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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토의 선줄군-밀산현(밀산시) 전임 현장 박순봉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1.05.12일 15:34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으로 조선족은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지도하에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을 거치며 초기 중국공산당원들인 한락연, 양림, 리홍광, 리복림, 마덕산, 배치운, 서광해 등을 필두로 수많은 렬사들이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주덕해, 조남기, 리민, 문정일, 리영태, 김인섭, 최채 등 우수한 당원간부들을 배출했으며 현시기에도 습근평 새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의 지도하에 수많은 조선족 당원간부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며 기여를 하고 있다. 본지는 창당 100주년을 맞이하여 초심을 잃지않고 사명을 명기하자는 취지에서 조선족당원간부들의 선진사적을 조명하는 기획보도 '당을 따라 달려온 영광의 세월'을 펴낸다. 이번 기획보도를 위해 밀산시에서 배출한 우수한 조선족당원간부들의 사적을 집필하여 보내준 밀산시 맹고군 전 부시장, 밀산시조선족문화관 피금련 당지부서기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리면서 독자여러분의 지지와 성원을 기대한다.

  -편집자



밀산현 전임 현장 박순봉

  1999년 10월 11일 11시, 박순봉동지는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친인들의 그리움과 인민들의 축복을 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애착하던 사업터를 떠났다. 그렇게 그는 생의 마감을 한평생 분투해 오던 밀산에 남기고 유감없이 떠났다.

  그는 순박한 농민의 아들이였다. 했기에 그의 몸에는 흑토가 준 소박함과 견강함이 듬뿍 배여있었다.

  그는 평범한 인민의 공복이였다. 했기에 불타는 마음으로 자신의 사업터에서 충실히 맡은바 직책을 리행했었다.

  그는 퇴직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만년의 행복을 누릴수 있었다. 하지만 식을줄 모르는 당성원칙과 사업격정 으로 암병에 시달리는 불편한 몸이였지만 시종 백성들의 고락과 마음을 같이 했다.

  그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업에 충직했으며 실제행동 으로 당기를 빛냈다.

  (1)

  1930년 11월 11일, 박순봉은 조선 함경남도 북청군 하차서면 월근태리 수점촌에서 태여났다. 1938년 4월부터 1944년 4월까지 월근태리국민소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일제식민 통치시기 조선 각지의 학교들에서는 노화교육을 실시하면서 조선민족문자를 페지하고 조선어로 말하는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박순봉은 어린 나이에도 학교에서 제정한 식민색채가 짙은 규제에 속박받지 않았으며 민족언어를 고집하다가 여러번 처벌을 받았다. 1944년 4월, 박춘봉은 아버지 박충진을 따라 밀산현 3소통 중원촌으로 이사했다. 14살 나는 박순봉은 한창 공부할 나이였지만 본촌에 학교가 없었고 또 외지에 가서 공부하자니 경제형편이 허락치 않아 부득불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하게 되였다. 1945년 8월 9일, 쏘련홍군원동제2륙군1부가 중쏘변경을 넘어서 밀사변경지역에 둥지를 틀고 있던 일본군에 진공을 발동하였다. 쏘련군 세프첸코(舍甫琴科)대위 75기관총영의 두개 련과 마스닝(马什宁) 소장 제1630반땅크섬멸포병퇀의 두개 련이 8월 12일에 밀산현성(지금의 지일진)으로 들어왔다. 박순봉도 아버지를 따 라 현성으로 들어가 쏘련홍군을 환영하는 대오에 가담했으며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해방의 희열을 맛보았다.

  1946년 8월, 중원촌은 한걸음 앞서 토지개혁의 시점촌으로 되였다. 토지공작대가 마을에 들어온 후, 농회를 건립하고 토지정책을 선전하였으며 군중을 발동하여 지주를 투쟁하고 땅을 나누면서 대생산고조를 일으켰다. 16살 나는 박순봉은 농회회원으로 되여 농회에세 조직하는 각종 활동에 참가하였다. 농회에서 조직하는 야학교에 다니면서 그는 문화를 배웠을뿐만 아니라 “토지는 경작하는 사람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도리를 알게 되였다. 토지개혁을 거쳐 박순봉일가도 땅을 분여받았으며 처음으로 해방받고 주인으로 된 행복을 느꼈다.

  1948년초, 중국인민해방군은 제4차 사평전역을 준비하고 있었다. 촌에서는 담가대를 조직하여 전선을 지원하라는 현의 통지를 받았다. 박순봉은 장기환자인 아버지와 딸린 식구들이 많아 어려움이 많았지만 아버지에게 담가대에 참가할 의향을 털어 놓았다. 낡은 사회의 쓰라린 맛을 볼대로 본 아버지는 “해방군이 전선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는것은 전적으로 우리들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전선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도리가 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간단한 몇마디 말씀은 박순봉의 가슴을 찔렀다. 아버지를 위안하는 말 몇마디를 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2월중순 빙설이 뒤덮인 북방의 대지는 여전히 한기가 뼈속을 에이였다. 박순봉과 담가대원들은 화물차를 타고 할빈에 도착했다. 계속하여 안달, 치치할빈, 백성자 방향으로 기차는 달렸다. 화물차는 난방설비도 없었고 생활보장도 말이 아니여 마실 물도 모자랐고 하루에 한끼를 먹을 때도 있었다. 대원들은 서로 의지하면서 기나긴 로정을 견뎌냈다. 리질에 걸린 사람, 배앓이를 하는 사람, 차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중도에서 대오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담가대는 제일 마지막에 쌍료정가툰(双辽郑家屯)역에 내려 100여리를 행군하여 로가툰숙영지에 도착했다. 숙영지 주위는 폭격맞은 벽들로 스산하고도 처참했다. 숙영지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사평전쟁구역에 접근했음을 알게 되였고 바로 여기에서 제4차 사평전역의 부상병들을 호송하는 일을 맡게 되였다. 3월 8일, 담가대는 명령을 받들고 3강구로 향했다. 행진도중에 두대의 국민당군대의 비행기가 날아오 면서 수십개의 폭탄을 투하했다. 9일, 담가대가 사평교구에 이르렀을 때,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부대가 그곳 주위에 매복하여 결전전의 준비사업을 하는것을 목격했다.

  제4차 사평전역은 1948년 3월 11일에 시작되였다. 인민해방군은 전 3차례 전역의 경험을 총화한 기초상에서 14만명의 절대적 우세병력을 집중하여 사평성내에 있는 1만4천명 국민당 수비군에 대해 맹렬한 진공을 발동했다. 전반 전역에서 인민해방군은 24시간도 안되여 사평시를 해방하고 국민당 수비군을 전멸하였다. 담가대원 들은 부상병의 상처를 처치한 다음 신속하게 몇십리밖에 있는 안전지대거나 수군(随军)병원에 보내였다. 부상병을 몇차례 호송하고 나니 박순봉의 발바닥에는 물집이 생겼고 다리가 퉁퉁 부어났다. 하지만 그는 한발작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견지 하였다. 국민당수비군들이 무기를 바친 다음 박순봉과 담가대원 들은 또 다시 페허속에서 10여명의 부상병들을 구해냈다. 사평전투 경축표창대회에서 박순봉은 인민해방군수장과 담가대 대장의 표창을 받았다.

