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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재걸, 시련을 딛고 일어선 농민기업가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1.04.16일 11:04



  길림시에서 서쪽방향으로 60킬로메터 떨어진 영길현 차로하진 화평촌에 위치한 흠만종자농업전문합작사는 농민기업가 리재걸이 이끄는 향촌기업이다. 리재걸 회장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산간오지에서 현대농업, 록색농업, 관광농업을 아우르는 큰 기업을 육성하였으며 향촌진흥전략의 혁신적 실천과 지역 경제의 전환을 통해 고향을 살기좋은 새농촌마을로 변모시켰다.

  가난은 그에게 굳센 의지를 련마시켰다리재걸의 부모는 슬하에 아들 셋, 딸 다섯을 두었는데 일곱번째 자식인 리재걸은 장춘 이통현 제4구 반성묘촌에서 태여났다. 부모님은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힘겨워 열다섯살 된 큰딸을 남의 집 민며느리로 주었고 밥술을 하나라도 덜려고 두 딸을 일찍 시집보냈다.

  “큰형님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생활이 더욱 어려워지자 우리 집은 이통현 차로하진 화평촌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때는 1959년인데 그후부터 우리 가문은 화평촌에 뿌리를 내리게 되였습니다.”

  부모님과 아직 시집장가를 가지 않은 자식 넷, 그리고 큰형님 내외, 조카 4명까지 합해 도합 열두식솔이 한집에서 살았다. 그의 가문은 화평촌에서 대가족이였다. 하지만 부모님은 년세가 많아 일을 할 수 없었고 어린 자식들이 많아 생활이 아주 어려웠다. 다행히 국영백화상점 직원으로 있은 셋째 누님과 대형국영석유회사의 공회주석으로 있는 매형이 해마다 200원씩 보태주어 온가족은 생활난을 해결할 수 있었다.

  화평촌은 100여호가 사는 비교적 큰 촌으로서 마을에 조선족소학교도 있었다. 학생이 많을 때는 100여명이나 되였다. 리재걸은 화평촌조선족소학교와 쌍하진조선족중학교를 다녔으며 학창시절 반급 문체위원이였다. 달리기와 씨름을 잘한 그는 학교생활이 무척 재미났지만 가정형편때문에 초중을 졸업하고 부득불 학교를 그만두게 되였다.

  1968년 초중을 졸업하고 집에 돌아왔지만 나이가 어려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매일 빈둥빈둥 놀 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참군하고 싶어 입대신청을 하고 신체검사를 하니 평족이라 입대도 거절당했다. 1969년 말 그는 삼선건설 련의 통신원으로 들어갔다. 삼선건설은 부대와 다름없이 관리가 엄격했다. 2년간 통신원을 하면서 규률과 작풍을 련마한 덕분에 후일 창업에 큰 도움이 되였다고 한다. 다시 촌으로 돌아와 뜨락또르를 3년동안 몰았지만 가난한 살림은 여전했다. 그후 자동차 운전기술을 배워두었다. 그때 지인으로부터 모 단위는 공무용차가 필요하지만 돈이 없어 살 수 없어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였다. 리재걸은 장인으로부터 3000원을 꿔서 그 단위와 ‘거래’하였다. 즉 그 단위에 돈 3000원을 꿔주는 대신 그 단위 직원이 되는 것이였다. 오매에도 부러워하던 월급쟁이가 된 리재걸은 그 시기 사회경험을 많이 쌓고 세상물정을 알아가게 되였으며 좋은 인연도 많이 만들어 후날 기업운영의 인맥을 키웠다.

  확고한 신념과 불굴의 노력으로 향진기업을 일구다지난 세기 80년대 초 개혁개방의 봄바람은 편벽한 산골마을에도 불어왔으며 1981년 리재걸은 단위의 차를 도급맡고 운수업에 뛰여들었다. 그는 화평촌에서 첫사람으로 기와집을 짓고 먼저 부유해진 사람으로 되였다. 운수업의 발전전망을 미리 보아낸 그는 아예 운수트럭을 6대까지 늘여 운수업에 전력하였다. 수입도 예상한대로 엄청났다. 후에는 트럭을 15대 갖춘 운수회사를 사서 영업규모를 확대했으며 차로하진에서 동북삼성으로 나가는 운수업을 도맡았다. 그외 차로하 호문표 맥주 판매 운수를 전담했다.

  지난 세기 90년대 말부터 전국적으로 건축붐이 일어났으며 리재걸은 시장의 수요를 정확하게 판단한 후 지난 2009년 건축석재 생산 광산을 개발했으며 건축용 모래공장과 주유소도 꾸렸다. 2013년에는 세멘트 믹서 자동차를 20대 운영하고 세멘트믹서참을 경영하였으며 호텔도 지었다. 기업은 날로 방대해지고 그는 명실상부한 향진기업가가 되였다.

