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농업박물관에는 높이가 99센치메터에 달하는 삼족청동원정(三足青铜圆鼎)인 고별전부정(告别田赋鼎)이 있다. 이 박물관의 대표적인 전시품인 고별전부정은 어느 대가의 작품이 아니라 하북성 령수현의 일반 농민인 왕삼니가 자발적으로 만든 것으로 중국농업농촌발전사에서의 일대사를 기록했다. 그것은 바로 2006년 1월 1일부터 농업세를 취소한 것이였다.
“나는 농민의 아들이고 조상들은 대를 이어가면서 농사를 짓고 세금을 납부했다. 농업세와 고별한 오늘날 나는 농민들을 대표해 정을 만들어 명문을 새긴다…” 정에 새겨진 소박한 명문은 당의 ‘3농’정책에 대한 억만 농민들의 옹호와 감사를 말해주고 있다.
농업세는 농촌에서 징수하고 농업을 원천으로 하며 농민이 직접적으로 부담하는 세금으로서 우리 나라에서 2,600여년 동안 지속되였다. 새 중국이 창건된 후 농업세는 상당한 시기내에 줄곧 국가재정수입의 중요한 원천이였는바 1949년부터 2005년까지 우리 나라의 농업세 총수입은 루계로 4,200억원에 달했다.
농업세를 제외하고 농민들은 또 ‘삼제오통(三提五统)’을 부담해야 했다. 20세기 80년대 중후반에 들어선 후 각종 분담 등 비용이 더해지면서 농민들의 부담문제가 점차 두드러졌고 중앙의 각별한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국면을 어떻게 돌려세워야 하는가? 수년간 지속된 농민부담경감 및 농촌조세료금 개혁이 가동되였다.
1990년부터 중앙은 련이어 여러부의 문건을 발부해 농민들의 각종 비용수취, 벌금과 분담 문제를 중점적으로 해결하기 시작했다.지엽적인 것을 다스려야 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것을 다스리는 것이 더욱 필요했다.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근본적인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 중앙은 사업중심을 제멋대로 비용을 수취하는 것을 다스려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로부터 농촌조세료금개혁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1998년에 국무원농촌조세료금개혁사업소조를 설립해 농촌조세료금개혁의 서막을 올렸다.
그후 농촌조세료금개혁시범사업을 전면적으로 전개해 전국적으로 농업세 세률을 낮추고 흑룡강, 길림 등 두 성에서 농업세전액면제시범을 전개하며 잎담배세를 제외한 농업특산물세를 취소하고 목축업세를 취소하는 등 농업세취소 목표를 명확히 제기했다. 2005년 12월 29일까지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19차 회의에서는 2006년 1월 1일부터 를 페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였던 세종이 종결을 고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순간 광범위한 농촌이 들끓었다. 마을 안팎에서 백성들이 정(鼎)을 만들고 비를 세워 이처럼 전례없는 큰 사건을 기록했고 어떤 사람들은 흥분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논에는 분주한 모습들이 더 많아졌고 적지 않은 외출하여 로무하던 농민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기층간부와 대중의 관계도 한층 더 밀접해졌다.
농업세 취소를 기점으로 우리 나라는 농촌종합개혁을 한층 더 추진해 농업에 대한 투입을 늘이고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농촌경영기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을 견지하여 재정의 농업지원 투입강도가 끊임없이 높아졌으며 일련의 강농혜농부동정책을 련이어 출범, 실시하여 ‘3농’의 발전잠재력을 한층 더 불러일으켰다.
/인민넷 조문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