  1948년 5월, 박순봉은 중원촌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파종이 끝난 후, 밀산련합중학교시험에 참가해 록취되였다. 12월에 학교에서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

  1949년 1월에 박순봉은 련중에서 반년 남짓이 공부하다가 가정곤난으로 부득불 학업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학업을 그만두게 된것은 박순봉으로 말하면 큰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그 년대에 온 마을에 중학교를 다닌 학생은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그래도 동년배들에 비하면 행운으로 여겨졌다.

  (2)

  1949년 봄, 삼소통구위에서는 토지개혁가운데서 농민들이 분배받은 수레, 말, 가대기의 수량이 부동하고 로력이 단일하며 농기구가 배합되지 않아 춘경생산에 적응하기 어려운 실제정황 에 근거하여 중원촌에서 자원호리의 원칙에 따라 품바꿈하고 농기구를 배비하여 생산을 구급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구위공 작조의 령도하에서 박순봉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고생을 무릅쓰고 세심한 협조사업을 하면서 농민들의 생산과 생활가운데서 부닥친 곤난과 문제를 제때에 해결해 주어 구위와 촌민들의 신임을 얻었다. 1949년 5월에 박순봉, 주득송, 주기석, 최광식 네 사람은 조전진, 동계상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따라서 중원촌당지부를 건립하고 주득송을 당지부 서기로, 박순봉을 조직위원으로 임명하였다.

  1950년, 촌에서는 자원호혜, 상호합작의 원칙에 따라 돈을 모아 공소합작사를 꾸리고 박순봉을 영업원 겸 회계로 추천 하였다. 박순봉은 상급의 계획을 집행하고 농업생산자료와 생활용품을 사원들에게 공급하며 사원들을 조직하여 다종경영을 발전시키고 농부산품을 수구하며 농촌시장을 부추키는 등 방면에서 많은 사업을 하여 광대한 농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상급부문에서는 박순봉의 사업정신을 긍정해 준 동시, 그의 사업을 빈번히 조동시키면서 중임을 맏기였다. 1951년 1월, 박순봉은 중원촌공소합작사를 떠나 지일구서가 공소합작사에 가서 회계직을 맡았다. 1952년 9월에는 지일충실 공소합작사에 가서 회계직을 맡았다. 1953년 12월, 밀산 공건소비합작사의 회계로 전근되였다. 새로운 사업터를 옮길 때마다 박순봉은 자기를 잊고 사업하는 열정과 숙련된 업무능력 으로 단위의 면모를 개변시켰으며 새로운 성적을 따내군 하였다.

  1955년 1월부터 1959년 9월까지 박순봉은 선후하여 밀산현공소련사 주임, 밀산현 화평향 부향장, 밀산현 홍기공사 당위부서기, 밀산현 화평공사 부사장으로 임명되였다. 1959년 10월에는 밀산현정책연구실 비서로 임명되였다.

  1961년 6월 20일, 박순봉은 밀산현계획위원회 부주임으로 임명되였다. 계획위원회사업은 업무성이 비교적 강했다. 박순봉 은 꾸준한 학습으로 업무를 숙실히 익혔다. 그는 전반 국면을 돌보는 립장에서 언제나 대사를 의론하는것을 잊지 않았으며 정력을 집중하여 큰 일을 틀어쥐였고 사업의 중점을 경제형세의 새로운 특점, 새로운 변화를 분석하는데 두었다.

  계획위원회는 정부의 종합성적인 경제부문으로서 당위와 정부의 경제사업의 참모부였다. 박순봉은 계획위원회 간부들이 훌륭한 참모로 되자면 조사연구사업을 잘하는것을 첫자리에 놓아야 하며 조사연구가운데서 장악한 정황과 문제에 대하여 연구분석과 귀납정리를 참답게 하여 정확하고 심각한 인식과 견해가 있는 참모의견을 제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항목건설은 계획위원회의 계통적인 중요한 사업이였다. 박순봉은 당과 인민에 대한 고도의 책임감에서 출발하여 항목에 대한 연구론증과 방안선택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립항 대목을 착실하게 틀어쥐고 초기사업을 앞당기는데 주의했으며 항목저축과 항목참고건설을 잘하여 엄격하게 순서에 따라 항목 을 심사비준하였다.

  (3)

  1964년 여름의 홍수는 목릉강이남의 몇개 마을을 물에 잠기 게 하였다. 재해가 가장 심한 곳은 3소통 중원촌이였다. 마을의 모든 집들이 홍수에 무너졌고 옥수수, 수수 등 화본식물도 전부 물에 잠겨 전부 썩어버렸다. 현에서 파견한 재해구조 공작조 장으로서의 박순봉은 홍수가 지난 뒤 마을과 황페해진 전야, 심중한 재난속에서 허덕이는 리재민들을 보면서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 졌다. 박순봉은 일찍 중원촌에서 생활한적 있었기에 중원촌의 정황에 대하여 비교적 료해가 깊었다. 그는 농가에 심입하여 농가의 의견과 생각을 귀담아 듣고 광범위한 교류를 거쳐 더욱 명석한 사로를 찾아낸 후, 전촌이 집단이사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이사문제를 제출하자 많은 촌민들이 접수하지 않았다. 특히 황무지를 개간하고 마을을 세운 개척자들은 어떻게 설복해도 이사가려 하지 않았다. 이런 정황하에서 박순봉과 공작조일군들은 반복적 으로 온 마을이 이사해야 하는 도리를 촌민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여러차례의 간거한 토론을 거쳐 끝내 온 마을이 이사하는 방안 이 통과되였다. 공작조는 즉시 이사호에 충족한 량식, 이불, 옷 등 생활용품들을 나누어 주었다. 친척, 친구를 따라 이사한 촌민을 제외하고 공작조에서 통일적으로 지정된 촌에 배치하 였다.