  



  현대농업, 록색농업, 관광농업을 발전시켜 신형의 농민기업가로 거듭나다차로하진에서 사업을 벌리고 매일 일에 바삐 보내다나니 고향마을인 화평촌의 소식을 거의 모르고 지내던 그를 몇몇 이웃들이 찾아왔다. 그들로부터 고향마을의 조선족들은 대다수가 로무수출 또는 연해지역진출로 고향을 떠났으며 토지도급경영에서 이런저런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리재걸은 그들과 공동으로 대책을 강구했으며 반복적인 연구끝에 화평촌 농민들의 토지를 집중하여 농사짓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하여 2년간의 시간을 들여 화평촌 조선족농민들의 토지를 몽땅 걷어들였다.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그는 처음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착수해야 하는지 몰랐다. 영길현농업국의 책임자는 국가보조금과 개인돈으로 농기계를 들여와 기계화농사를 지을 것을 권장했다. 첫 해에 뜨락또르도 사고 창고도 짓고 농사를 하게 되였다. 일년 농사를 한 후 이듬해는 130여헥타르 땅을 도급맡고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가을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바람에 벼를 말리울 장소가 없어 40만근이나 되는 벼가 창고에서 썩을 위험이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여러모로 고민하고 방법을 강구하던 그는 그 벼를 쌀로 가공해서 술을 빚기로 했다. 이렇게 술을 몇만근 빚었는데 지금도 술창고에 만여근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 술로 관광객과 손님도 접대했으며 이 조치로 큰 손실을 모면했다.

  리재걸은 국가의 향촌진흥발전속도에 맞추어 진취적으로 사고하고 부단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의 끈질긴 노력과 개척정신으로 토지를 접수한지 6년만에 여러모로 큰 일들을 해냈다.

  2016년 리재걸은 화평촌의 로인들중 살림집도 없고 농사도 못짓고 로후가 걱정인 로인들이 수십명 된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반복적인 토의를 거쳐 로인들이 토지를 담보로 양로시설에 들어가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리재걸은 많은 자금을 들여 6층짜리 건물을 짓고 고급 인테리어를 하고 양로센터를 세웠다. 현대 양로시설에는 60개의 표준화된 방이 마련되여 있으며 호텔이나 다름없는바 한 가족이 함께 살 수 있고 24시간 온수공급이 보장되여 있다. 건물 1층에는 100여명의 인원을 접대할 수 있는 식당이 있고 6층에는 200여명이 회의도 하고 활동도 할 수 있는 대형 홀과 여러가지 체육기재들이 마련되여 있다. 로인들은 현재 이 양로시설에서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다.

  일전에 거둬들인 130헥타르 되는 논을 다루기란 쉽지 않다. 기계화 현대농업수단을 도입하여 농약을 무인기로 뿌리며 록색농업기지로 만들었다. 그의 논에서 생산되는 도화향표 입쌀은 한 무에 1500근씩 생산되는데 우량 품질로 도화향 종자기지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리재걸 회장의 딸 리란은 길림대학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귀향하여 회사의 총경리 직을 맡고 있다. 리란은 어머니 박선화의 성씨를 따서 ‘박어머니’라는 입쌀 브랜드를 직접 설계하였다. ‘박어머니’표 입쌀은 시장에서 인기가 좋아 가공이 끝나기바쁘게 주문이 거덜나군 한다.

  



  리재걸 회장의 딸 리란은 길림대학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귀향하여 회사의 총경리 직을

  맡고 있으며 그가 설계한 ‘박어머니’브랜드 입쌀은 시장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리재걸 회장은 관광농업의 일환으로 72개 대형 비닐하우스를 세워 일년내내 관광객을 끌고 있다. 1월 중순이면 그의 농장에서 딸기를 자기가 직접 따서 구매할 수 있고 7-8월이 되면 여러가지 맛을 내는 복숭아를 직접 따서 사갈 수 있다. 만평방메터나 되는 도마도, 오이 등 채소재배 하우스는 찾아오는 손님들의 큰 환영을 받고 있다. 취미로 시작한 양식업도 놀랄만큼 장대해져 현재 닭, 거위가 3000여마리 규모라고 한다. 등겨와 량곡을 먹고 자란 토종닭과 거위는 고기맛이 일품이였다. 닭알과 거위알도 록색제품이여서 도시사람들에게 불티나게 팔린다.

  리재걸 회장은 사업에서 성공한 후 다년간 사회공익사업에도 발벗고 나서고 있다. 3개 촌을 위해 14.5킬로메터되는 포장도로를 닦았고 2017년 차로하에 홍수가 났을 때 100여만원에 달하는 재료를 지원하여 차로하 제방뚝을 보수하였으며 영길현공안국 정원, 차로하진정부 정원,영길현차량관리소 정원을 수건해주는 등 최근년간 그가 자선사업에 내놓은 자금은 600여만원에 달했다.

  리재걸은 늘 우로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자식들을 키우면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묵묵히 남편을 도와준 현숙한 안해에 대해 고마울 따름이라고 한다. 그가 새로운 사업구상을 내놓을 때마다 모험이 따라갔으며 주위사람들은 반신반의하였지만 안해만은 항상 남편을 믿고 밀어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리재걸이 성공한 농민기업가로 된 것은 안해의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고 말한다.

  고희에 들어선 리재걸 회장은 광산업과 세멘트믹서참 경영을 현재 아들 내외에게 맡기고 있다. “모든 일의 성패는 일하는 사람의 자세와 사고에 달렸으며 신용으로 판가름 난다.” 면서 늘 자녀들과 젊은 창업자들에게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일을 해나갈 것을 요구하는 등 리재걸 회장은 자신이 걸어온 경력으로 금방 창업에 뛰여든 젊은 세대들에게 창업경력을 가르쳐주고 이끌어주는 창업멘토로 이름높다. 그는 오늘도 농사가 천하지대본이라는 철같은 신념을 갖고 사회주의 새농촌건설에서 활기찬 모습으로 도전하고 있다.

  /▣(출처:《중국민족》조선문판 글/한직능 편집/리호남 조판/ 한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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