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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골에 깃든 피어린 항일이야기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1.08.12일 09:15
  ㅡ개산툰지구 “항일구국회” 시말

  2021년 7월 17일, 룡정시 인사국 원 정두길 국장(오른쪽분)과 세무분국 원 최국장(중간분),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 로인협회 김광운회장(왼쪽분)과 더불어 항일의 유서깊은 옛터 자동촌 채수골 항일련군밀영을 찾았다

  1942년 봄 어느날 화룡현 개산툰 회경소학교의 6학년 학생 주두범이 한반 친구인 마룡철을 학교뒤산으로 데리고갔다.

  "룡철아, 일본놈들이 청년들을 마구 잡아다가 전쟁판에 내모는구나. 전쟁판에 끌려나가기만 하면 끝장이다."

  "글쎄 말이다. 천벌을 받을 놈들이 아무짓이나 다 하는구나."

  "전쟁판에 끌려나가 죽기보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는게 몇곱절 낫지. 나는 조직에 들어 왜놈들과 싸우기로 맹세했다. 너도 들지 않겠니?"

  "무슨 조직이야?"

  "그런 조직이 있단다."

  주두범은 마룡철이 귀에 입을 대고 소곤소곤 말해주었다.

  마룡철은 주두범의 말을 듣고 조직에 대해 다소 알게 되였으나 그것이 개산툰지구에 뿌리박힌 지하혁명조직―"항일구국회"라는것만은 몰랐다.

  1942년 봄에 박덕산이 인솔한 항일련군소부대 16명이 연길현 천보산에 이르렀다. 림춘추, 강위룡 등 항일련군전사들이 참가한 이 소분대는 쏘련 원동경내로 이동한 동북항일련군 야영부대 (1942년 8월부터 항일련군 교도려로 됨)와 중공동북당위원회의 지시를 받고 야영지를 떠나 천보산에 이르렀다. 소부대는 천보산에서 화전소조, 천보산소조, 개산툰소조로 나뉘여 활동하기로 하였다.

  강위룡이 개산툰지구 소부대책임을 맡았다. 그의 임무는 개산툰지구에 항일구국회기층조직을 내오고 회원을 받아들이며 인민들속에서 정치사업을 하고 정치, 군사, 경제 등 여러 면의 정보를 수집하는것이였다.

  강위룡은 소부대 대원 2명과 함께 자동채수골까지 동행하였다가 홀로 그곳에 남았다. 그때 연두봉 아래 채수골 치기엔 강위만, 임룡운, 권영호 등 세집이 살고있었다. 채수골 알미대마을이라고 일컿는다. 이곳에 자리잡은후 강위룡은 자동에 있는 항일렬사 권영섭의 아들 권세진을 통해 자동사람 김동길과 손을 잡았다.

  김동길이 다시 조양천의 남창수와 손을 잡고 남창수가 또 회경의 김광해와 손을 잡았다. 이들은 모두 한때 화룡현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에서 유격대와 청년의용군에서 싸운 전우들이였다. "항일구국회"의 이름을 띤 자동, 후동, 삼동포, 조양천 등지를 망라한 개산툰지구 지하혁명조직은 이렇게 세상에 나타났다.

  그날 주두범은 김동길의 지시를 받고 마룡철소년을 찾았다. 김동길은 그해 자동의 주두범학생을 조직에 받아들이고 그에게 조직을 확대할 임무를 주었었다.

  그후 마룡철소년은 주두범과 같이 채수골에 가서 강위룡을 만났고 한 학교 학생인 한금룡을 지하활동에 참가시켰다. 마룡철은 조양천지구 정탐임무를 맡았는데 때론 연길과 훈춘쪽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42년 여름 마룡철은 주두범한테서 그날 저녁으로 강위룡과 함께 쏘련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마룡철은 언제나 믿고 따르던 개산툰 회경(해방후 회경 1대)의 셋째아주머니 김영숙(나의 장모님, 1922년 음력12월 17일ㅡ1994년 음력 7월 27일) 에게 비밀을 터놓고 쪽지를 남기였다. 김영숙은 보리쌀을 주머니에 정성껏 넣어주고 시동생을 멀리 바래주면서 멀어져 가는 시동생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도했다. 집에서는 그가 애로소년대훈련에 가는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집결처인 자동에서 초저녁까지 기다려도 강위룡은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후에 알고보니 강위룡은 조직의 지시를 받고 먼저 떠났었다. 1943년 봄에 강위룡은 또 채수골농막에 나타났으며 개산툰지구 "항일구국회"를 지도하였다. 채수골 농막을 자동사람들은 “강위룡막”이라고 친절히 부른다.

  1943년부터 일본침략자들은 동북 각지 조선족청년들을 강제징병에 내몰았다. 개산툰지구의 1기징병생들은 개산툰경찰서에 설치된 훈련소에서 강제훈련을 받았다. 1944년 여름 2기 징병생 50∼60명이 개산툰소학교마당에서 욕지거리와 몽둥이찜질이 따르는 강제훈련을 받았다. 청년기에 들어서는 마룡철도 끌리워왔다.

  훈련생들은 하루에 2시간씩 일본어를 배웠다. 그외의 시간에는 군사훈련을 하였는데 목총을 메고 들판을 뛰여다니고 산으로 오르내렸다. 그러다가도 교관놈이 "차렷!"하고 구령을 부르군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비칠거려도 몽둥이에 얻어맞았다. 훈련생들은 일본말을 하여야 하였는데 부주의로 조선말을 하게 되면 한마디에 1전씩 벌금을 하였다. 돈이 없으면 변소소제를 하고 대신 매를 맞아야 했다.