  몇년이 지난후 박순봉은 중원촌 리재민들이 살고있는 촌을 방문했다. 배치받은 촌민들은 모구 빈곤에서 벗어났고 안심하고 생산에 열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년의 공작조와 박순봉의 사 업작풍과 촌민들에 대한 높은 책임감에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1968년은 계급투쟁의 광풍이 몰아치던 년대였다. 박순봉은 시대의 풍운을 정시하면서 단위의 정상적인 행사에 참여하는것 을 제외한 외 기타 시간은 자신의 업무연구에 몰두했다. 정치 풍운의 변화는 예측키 어려웠다.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련루 되거나 꼬깔모자를 쓰게 되였다. 그는 심사숙고를 거쳐 대담하 게 밀산에 시멘트공장을 세울 건의를 제출했다. 당시 전현에서 수요하는 시멘트는 모두 외지에서 들여왔다. 이렇게 들여온 시멘트는 성본이 높았고 시공이 한창인 계절에는 공급이 딸려 많은 공정들의 시공에 영향을 주게 되였다. 밀산경내에는 우질 석회광석이 풍부히 매장되여 있었다. 그것은 시멘트공장을 건설 할수 있는 우월한 조건이였다. 여러차례의 토론을 거쳐 시멘트 공장 건설항목이 통과되였으며 박순봉이 밀산 시멘트공장건설지 휘부의 총지휘로 임명되였다. 새로 건설되는 시멘트공장은 지방 건설 항목임으로 건설자금은 지방재정에 의거해야 하였다. 그리고 건설에 수요되는 많은 물자들은 계획외로 사들여야 했기에 무형중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증가시키게 되였다. 더욱히 계획경제가 심한 년대에 물자가 극히 결핍한 정황하에서 돈이 있어도 수요되는 물자와 설비들을 사기 힘든 정황이였다. 박순봉은 설계도를 얻어다가 한편으로 시공하고 한편으로 설계도를 조정하였다. 분쇄기, 고저압조합스위치, 큰마력전동기는 모두 긴장상품들이여서 유관부문의 분배지표가 있어야 살수 있는 물자들이였다. 120키로와트짜리 전동기는 상해전기기계공장 에서만 생산했는데 분배지표가 있어도 반년이 되여야 물건을 찾아올수 있었다. 박순봉은 허다한 곤난들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는 곤난을 정시하면서 세차례나 북경과 상해를 갔다 왔으며 목단강, 할빈, 심양도 얼마나 다녀왔는지 헤아릴수 없었 다. 마침내 물자공급을 담보했으며 공정진도를 떠밀었기에 시멘트공장은 계획에 따라 년말에 준공되고 생산에 들어갔다.

  1969년 4월, 박순봉은 목릉현분투저수지 밀산병퇀 퇀장으로 임명되였다. 목릉현분투저수지는 당년에 성중점공정이였다. 목릉강을 따라 위치한 목릉, 계서, 계동, 밀산이 함께 저수지수건 임무를 담당하였다. 박순봉은 임무를 접수한 후, 1700여명의 민공과 공정기술일군들을 거느리고 제시간에 분투저수지공지에 도착했다. 박순봉은 농가에서 사무만 보고 공지에서 가장 가까운 초막에서 민공들과 함께 먹고 잤다. 그는 매일 아침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고 저녁이면 민공들이 든 초막집을 검사하고 이튿날 임무를 포치하였다. 그가 든 초막집은 매일 저녁 제일 늦게 등불이 꺼졌다. 밀산병퇀의 주요임무는 저수지땜의 기초를 파고 흙을 운반하여 땜을 쌓는것 이다. 땜기초부분의 흙은 모두 민공들이 메여날랐다. 땜기초를 팔수록 깊어져 공지에다 10여미터 높이의 운반통로를 만들었다. 민공들은 흙을 메고 경사진 통로로 오르내려야 했다. 하루 일을 마치면 모두가 기진맥진 해 했다. 때로는 야간작업도 련속 진행 했다. 박순봉은 공지에서 안전 우환거리로 될수 있는 문제점 들을 제때에 발견하고 통로를 더 튼튼하게 다지며 안전인원을 배치하여 사전에 예방하였다. 하여 여러차례의 안전사고를 피면하게 되였다.

  폭파약을 채울 구멍을 뚫고 산돌을 캐는것은 체력소모가 많고 위험성이 큰 일이였다. 농촌에서 온 대부분 민공들은 폭파 일을 해본 사람이 없었다. 박순봉은 분투저수지지휘부에서 기술인원을 청하여 현장에서 지도하게 했다. 폭파반의 민공들은 재빨리 안전하고 믿음성 있는 폭파기술을 배워냈다. 실천가운 데서 그들은 또 “련발포”라는 새로운 폭파기술을 창조하여 효률 을 대대적으로 제고시켰다.

  10월에 접어들면서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박순봉은 한차례 로동 대경색을 조직하였다. 전체 민공을 세개 반으로 편성하고 24시 간을 련속작전해 반달간의 대회전 끝에 끝내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성하였다.

  1970년 9월 20일, 박순봉은 밀산현수리전력과 과장으로 승급하였다.

  밀산은 저산구릉평원구에 속한다. 토질이 비옥하고 수리자원이 비교적 풍부하기에 여러가지 농작물의 생장에 적합했다. 하지만 농작물의 총산량은 2억근 좌우에서 배회했다. 특히 벼생산은 해마다 못해지고 있었다. 1968년 전현의 벼재배 면적은 121330무에 달했고 벼산량은 5537,9만 근이였다. 1969년 전현의 벼재배면적은 143549무였고 벼산량은 3618,9만근이였다. 1969년 전현 벼재배면적은 1968년에 비해 18,2% 증가했는데 벼 총생산량은 34% 감소 되였다. 그 주요원인은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하고 농업생산 도구가 락후하며 수리건설에 대한 투자가 해마다 감소되고 수리공정이 낡고 배합되지 않아 유효관개 면적이 해마다 감소된데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해 박순봉은 현위에 “조치를 취하고 투자를 늘여 농전수리기본건설을 잘 해야 한다”는 보고를 써올렸다. 현위에서는 박순봉의 보고에 대하여 매우 큰 중시를 돌렸으며 전문회보를 청취하고 “현위에서 농전수리기본건설을 강화할 약간의 문제에 관한 결정”을 작성하여 전현의 유관부문에 하달 하고 집행하게 하였다.

  1970년 겨울, 전현적으로 대대적인 농전수리기본건설 열조를 불러 일으켰다. 1971년 가을, 현위에서는 충분하게 론증한 기초상에서 부밀호배수개조공정을 밀산농전기본건설의 으뜸가는 임무로 삼았다. 부밀관개구는 밀산현성 서쪽, 목릉강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서쪽은 계동현 동해향으로부터 동쪽은 화평관개구까지, 북쪽은 림밀철로로부터 남쪽은 영안, 흑태, 행복제방에 이르렀다. 관개구의 길이는 44.7키로미터이고 너비는 7.7키로미터였으며 관개면적은 51.7만무에 달했다. 박순봉은 부밀배수공정의 총지휘였다. 그는 지휘부 일군들을 거느리고 계획설계로부터 시공대오조직, 공정물자구입, 자금락실 등 방면에 대해 과학적으로 규획하고 락실했다. 전반 부밀관개구 개조에서 홍수막이돌 2갈래, 배수돌 15갈래를 팠는데 총길이는 162키로미터였다. 이 공정에 117.57만 로동일이 투입되였고 181.76만 립방미터의 토방량을 완성하였으며 국가에서 81.18만원을 투자하였다. 구조물 수건, 배수갑문 7곳, 잠관 12곳, 다리 31개를 수건하는데 콩크리트 1900여립밥미터를 썼다. 수리건설을 거쳐 부밀관구 동부의 관개와 배수를 체계화했으며 홍수를 방지하고 장마를 제거하는데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

