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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 창업 박련숙 씨, "창업에 나이가 있나요"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1.04.16일 13:53
  대경륭리회계사사무소 박련숙소장 60세에 창업해 선도기업으로 성장

  보통 키에 퍼그나 소박한 할머니, 겉보기엔 70대 중반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력이 넘치는 분이 바로 흑룡강성 대경시에서 대경륭리회계사사무소(大庆隆利会计师事务所) 를 운영하고 있는 박련숙(75세)소장이다.





  대경시심계사사무소, 대경시룡흠(龙鑫)회계사사무소, 대경신항(信恒)회계사사무소의 발기인, 업무총감이며 50년의 재무회계 심계 실천경험을 간직한 공인회계사(注册会计师)이며 대경시심계국 심계과장에서 퇴직한 그는 만 60세에 창업을 시작하여 올해까지 14년차이다.

  “황혼에 들어서 안일한 삶을 누릴 년세에 어떻게 창업을 시작하게 되였는가?”하는 기자의 질문에 “창업과 나이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창업은 60세에도 늦지 않다”며 차분하면서도 자신감과 용기에 벅차 이야기를 엮어가는 그의 긍정적인 에너지에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그는 자기의 삶을 순탄치 않은 삶, 분투해온 삶, 행복한 삶으로 일축했다.

  순탄치 않은 삶

  1946년 3월 길림성 룡정에서 태여난 박련숙은 6개월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신개척지인 흑룡강성 계동현 계림조선족향 계림촌에 이사왔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즐기고 승벽심이 강한 그는 19세에 공산당원에 가입했고 계림향당위부서기로 사업했다. 그러다가 1970년 북경석유대학을 졸업하고 대경에 배치받은 남편따라 대경에 와 자리잡고 회계사업을 하게 되였다.

  그가 앞날에 대한 화려한 꿈에 부풀어 있을때 ‘예측할수 없는 하늘의 풍운’이라 할까 느닷없이 불행이 덮치기 시작했다.

  결혼후 얼마 안되여 아버지가 49세에 병환으로 세상을 떴다. 어머니 혼자의 힘으로는 여섯 동생을 먹여살리기 어려웠다. 행렬로 맏이인 그는 30원도 안되는 월급에서 동생들의 뒤바라지를 돕는 중임을 떠메야 했다. 째지게 가난한 세월을 보냈다.

  ‘화불단행’(祸不单行)이라고 이런 와중에 청천벽력같은 불행이 또 덮쳤다. 17세난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충격앞에서 그는 뼈를 갉아내는 아픔을 참아가며 가까스로 일어나 40일만에 출근길에 올랐다.

  이렇게 지겨운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1993년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방광암진단을 받게 되였다. 가정의 중임을 떠멘 그는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나까지 쓰러지면 이 가정이 무너진다”는 굳은 신념 하나로 남편을 1년간 천진병원에 입원시키고 두번의 대수술을 거쳐 끝내 병마에서 구해냈다.

  그는 보통 녀성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의력으로 련이어 들이닥친 지독한 역경을 간신히 이겨내고야 말았다.

  분투해 온 삶

  금방 대경 진출시 그는 중국어가 아예 불통이였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한번은 담당과장과 업무상 일로 쟁론이 벌어졌는데 강건너 불보듯 번연한 도리를 중국말로 설명할수 없어 치유츠리(岂有此理)라는 말만 그냥 반복해 주위사람을 웃기기도 했다.

  처음 그가 소속된 대경시석유관리국 시추2회사에서는 그의 보관서류(档案)를 보고 간부로 채용하려 했지만 그녀는 언어불통때문에 기술직을 하겠다고 신청했다. 나중에 조직에서는 그가 당원인 점을 감안하여 돈관리(회계)를 맡겼다.

  중국어를 빼고 내가 무엇이 부족하냐? 강한 승벽심의 추동하에 그는 옹근 3년간 ‘벙어리’로 살며 난생 처음 접한 수판과 회계지식서적, 신화자전을 핸드백에 넣고 다니며 밤낮이 따로 없이 짬만 나면 배웠다.

  그는 독학으로 련이어 심양함수과학대학 공업회계와 재무관리전업과정(1982년), 흑룡강텔레비전대학 심계전업과정(1984년)을 마쳤다. 이같이 악착스레 배운 보람으로1983년 대경석유관리국 심계과 과장으로 발탁되였고 선후하여 회계사자격증시험(1984)과 심계사자격증시험(1987)에 무난히 통과되였으며 1996년 공인회계사자격증을 취득했다.

  배움에는 로소가 없고 끝이 없다. 지금도 그는 절대 배움에 게을리하지 않는다. 세무, 재무 등 업무관련 새로운 법률, 정책이 나오면 어김없이 공부한다. 그는 “재무 심계는 정책성이 아주 강하다. 국가의 재정 세무 법률정책 등을 거의 손금보듯해야 한다. 정책을 모르면 업무에 뒤지게 된다”고 리유를 밝혔다.

