안 일하고 난 후 여우청은 인력 50명을 동원해 쟁기 하나를 끈다는 것이 효률이 너무 낮다는 생각이 들어 농기구 개조와 쟁기끄는 방식 개진에 나섰다. 이렇게 하여 점차 20명, 후에는 12명이나 8명으로 인력을 감소했던 것이다. 개황 초기, 사람이 쟁기를 끄는 방식으로 천년간 잠자코 있던 흑토지를 다시 깨웠다.

  여우청의 인솔 하에 관병들은 첫 해 14.45만무에 달하는 황무지를 개간해 '그 해 개황, 그 해 생산, 그 해 수익'을 실현했다.

  그 당시의 생산장면을 회상하던 왕재방은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밭에서 하루세끼를 해결했고 밤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일했다. 자물쇠가 집을 지키고 굴뚝이 보초를 섰다."며 감개무량해했다.

  "그러나 여전히 후회는 없다. 오히려 북대황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그 당시의 세월을 얘기하는 로인의 얼굴에는 격정이 넘쳐흘렀다.

올해 105세인 곽덕복(郭德福) 로인은 1955년 10월 북대황에 왔으며 850농장의 생산대 대장으로 있었다. 그는 "그때 당시는 벼모가 자라서 며칠 안돼 잡초가 논두렁을 덮어버렸고 잡초가 벼모보다 더 높이 자랐다”면서 “벼모가 자라는 동안 전사들은 손으로 잡초를 뽑고 호미로 잡초를 제거하기를 몇번이고 거듭해야 했다."라고 말했다. 이는 총만 다뤄왔던 전사들에게 큰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였다.



1956년 5월 850농장에서 황진영(黄振荣) 부농장장을 남횡림자(南横林子)에 파견하여 852농장을 건설하게 하였다. 그는 대오를 이끌고 20만무에 이르는 황무지를 개간하였는데 그 농장은 그때 당시 규모가 가장 큰 철도병농장으로 되였다.

허허벌판에서 식량을 수확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황진영 씨의 아들 황려가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황진영 씨가 농장지휘부로 돌아와 회의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받고 령하 40여도의 혹한을 무릅쓰고 50여 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밤새 걸어와보니 발이 얼어서 발톱이 9개나 빠졌던 적이 있다.

"발을 씻을 때 어머니가 보니 아버지의 발은 피투성이가 되여있었으며 퉁퉁 부은데다가 낡은 천조각이 붙어 있었는데 떼여낼 수조차 없었다"라고 황려가 말했다.

현재 왕진(王震) 장군이 처음 황무지에 불을 지폈던 곳에 기념 조각상이 세워져있다. 왕홍빈(王洪斌) 850농장장은 "현재 이 곳은 전국 록색 고품질 고수확 벼재배시범지로 조성돼 1무당 수확고가 그때 당시의 100여근에서 1200여근으로 늘었다"라고 말했다.



2020년, 북대황농간(农垦)그룹유한회사의 곡식파종면적은 4330만무, 곡식조달량은 405억 5000만근으로 전국의 20%를 차지하며 북대황은 명실상부한 '중화의 대곡창(中华大粮仓)'이 되였다.

개혁, '농업령역 항공모함' 창조

북대황은 조국을 위해 곡식을 생산하였을 뿐만 아니라 '간고분투하고 대담하게 개척하며 대국을 고루 돌보고 사심없이 헌신하는' 북대황정신을 창조했다. 새 시대 북대황은 농업 공급측 구조적 개혁과 농업개간개혁 과정에서 선도적 본보기역할을 발휘하고 있다.

농사철이 다가오자 854농장의 대규모 재배가구 오진당(吴进堂) 씨는 농기계 점검에 나섰다. 1998년 3000여무의 경작지를 도급 맡았었는데 이제는 1만무로 늘어났다. 오진당 씨는 "1세대 북대황 인들이 피땀을 흘려 오늘날 ‘중화의 대곡창’을 위한 튼튼한 토대를 다져놓았다"며 "북대황정신을 이어받아 친환경 농업을 발전시켜 더욱 품질 좋은 록색 농산물을 재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2세대 북대황인 왕위(王伟)[1세대 왕재방(王在邦)의 아들]는 현재 850농장의 한 생물비료기업의 리사장이다. 그는 전 세대 북대황인의 고난분투하고 대담히 개척하는 진취정신으로 자신의 2차창업을 격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새 세대 북대황인들은 분발 노력하여 북대황의 농업현대화에 기여하고 있다.

대규모 제재가구인 '80후(80년대 태생)' 원지흔(袁志欣) 씨는 "현재 수확기에 북두항법시스템(北斗导航)을 장착하여 24시간 무중단작업을 실현하여 하루 낮과 밤 사이에 2000여무를 수확할 수 있다"라고 소개했다.



북대황그룹 목단강지사 류광윤(刘广润) 총경리는 "60여년간 힘겨운 창업을 거쳐 첫 군 개간 농장인 850농장을 건설하여서부터 현재까지 15개 농장을 건설하였으며 목단강지사의 경작지면적은 672만 5000무에 달한다"며 "길을 더듬어가며 앞으로 나아가든 개혁의 물결속에서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든 군대의 개간 정신은 시종일관 목단강지사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뿌리이자 영혼이다"라고 말했다.

북대황은 현대 농업에 발맞춰 '농업 분야 항공모함'을 만드는 한편 농간 개혁을 심화시키고 있다. 2015년말 중공중앙, 국무원은 '농간개혁발전을 진일보 추진할데 관한 의견'을 인쇄 발부함으로써 북대황은 발전방식전환의 새로운 계기를 맞아왔다.

지난해 말 흑룡강 농간개혁을 마무리지으면서 왕수총(王守聪) 북대황그룹 당위서기 겸 리사장은 "5년간 간고한 임무를 완수했다"며 "흑룡강 개간구 그룹화, 농장기업화 개혁 주체공사를 전면 완성하여 정경분리(政企分开), 사업단위와 기업 분리(事企分开), 주민사회와 기업분리(社企分开)목표를 실현했다"고 말했다.

체제개혁에 따른 리익이 빠르게 방출되고 있다. 2020년 북대황그룹은 전년보다 329.4% 늘어난 13억 1000만원의 리윤을 올렸다. “북대황” 브랜드가치가 천억원을 돌파하며 “글로벌 브랜드 500강”반렬에 올랐다.

북대황은 새로운 기점에서 새 출발을 하고자 한다.

유구한 력사를 가진 흑토지에 활력이 넘치고 있다.

/동북망 조선어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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