  청년저수지는 목릉강중하류 왼쪽 지류인 비덕강상류에 위치 하여 있고 밀산현성에서 약 13키로미터 떨어져 있다. 청년저수지는 홍수방지와 관개를 위주로 하고 양어와 발전(发电)을 결합한 하나의 종합성적인 대형수리중추공정이였다. 저수지의 설계용량은 1.84억립방미터이고 관개면적은 37.5만무이며 그중 수전이 12.4만무 있었다. 발전소의 3대의 발전기용량은 720키로와트이고 발전량은 211만도에 달했다. 양어수면은 5만무이고 양어못은 675무에 달했다. 청년저수지는 1958년 5월 4일에 농업개간총국의 제대군인과 변방 지원청년들이 건설을 시작해 1958년에 마무리 했고 1960년에 공정을 정지했다. 완성한 토석방은 60만립방미터로 설계 공정량의 44%좌우를 차지했다. 청년저수지공정을 다시 가동하여 그 효익을 발휘할수 없겠는가 하는 문제는 박순봉이 수리부문으로 전근된 후 고려한 첫번째 문제였다. 박순봉은 이 항목을 가지고 성수리청에 가서 협상하였다. 성수리청에서 여러 부서들을 찾아 보았으나 어느 부서에서도 긍정적인 답안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청년저수지를 계속 건설하는 항목에 대하여서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후 얼마 안되여 박순봉은 현의 주요령도와 함께 성수리청의 령도를 다시 찾아갔다. 두번 째로 만나게 되니 일부 부서 령도들의 태도도 누그러지고 대화 하기도 편했다. 성수리청의 령도는 밀산청년저수지에 대해 조사연구를 해 보겠다고 대답까지 했다. 잇달아 성수리청에서는 전문가소조를 밀산에 파견하여 청년저수지를 계속 건설하는 건설공정의 가능성문제에 대해 조사연구하고 론증했다. 반복적인 론증을 거쳐 청년저수지 계속건설 항목은 돌파성적인 진전을 가져왔으며 국가수리부의 심사와 국가계획위원회의 비준을 얻게 되였다.

  1973년 6월 11일은 박순봉으로 말하면 영원히 잊을수 없는 날이였다. 청년저수지건설공지에는 붉은기가 휘날리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공정총지휘 동원령이 천지를 울리자 현장에 있던 여러가지 시공기계들이 일제히 기적을 울리였으며 몇천명의 민공과 공정기술인원들이 일제히 시공을 시작했다. 박순봉의 마음은 전례없이 격동되였다. 몇세대 수리인들이 실현하지 못했던 꿈을 자기의 손으로 실현하게 되였기때문이 였다.

  청년저수지 연장공정의 설계총공정량은 132.12만립방미터이며 준공 후 완성 공정량은 110.32만립방미터였다. 국가 투자는 1861.9414만원이였고 지방에서 자체로 투자한 금액은 441.1488 만원이였다. 청년저수지 건설은 비덕강류역을 개발, 다스리고 물자원을 충분히 리용하며 비덕강하류의 홍수방지능력을 높이고 농업관개면적을 늘이게 하였다. 동시에 밀산의 관광 산업을 이끌어 밀산경제를 더욱 훌륭하고 더욱 빠르게 발전 하도록 조건을 창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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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4월, 박순봉은 흑태공사 당위서기 겸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흑태는 밀산에서 농업인구가 가장 많은 공사로서 밀산현성에서 서쪽으로 30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방호공로와 하미(哈密)철로가 경내를 관통 했기에 교통과 물류가 비교적 편리했다. 하지만 비옥한 땅과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 이곳은 오랜 시간을 내려오면서 가난이 떠날줄 몰랐다. 다년래 흑태공사의 일인당수입, 량식산량과 재정수입은 전현 21개 공사가운데서 꼴찌축에 갔다. 뿐만 아니라 대량의 형사안건과 민사안건이 발생하고 헤아릴수 없는 토지분규가 생기며 삼림을 마음대로 채벌하고 훔치며 경상적으로 정부를 찾아 고발하고 시비를 거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 오래동안 흑태는 현위의 “두통꺼리”로 되였다.

  박순봉이 취임해 흑태공사에 도착한 첫날, 공사대문에 첫발을 디디게 바쁘게 한무리의 민원인들이 그를 가로 막았다. 새로 부임된 당위서기의 “풍채”를 보려는것 이였다. 박순봉이 사무실 에 들어서기도 전에 비서가 급전보를 가져왔다.

  성위에서 내려보낸 민원사건이였다. 몇년전 흑태공사 산하에 있는 광신촌과 직정촌에서 수전관개용수문제로 모순이 발생하 였는데 당시 공사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조해하고 모순을 해결했는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에 많은 우환을 남겨두었다. 이듬해 봄 두 마을에서는 수원쟁탈로 또 싸움이 벌어져 많은 부상자가 생겼다. 사건발생 후, 부상자 친척들은 버스로 사람들을 싣고 현정부와 성정부에 가서 집단신고를 하여 영향이 나빴다.

  박순봉은 당위회의를 소집하고 해결방법을 찾았다. 박순봉이 사악한 바람과 과감하게 맞서는 사업작풍은 흑태 공사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한차례 겨룸끝에 회의에서는 사단을 일으킨자는 사법기관에 넘겨 처리하게 하고 상해자는 적당하게 구조를 해주며 막후지휘자는 직무해임 처분을 주는 결정을 내렸다.

  사건은 금방 해결되였다. 오래동안 끌어오던 문제를 박순봉은 3일만에 해결해 버렸다. 흑태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박순봉은 어떻게 류사한 일의 재발을 방지할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고려했다. 박순봉은 당위의 전체 성원들을 거느리고 두개 촌의 밭지경에 가서 두촌의 촌간부들과 함께 용수로를 넓히는 문제를 연구하였다. 토론을 거쳐 용수로 확장에 수요되는 자금을 촌에서 일부분을 내고 공사에서 일부분을 지원하며 현수리부문에 가서 일부분을 쟁취하고 공정을 파종전에 완성하기로 결정했다. 공정이 제때에 완공되고 봄물이 두 촌의 논밭으로 흘러들 때, 두촌의 엉켰던 원한은 철저히 풀리였다.

  두촌의 신방사건이 금방 해결을 보았는데 유수촌과 광신촌의 토지분규사건이 또 일어났다.