  1997년 개혁 시점단위의 새로운 정책 실시로 50세에 퇴직한 그는 수많은 공인회계사사무소에서 높은 급여를 주고 업무소장, 업무총감으로 초빙했지만 본직사업에 대한 애착으로 본 단위의 요청에 응해 2년간 재임용되였다. 그는 공산당원의 본색을 잊지 않고 적은 로임을 받으며 공회, 사무실주임, 기률검사, 회계 등 4명이 분공해 해야 할 일을 혼자 맡아 하면서도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이어서 그는 모 회계사사무에서 8년간 월급을 받으며 중견으로 활약했다. 이렇게 퇴직후에도 회계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퇴직 만 10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여 남편과 딸이 연회를 베풀어 축하해 주면서 이젠 집에서 편안하게 만년을 보낼 것을 간곡히 권고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수십년간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회사설립을 결심했다. 이를 위해 준비도 충분히 했다. 젊은이들이 읽는 ‘성공의 비결’, ‘양가죽말이의 이야기’(羊皮卷的故事) 등 책을 읽으며 자신을 편달했고 더우기는 건강이 따라주지 못할가봐 60세에 1개월간 수영을 배웠다.

  창업을 결정한 후 그는 2개월동안 혼자서 공상부문을 찾아가 영업허가를 내고 사무실을 임대하고 융자하는 등 일에 지쳐 체중이 5킬로그램이나 줄었지만 정신만은 충만되였다.

  드디여 2007년 9월 1일 대경륭리회계사사무소를 오픈,6명의 직원을 두었다.

  사무소는 첫달에 고작 2건의 업무를 접수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업무실력을 굳게 믿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소박하고 빈틈없는 할머니의 비범한 업무실력이 효력을 발생하여 서서히 기업들이 그의 사무소와 합작계약을 맺기 시작했다.

  현재 공인회계사 자격증 소지자 12명, 사법회계사 감정인 자격증 소지자 5명, 고급회계사 2명, 회계사 10명을 포함하여 공인회계사를 주체로 20명 직원(그 중 조선족 2명)을 두고 있는 사무소는 직함과 능력에 따른 급여제도를 도입하고 오찬보조, 통근비, 연장작업비, 전화비를 포함해 꼬박꼬박 년말 상금을 주어 직원들이 적극성을 발휘하도록 자극했으며 명절마다 복리를 주고 해마다 전직원 광광을 조직하여 임원진이 가족적인 분위기속에 안정적이고 탄탄했다.

  사무소는 성실과 신용을 령혼으로 삼고 사회각계를 위해 회계 심계분야의 전방위적인 서비스를 깔끔히 제공하는 한편 2009년 2월 26일 흑룡강성 사법청에서 발급한 ‘사법감정허가증’을 취득했고 2012년에는 흑룡강성과학기술청, 재정청으로부터 첨단기술기업 인정 및 전문항목 자금 신청조건 부합여부를 심계하는 사무소로 인정받았으며 2019년 5월 13일에는 흑룡강성고급인민법원의 ‘전성 법원 기업파산사건 관리인 명록’에 입선되여 륭리회계사사무소는 동류업계 지역 명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대경에 있는 30개 회계사사무소 중 륭리회계사사무소는 사법감정보고서 작성 자격을 갖춘 4개 사무소 중 하나이다.







  륭리회계사사무소는 각류 경제감정보고서(经济鉴定报告), 기업 심계보고서, 공정재무결산 심계보고서, 기업 사업단위 책임자 리임 심계, 실적 평가 심계, 첨단기술기업 인증 및 재심사 심계보고, 사법기관 감정보고, 상장회사 보도, 법률, 행정법규에서 규정한 기타 심계업무 등 많은 분야에로 업무범위를 확장했다. 대중형 기업의 수많은 경제분규사건 심계, 수백부의 사법기관 감정보고서를 포함해 각종 심계보고서, 자산점검보고서(验资报告) 3000여부를 손수 그의 손을 거쳐 제출했다. 사무소는 현재 흑룡강성은 물론 전국 많은 지역의 재무회계 심계업무를 맡아하고 있다. 날로 치렬해지는 경젱속에서 그는 부단히 사무소의 업무업그레이드를 시도해 고객의 수요에 만족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난해에는 전국적인 공개입찰에 성공하여 신강위글자치구 카스시의 요청으로 국가 자금투자관련 심계건을 협의했으나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인원류동이 막혀 무산되고 말았다.

  2008년 사무소가 상승세를 탈 무렵 그가 대학생 공인회계사를 육성하는 과정에 또 거대한 시장잠재력을 포착하고 정부의 우대정책에 힘입어 대경시 서비스외주산업단지(服务外包)내에 대경륭리람해양성학교(大庆隆利蓝海培训学校)를 설립, 재무회계, 심계, 컴퓨터, 소프트웨어개발 등 전문인재를 육성하는 학교로 부상, 현재까지 200여명의 학생을 육성했다.

  행복한 삶

  1979-1987년까지 대경시 제2-3기 인대대표이고 일찍 여러번 대경시 심계국 재무선진인물로 당선된 그는 문천 대지진 구조물자(현금과 물품) 지원, 대경시조선족로년협회 활동경비 지원, 명절 위문 등 기업인으로서 사회적인 책임감당에 앞장서고 있다.

  하루 10시간씩 일에 몰두하는 그는 “매일같이 직원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겁기만 하고 애들과 같이 공부하고 머리를 써서 좋다. 할수 있을 때까지 일하고 싶다”고 말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직원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한편 그는 “일에만 몰두하다나니 어머니로서 자식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부족한것 같다”며 미안함과 아쉬움을 토로했다.

  현재 그는 한가지 고민이 있다. 바로 사무소를 이어받을 적임자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그가 70세를 넘기자 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사무소를 넘길것을 건의했지만 “내가 손수 일떠세우고 키워온 사무소를 아무에게나 넘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가족이나 우리민족의 젊고 유능한 인재가 나서기를 고대하며 적극 물색하고 있다.

  /남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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