  60년대 광신촌에서는 공사의 비준을 거쳐 유수촌동쪽에 있는 약 60여헥타르의 초원을 개간하여 여러해를 경작하였다. 두 마을은 종래로 토지소유권문제에서 분규가 생기지 않았었다. 70년대초에 이르러 공사에서는 상급의 유관규정에 따라 인원을 조직하여 마을건설규획과 토지소유권 귀속에 대하여 계선을 확정했다. 계선확정을 거쳐 광신촌의 60헥타르의 원경지는 유수촌 행정구역에 속하게 되였다. 유수촌에서는 광신촌의 원경지에 대하여 소유권귀속에 대한 요구를 제출하게 되였고 잇달아 분쟁이 생기고 충돌이 발생했다. 유수촌에서는 여러차례 농민을 조직하여 길을 끊어놓고 물을 막으면서 광신촌 농민들이 원경지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광신촌에서도 촌민들을 조직하여 전간에 나가 자기의 권익을 수호하였다. 두촌의 촌민들은 여러차례 맞섰으며 집단류혈사건도 일어날번 했다.

  파종계절이 돌아오자 유수촌농민들은 공사에 찾아와 박순봉에게 화풀이를 했다. 공사당위회의에서 박순봉은 기치가 선명하게 력사를 존중하고 현상을 유지하며 정책을 선전하고 모순을 화해할 방안을 제출했다. 농업을 책임진 부서기가 공작조를 거느리고 유수촌에 내려가 촌민대표들과 담화를 나누면서 농촌토지정책을 선전하고 토지획분에 관한 원칙문제를 선전하였다. 몇차례의 담화를 거쳐 촌민들은 공사의 조해의견을 접수하였으며 사태는 가라앉았다.

  박순봉은 주동적으로 촌에 내려가 적치되여 있는 사건들을 처리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몇개 마을을 방문한 박순봉은 토지분쟁은 각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비교적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것을 발견하였다. 박순봉은 전문소조를 조직하여 전 공사의 매개 촌의 토지분쟁 문제에 대해 한차례 대조사를 진행하고 장악한 정황을 제때에 정리, 분석했다. 그런후 전 공사간부대회를 소집하여 토지정책을 선전하고 전형적인 토지분쟁에 대해 분석을 진행하였으며 토지분쟁 소송안건에 대한 처리 결과를 공포하여 공사당위의 태도와 결심을 명확히 표시하였다.

  회의가 끝난후 공사간부들은 마을마다 나누어 책임지고 촌간부들을 도와 적치되였던 사건들을 해결하고 처리하였다. 반년도 안되는 사이 95%이상의 소송사건들을 기층에서 처리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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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6월, 박순봉은 밀산현위상무위원, 현혁명위원회 부주임으로 승급하였으며 농업을 주관하였다.

  밀산은 농업현으로서 농촌사업가운데서 많은 문제들이 존재했다. 도시와 향진의 발전이 조화되지 못했고 농민들의 생활이 빈곤했으며 농업이 발달하지 못했고 농촌이 락후했다. 이런 문제들은 농민들의 창업능력이 미약하고 수입이 낮으며 농업산업 순환능력이 낮고 효익이 차하며 농촌사회사업과 기초시설이 락후하여 발전을 제약하고 농민들의 량식문제를 철저히 해결하지 못한데서 표현되였다.

  농업생산을 놓고 볼 때 1975년 전현 농작물재배면적은 130만무였고 총생산량은 3.34억근이였다. 1976년 전현의 농작물재배면적은 130.4만무였고 총생산량은 2.7억근으로 1975년에 비해 23.7% 감산하였다. 몇년간 전현의 재배업은 원래의 기초에서 배회하면서 새로운 발전이 없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생기게 된데는 력사적원인도 있었고 현실적 원인도 있었으며 인식상 차이도 있었고 사업가운데서의 부족점도 있었다.

  박순봉은 기층에 심입하여 조사연구를 진행하는 가운데서 이런 문제들은 자체의 특수성과 복잡성을 갖고 있으므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자면 장기성과 간거성이 수요된다는것을 감안하게 되였다.

  박순봉은 사업목표와 주공방향을 확정한 후 과학기술로 농업을 발전시키는 전략에 따라 기술조치를 결합시키면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디였다. 첫째로 과학적규률에 따라 재배구조를 조정하고 작물재배비례를 합리화 했다. 둘째로 농전기본건설을 크게 벌려 저습지를 다스리고 척박한 땅을 개조했다. 셋째로 높은 산량을 돌파하는것을 중점적으로 틀어 쥐였다. 전통적인 생산경험과 선진적인 과학기술을 결합하여 종합적으로 운영하고 규모적으로 밀고 나갔다. 즉 우량종응용 면적을 확대하여 우량종 응용률이 90%이상에 도달하게 해야 하며 선진적인 시비기술을 보급하고 질소와 린비료를 합리하게 배비했다. 규범화 재배면적을 확대하고 벼는 모를 하고 콩은 정량점파하고 옥수수는 몽땅 발아파종을 했다.

  1980년 박순봉의 노력으로 전현에서는 처음으로 화평, 흥개, 비덕 3개 공사의 부분적 논밭에 비행기로 살초제를 뿌렸다. 살초제를 뿌린 면적은 약 5만무에 달하고 살초효과는 95%이상에 달했다. 넷째로 농업기순훈련반을 꾸려 각종 류형의 농업기술인원과 농민골간을 양성하고 농업과학기술 보급을 크게 추진하여 농민들이 과학적으로 농사짓는 수평을 제고했다. 1980년 전현의 농작물재배면적은 132.8만무에 달했고 총생산량은 4.46억근으로 제고되여 1976년보다 60.9% 증산했다. 례하면 벼재배에서 한육모희식재배기술의 응용보급으로 한차례 의 농업기술혁명이 일어났다. 한육모희식재배기술이 보급된후 벼산량에는 한차례 비약이 나타났다. 벼 무당산량이 1976년에 291근이던것이 1980년에 535근으로 되여 53.9%이상 증산되였다. 4년에 해마다 한보씩 크게 내디딘 셈이였다.

  1980년 중공중앙에서 “농업생산책임제를 진일보로 가강하고 완선화할데 대한 몇가지 문제에 관하여”란 통지가 하달된 후, 전현적으로 농호별생산량도급책임제를 위주로 한 여러 가지 생산책임제를 실시하였다. 그해 10월에 박순봉은 공작대를 거느리고 비덕공사 덕흥조선족촌에 내려가 과학기술로 빈곤을 부추키는 사업을 틀어쥠과 동시에 농업생산책임제 시점사업을 진행했다. 1981년에 부동한 촌의 실제정황에 근거하여 생산 책임제를 생산소조에 도급주었거나 혹은 호에 도급주는 시험 을 진행했다. 그 기초상에서1982년에 전면적으로 놀호별생산량 도급책임제를 락실했다. 주요방법은 촌의 원 집체생산자료(토 지를 제외)였던 기계, 농구, 성축, 집체건물 등 고정재산을 값을 정해 팔거나 인구에 따라 분배하는 방식으로 농호에 나눠주었다. 토지는 일부를 남겨 기동지로 사용했고 나머지는 등급을 나누 어 인구에 따라 호에 도급주었다. 토지도급기한은 5년으로 정했다. 기한이 차면 다시 도급주었다. 촌의 묵은 빚은 토지도급면적에 따라 호에 나누어 주고 해마다 갚게 했다. 이 방법은 전현 특히는 조선족촌의 개혁에 대해 훌륭한 시범작용과 추동작용을 놀았다.

  비덕공사 덕흥촌은 120여호가 살고있는 조선족 마을이 였는데 전촌의 집체 빚은 36만원에 달했다. 거기에다 온 마을에 우물이 두개밖에 없었는데 수질이 나빠서 촌민들은 집체이주를 하려 했다. 박순봉은 이 마을에 내려온 후, 민심을 안정시키고 자금을 구해 촌민들을 도와 상수도를 건설해 주었다. 동시에 촌민들을 조직하여 생산책임제를 락실하고 과학적으로 농사를 짓게 하여 촌민들의 생산적극성을 불러 일으켰다. 덕흥촌에서 생산책임제를 실시하여 3년되던 해 량식총생산량은 100만근 으로부터 300만근으로 제고되였고 전촌의 총수입은 26.2만원 으로부터 83.7만원으로 증가되였으며 인구당 평균수입은 535.8원으로부터 1618.9원으로 증가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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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8월, 박순봉은 밀산현정부 현장으로 부임되였다. 현정부의 주요령도로서 사업이 분망한 중에서도 그는 학습을 자신의 필수과로 간주하고 법률법규, 현대과학기술과 관리 그리고 직책을 리행함에 관계되는 지식에 대한 학습을 강화하였다.

  사업가운데서 박순봉은 발전의 관점으로 전현 경제와 사회 각항 사업의 발전을 계획하고 향진, 마을, 기업과 부문에 심입하여 조사연구하고 의견을 청취하여 발전방향을 정리했으며 천방백계로 재원을 창조하여 밀산현의 경제실력을 튼튼히 하는것을 사업의 중점 중 중점으로 삼았다.

  1981년 9월, 박순봉은 론증을 거쳐 지일제지공장에 권연차간을 건립했다. 일년간의 시운전을 한 다음 권연생산차간을 밀산진으로 옭겨와 밀산담배공장을 건립했다. 공장부지면적은 2.6만평방미터이고 공장건축면적은 4105평방미터였다. 공장건설초기에 관동패 담배를 생산했고 이어 백룡, 봉밀산, 흥개호, 찔광이, 완달산, 동북, 쾌락, 밀산패 등 10여종의 담배를 생산했다.

  할빈에서 궐련기술자를 청하여 필패가치 담배를 시험제조했다. “밀연”(蜜烟)이 시장에 나온후 전 성내에서 잘 팔렸으며 현우질제품으로 평선되였다. 1982년에 여러가지 담배를 5023상자를 생산하였으며 총생산치는 308.2만원 이였다. 1983년에는 9010상자를 생산했고 551.7만원의 생산총액을 완성하으며 일약 밀산재정의 기둥기업으로 되였다.

  1982년 4월, 밀산맥주공장이 건설되여 생산에 투입되였다. 당해에 맥주를 2700톤 생산하였고 1983년에는 룡천패 맥주와 북시패 맥주 4760톤을 생산해 냈다. 성내의 같은 업봉, 같은 규모의 기업가운데서 맥주톤당리윤, 년리윤, 경제효익의 3개 1등을 실현했다. 1984년 기술개조를 거쳐 생산능률을 대력 제고하였는데 5950톤의 맥주를 생산해 냈다. 이는 1983년에 비하여 27.4%로 증산한 셈이였다. 따라서 87.5만원의 리윤을 얻었고 67.6만원의 세금을 국가에 바쳤다. 산품은 성내외 20여 개 시현에 널리 판매되였으며 맥주공장은 일약 현급 1급기업 으로 평선되였다.

  1982년 4월, 밀산우유제품공장이 건립되였다. 공장 부지 면적은 6500평방미터였고 각종 설비가 33대 있었다. 년간 분유 생산량은 200톤이였고 총 생산액은 100만원에 달했다.

  1983년에 방사공장을 개조하여 마면실, 면실, 순면마실 등을 생산하였다. 순마면실의 년간산량은 369톤으로 총 생산액은 1051만원이였다. 판매수입은 728.4만원이였으며 판매리윤은 75만원, 세금만 27.3만원을 바쳤다. 밀산방사공장에서 생산한 면마죽실은 일본, 미국, 한국, 싱가포르 등 나라에 널리 팔렸다. 기업은 “영업대호”와 “외화창조선진기업” 칭호를 수여받았다.

  1983년 몇년간 생산을 중지했던 포도주공장을 개조하여 생산을 회복하였다. 80여종의 과일술을 생산해 냈는데 년간 생산량은 3500톤에 달했고 25개 성시에 판매되였으며 그중 4가지 산품은 성우질산품으로 평선되였다. 년간총생산치는 896.2만원이였고 76만원의 리윤을 완성했으며 96.2만원의 세금을 국가에 바쳤다

  1983년 전, 밀산현 경내에는 크고 작은 석탄갱이 120여개가 있었는데 모두 규모가 매우 작아 년생산량이 10 여 만톤에 그치지 않았다. 박순봉현장은 전현의 석탄자원을 통합시키고 탄갱을 경영하는 기업들에 대해 정돈을 실시했다.

  주산탄광은 국영탄광으로서 설계 능력은 년간 생산액이 15만톤이였다. 하지만 오래동안 경영이 혼란하여 탄광은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정돈을 시작한 후,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고 자금을 확대투자하였으며 갱내기술개조를 진행하고 생산규모를 확대하여 마침내 현급재정의 리윤, 세금대왕으로 되였다. 주산탄광의 로동자들은 “이렇게 훌륭한 탄광을 갖고 있으면서 생활에 쪼들려야 했으니. 이번 정돈으로 탄광은 하루 밤새에 철저한 변화를 가져왔는바 이는 박현장과 같은 능력있는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칭찬들을 아끼지 않았다.

  몇년간의 노력으로 재원건설은 크게 강화되였다. 1983년에 이르러 전현의 재정수입은 2165만원으로 1980년에 비해 57.7% 증장되였다.

  정상적인 교육경비를 담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박순봉은 정부사업을 주관한 후 수입을 늘이고 지출을 줄이면서 각 부문의 경제지출은 줄였지만 교육경비만은 증가했다. 교육경비는 재정지출에서 35%이상을 차지했다. 제도층면으로부터 교육사업의 건강한 발전을 담보하기 위하여 박순봉은 여러차례 정부상무회의를 열고 단기적인것과 장기적인 교육발전계획과 우혜정책을 토론, 결정하였다. 례하면 “밀산현에서 교원을 존중하고 교육을 중시하며 교육을 잘 꾸릴데 관한 약간의 규정”, “밀산현 농촌 학교 자금모집 방안”등이다. 학교반학조건개선을 가속화하기 위 하여 그는 경상적으로 향진중학교, 촌의 소학교에 내려가 그들 을 도와 자금모집에서의 곤난을 해결해 주었다.

  “사람이 바르면 시키지 않아도 따르고 사람이 바르지 않으면 시켜도 따르지 않는다”. 박순봉은 령도간부로서 언제나 자기에 대해 엄격히 요구하였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히 요구하였다.

  1968년 박순봉의 아들이 고중을 졸업하였다. 해당정책 규정 에 따르면 독신자녀는 부모의 곁에 남을수 있었다. 아들의 출로문제에서 박순봉은 정부의 호소에 따라 농촌에 내려가 단련하라고 요구하였다. 아들은 처음에 달통되지 않았고 안해도 아들을 대신하여 불평을 토로했다. 하지만 박순봉의 설복에 아들은 이불짐을 메고 농촌으로 내려갔다. 아들 박성건은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20여명 지식청년들가운데서 가장 우수했다. 개인조건으로 말하면 박성건은 조건이 남보다 우월 했지만 로동자모집, 승학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른 청년들에게 양보하군 했다. 몇년사이 20여명의 지식청년들은 모두 도시로 돌아오게 되였다. 박성건은 자신의 노력으로 제일 마지막 지식청년으로 부모의 곁에 돌아왔다.

  “박순봉은 우리의 훌륭한 반장이며 훌륭한 본보기이다”, “박순봉의 령도밑에서 사업하면 사로가 밝아지고 목표가 명확해 지며 심정이 유쾌하고 해 볼 멋이 있다”고 지도부 성원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한때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도, 착오를 범했던 사람들도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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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3월, 박순봉은 현장직무에서 내려놓고 정부고문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사업터는 바뀌였지만 사업임무는 조금도 가벼워 지지 않았다. 그는 현의 정황에 근거하여 전국성, 종합성, 장원성의 중대한 문제에 대해 전문항목으로 연구하고 전략적 계획을 모색하여 현위와 현정부의 거시적 결정에 과학적 근거와 실시가능성 방안을 제공해 주었다.

  당시 건조담배생산은 경제효익이 좋아 많은 지방에서 건조 담배생산을 농촌경제발전을 실현하는 우선 산업으로 여겼다. 1984년, 밀산의 건조담배생산은 새로운 품종을 유치하여 품종개량을 하고 건조담배재배가 확대되여 정부에서는 건조담배 발전을 부추키는 단계에 처했다. 건조담배생산을 안정적으로 밀고 나가기 위해 박순봉은 정부고문단을 조직하여 전현 건조담배 생산 기본정황과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 한차례 전면적인 조사 연구를 진행했다.

  존재하는 문제들에 대해 6가지 건의를 제출했다. 첫째, 담배재배 전업호를 대량 발전시켜 건조담배생산을 한급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린다. 둘째, 전간관리를 강화하고 과학 기술 지지도를 높여야 한다. 셋째, 지방에 따라 기계화 생산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농기구, 새로운 품종을 적극적으로 보급하여 기계화장비와 기계화수준을 제고시킨다. 넷째, 조치를 대여 기술인원배치를 최적화해야 한다. 매개 수매소에는 한명의 담배 건조 능수, 담배질 평가능수, 담배재배 능수가 배치되여 있어야 한다. 다섯째, 담배건조실 배치가 합리해야 하며 주동권을 장악해야 한다. 여섯째, 자연재해구조기제를 건립하여 담배농사군들의 재해손실을 경감시켜야 한다. 이런 건의는 후에 전현 건조담배생산발전에 훌륭한 지도성적 작용을 하였다.

  민족간부로서 박순봉은 늘 민족교육사업의 발전을 념두에 두고 관심했다. 1985년, 박순봉은 전문인원을 조직하여 민족교육 현황과 발전방향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하였으며 현위와 현정부 에 “직업교육을 크게 발전시킬 문제에 대하여”라는 전문 보고를 올렸다. 보고에는 우리 현 경제사회발전의 수요로부터 출발하여 직업교육을 발전시킬 중요성과 긴박성에 대한 인식을 천명하면 서 직업교육을 중요한 위치에 놓고 전일제교육과 고루 돌보며 조화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보고에서는 또 민족직업고중을 건립할데 대한 건의도 제출했는데 금방 비준, 통과 되였고 락착되였다. 1985년 10월, 부지면적이 6300평방미터이고 교사건축면적이 2600평방미터인 조선족직업고중이 시공을 시작 해 1988년 5월에 준공되였다. 학교가 건립된 후, 인재의 우세를 빌어 농학, 축목, 원예, 농전, 자동차 수리, 채광, 방사, 유아사범 등 전업을 설치하였고 재봉, 채소재배, 농약사용과 사용기술 보급, 민영교원훈련반 등 단기훈련반을 꾸려 각종 류형의 중등전문인재 도합 450여명을 배양해 냈다. 졸업생들은 전성 각지에 분포되였으며 진정한 실력으로 사회의 보편적인 환영을 받았다. 학교를 꾸리는 과정에서 경비부족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박순봉은 개인의 인맥을 통해 목단강농업과학기술연구원에서 선진적인 화학제초제생산기술 항목을 학교에 유치해주었다. 학교에서는 목단강농업과학기술연구원 김철의 지도하에서 고효률살초제를 생산하고 시장에 내보내 좋은 경제효익을 얻었다.

  1987년 8월, 박순봉은 비장암으로 북경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해 그는 57세 였다.

  1987년 11월, 박순봉은 밀산현 정치협상회 제5기위원회 주석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정치협상회의의 주요한 직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큰 일은 의론하고 중점을 틀어쥐며 실제효익을 추구하는 정신에 립각하여 현위의 중대한 결책과 인민대중이 관심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협상, 민주감독을 진행하고 주동적으로 참정, 의정하였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3년간, 그는 정협기관사업인원과 정협위원들을 거느리고 기층에 심입 하여 조사연구를 진행한 후, 선후하여 “우리현 공업기업발전에 관한 사색과 초보적 탐구”, “사상을 해방하고 정책을 풀어 개체 경제의 사회적작용을 충분히 발휘시켜야 한다”, “우리시 농촌촌 급재무관리정황에 관한 조사”, “거시조절을 강화하고 잠재요소를 발굴하여 효익을 증가하고 국영합작상업의 주도적 역할을 진일 보로 발휘시켜야 한다”, “우리시 빈곤부축사업정황에 관한 조사” 등 수십편의 조사보고를 써올렸다. 이런 조사연구 보고는 현위와 현정부에 과학적 결책을 내리는데 중요한 참고의거를 제공해 주었고 진일보로 사상을 해방하고 전통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며 전현 경제사회발전을 촉진시키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일으켰다.

  1988년 9월, 사회상에서 기업을 도급주는 문제를 두고 여론이 많았다. 박순봉은 친히 세개 조사조를 거느리고 전현의 공업교통, 재정무역의 부분 국영 기업가운데서 이미 도급준 제지공장, 우유제품공장, 수리공장, 백화상점, 사탕술공사, 짠지공장과 아직 도급주지 않은 시멘트 공장, 술공장, 생산자료공사 등 9개 공상기업에 대하여 깊이있는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를 거쳐 박순봉은 “우리 현의 부분 공상기업의 도급정황에 대한 조사”, “우리 현의 개체경제와 사영경제에 대한 조사” 등 두편의 조사보고를 써냈다. 현위에서는 두편의 조사보고에 대하여 매우 큰 중시를 돌렸으며 다섯게 부문 지도부의 지도자들과 경제부문의 주요령도자들이 참가한 협상대화회의를 소집하였다. 조사보고는 기업내부의 분배방면에 존재하는 문제를 명확하게 제출했을뿐만 아니라 금후 기업도급제에 대한 의견과 건의도 제출하였는바 시대를 앞서 가는 원견성이 있는 보고였다. 협상회의에서 많은 문제들에 대해 현장은 정협에서 제출한 의견과 건의를 채납하고 직접 당장에서 과단성 있는 결정을 내리였다

  정협의 정보와 련계의 광범한 우세를 리용하여 현경제 발전을 위해 봉사하게 하기 위해 박순봉은 외계와의 횡적련계에 중 시를 돌리였다. 1988년 7월, 북경시정협에서 삼소통향 (三梭通乡)에 건축재료공장과 양계장을 건설해 주겠다는 정보를 밀산에 제공해 주었다. 산서성 정협의 협조하에 밀산진정부에서는 태원에 얼음과자공장을 련합건립하였는데 생산에 투입된 후 좋은 경제효익을 가져왔다.

  밀산의 문사자료사업은 줄곧 박약한 환절이였다. 박순봉은 정협에서 사업하면서 문사사업을 매우 중시했으며 단독으로 문사자료실을 세우고 전문인원을 안치하여 문사자료 사업을 틀어쥐게 하였다. 적극적으로 구급하고 “진짜를 남기고 사실을 남기는” 원칙에 따라 문사자료 사무실에서는 적극적으로 문사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편찬했다. 밀산의 문사자료는 없던데로부터 있게 되였다. 3년간의 짧은 시간을 리용하여 문화교육방면의 12만자에 달하는 29편의 사료를 편집해 냈다. 1990년에 “밀산문사자료제1집(교육문화전집)”이 출판되였다. “밀산문사자료제1집”은 위만시기와 전국초기의 밀산의 문화 교육면모를 비교적 완벽하게 반영하였다. 자료의 출판발행은 우리에게 진귀한 문사자료를 남겨주었을뿐만 아니라 밀산의 문화교육사업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놀았다.

  1988년 9월, 박순봉은 전국민족단결진보선진개인의 영예를 지니고 북경인민대회당에서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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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11월, 박순봉은 정협주석직에서 퇴직하였다. 비록 사업터를 떠났지만 사업터에서 다 하지 못했던 일들을 계속해 나갔다.

  통계에 의하면 1993년말까지 전시에는14개 특별빈곤촌이 있었는데 그중 조선족촌이 9개 있었다. 1000여만원의 빚더미는 특별빈곤촌의 발전을 꽁꽁 얽매여 놓았다. 어떻게 무거운 빚더미를 청산해 버리겠는가 하는 문제는 간고하고도 세심한 사업이 수요되였으며 더욱히는 상규를 벗어난 조치와 방법이 수요되였다.

  금방 북경에서 암수술을 하고 귀가한 박순봉은 병에 진친 몸으로 9개 조선족특별빈곤촌들을 돌아 다니면서 향촌간부들과 함께 빚이 형성된 력사적원인을 참답게 분석하고 빚더미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반복적인 토론과 협상을 거쳐 촌에 있는 부분적 기동지와 황산, 황무지를 채권단위에 세를 주기로 하였으며 세금을 받아서 빚을 갚도록 했다. 동시에 정부에 건의하여 23가지 우혜정책을 제정하고 특별빈곤촌에 대한 각항 투자를 확대하였으며 수리비, 농업세 및 여러가지 행정성 수금을 감면해 주었다.

  몇년간의 노력을 거쳐 1995년에 전시 9개 조선족특별빈곤촌은 모두 빈곤촌모자를 벗어버렸으며 일인당수 입은 전시 농민일인당 평균수입의 20%를 초과했다. 빈곤촌으로 이름있었던 련주산향 해방촌은 일찍 촌의 빚이 150여만원에 달했다. 협상을 거쳐 해방촌에서는 600여무의 원경지를 신용사에 세 주고 신용사의 묵은 빚을 처리해 버렸다. 정부의 우혜정책의 혜택으로 매년 촌에서는20여만원의 각종 비용을 감면 받았다. 유관부문에서는 매년마다 촌에 20여만원을 투자하여 척박한 땅과 수리시설을 개조하게 하였으며 촌민들을 도와 로무수출을 조직해 주었다. 빈곤부축을 책임진 단위에서는 상수도를 건설해 주었다. 1995년에 해방촌 농민들의 일인당 수입은 9000여원에 달해 전시 농촌일인당 수입을 56% 초과했다.

  경제체제개혁의 심입과 더불어 정부에서는 교육경비의 사용과 관리에서 총제관리(包干制)를 실시하였다. 이는 교육 주관부문의 교육경비 관리와 사용에서의 자주권을 확대하였지만 다른 한 방면으로 교육경비총량이 부족하여 민족교육경비를 다른데 옮겨 쓰거나 제때에 하달되지 않거나 근본상에서 주지 않는 등 문제들이 발생되게 하였다. 박순봉은 존재하는 문제를 부분 인대대표들과 연구하고 제안으로 인대회의에 교부했다. 인대회의에서는 하나의 결의를 형성하고 제도층면으로부터 소수 민족교육경비의 관리와 사용을 담보하였다.

  1999년 국경절, 박순봉은 암병이 재발하여 병석에 눕게 되였다. 병상에서 그는 “이제 나는 편안하게 누워 휴식할수 있게 되였다. 당의 간부로서 본직사업을 잘해야 할뿐만 아니라 민족사업도 잘해야 한다. 나는 매우 부끄럽지만 그래도 마음은 안온하고 기쁘다. 9개 조선족 특별빈곤촌이 모두 가난에서 벗어났고 조선족중학교 건물도 이미 완공되였으며 교원들도 새로운 아빠트에 들어가게 되였다”고 감개무량해 했다.

  마음은 언제나 백성들의 고락과 함께 이어져 있었다. 박순봉은 가장 소박한 집념과 고수로 한뙈기의 정신적 옥토를 가꿔 갔으며 충실하게 대중을 위해 중임을 떠메고 나갔다.

  "허리 굽혀 유자의 소가 되련다. " 박순봉은 당의 사업에 대한 열애와 충성으로 한폭의 기발을 진붉게 물들였으며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것을 고스란히 바쳤다.

  /맹고군 저 피금련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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