  그러나 이 훈련소에서도 마룡철을 중심으로 한 몇명 조선족젊은이들은 앓는체 하며 훈련에 나가지 않거나 교관놈의 행패에 반항하였고 조직의 영향을 넓히였다.

  훈련이 끝난 음력 8월 12일 저녁, 개산툰경찰서 특무계의 조선인특무 채창백이 순사둘을 데리고 졸업식장소에 불쑥 나타났다. 마룡철은 "도박혐의"로 수쇠를 차고 개산툰경찰서 류치장에 갇히였다. 이때에야 그는 김동길, 김광해, 남창수, 주두범 등이 체포된줄 알았지만 주두범 외의 사람들이 지하조직원이라는것을 알리 없었다.

  고문이 시작되였다. 체포되여도 조직의 비밀을 붙지 않기로 맹세했던 마룡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악이 난 놈들은 톱날처럼 만든 고무호스로 그를 때렸다. 그래도 대답이 없으니 5각 나뭇가지를 손가락사이에 끼우고 손가락을 비틀었으며 고추물을 입안에 퍼넣었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못끝이 뾰족뾰족 올라온 널반자우로 걷게 하였다. 악형과 고문에 그는 갈비뼈 여러 대가 부러지고 척추가 잘못되여 허리를 펼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마룡철은 일제는 꼭 망하고 혁명은 꼭 승리한다는 굳은 신념을 안고 입을 굳게 다물고있었다. 뒤늦게야 마룡철은 조직이 탄로되였고 체포된 사람들이 30명가량이나 된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1944년 말에 개산툰지구 "항일구국회"의 주요성원들인 김동길, 남창수, 마룡철, 김길송, 강위만, 강위룡의 어머니와 두 형수, 동길의 어머니, 길송의 량부모, 룡운의 아들 등 10여명이 "국사범"패쪽을 달고 판결없이 연길감옥에 압송되였다. 김길송 등은 1945년 5월에 길림감옥에 이감되였다.

  김동길의 어머니와 김길송의 아버지, 어머니는 놈들에게 시달리다가 연길감옥에서 옥사하고 주두범은 개산툰경창서에서 시달리며 앓다가 보석되여나와서 끝내 사망되였다. 강위룡의 어머니와 두 형수, 권영호의 어머니 등 넷은 1945년 봄에 "지방구류"로 풀려나왔다.

  1945년 "8.15"광복과 함께 마룡철은 김동길, 남창수 등과 함께 드디여 연길감옥에서 놓여나왔다. 마룡철은 100리 길을 옹근 9일간이나 모지름쓰며 걸어서야 겨우 개산툰고향집에 이를 수 있었다.

  부록: 1980년대 중반 연변력사연구소 시절 “연변의 적후 항일투쟁”은 나의 주요 연구과제의 하나였다. 연변의 연길, 화룡, 왕청, 훈춘 4개현 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독립사로 개편되고 후일 고정된 항일유격근거지를 떠나 광활한 지대로 진출하기 시작하던 1934년 봄부터 1945년 8월 연변의 해방까지였다.

  연변의 적후 항일투쟁의 주요 하나가 1940년대 초반 개산툰 자동출신 항일련군 전사 강위룡이 개산툰지구 자동 연두봉과 채수골을 중심으로 조직한 개산툰지구 항일구국회(그때는 조국광복회라 부름) 활동이였다. 이 활동에서 주력으로 나선 이들은 거개가 그젯날 화룡현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에서 활동하다가 이른바 “민생단”으로 몰려 하산한 분들로서 이들 내막을 필자는 환히 알고있었다.

  또, 개산툰지구란 이 지방에서 개산툰지구 항일구국회 비밀활동에 전반적으로 참녜한 분이 마룡철이였다. 마룡철은 개산툰 회경출신인 나의 장모님 김영숙의 첫 남편 마씨(해방전쟁 렬사)의 시동생으로서 80년대 중반시절 개산툰진 남산 팔프공장 구내에서 살고있었다.

  1980년대 중반 시절 나는 가시집마을 개산툰진 애민5대로 다니면서 장모님과 마룡철씨 그리고 관련 이들 한테서 개산툰지구 항일구국회의 진실한 이야기를 전문 취재하게 되고 깊 이있는 연구를 거쳐 본문 글을 정리해 낼수가 있었다. 이글은 그 시절 중국조선족총서 제4집과 조선족항일소년렬사전등에 실리여 조선족항일사 연구의 한 공백을 메우게 되였다.

  1

  오늘은 2021년 7월 17일 토요일, 구름이 많은 편이나 삼복기간의 31도 고온이어서 무척이나 무덥다. 하건말건 오전 8시 20분 룡정시가지를 벗어난 산야용越野车는 거침없이 두만강변 개산툰진 자동으로 달린다. 운전사는 원 룡정시 세무분국 최국장님이고 동행안내자는 원 룡정시 인사국 정두길 국장님.

  승용차는 얼마후 룡정시 덕신향소재지 구간을 지나며 완만한 올리막길을 톺아낸다. 령길에 올라서니 석문구간의 형제바위산과 석문, 석문에서 남으로 남으로 뻗어간 만징기골안이 환히 안겨진다.만징기골안은 그젯날 안중근 항일지사가 권총사격련습을 하던 골안이라고도 하지만 골안 량쪽은 룡정시 덕신향 석문구간과 개산툰진 자동, 덕신향 금곡 사이에 위치한 높고높은 산이라, 운전사 최국장님은 언제인가 등산길에 길을 오껴 자동과 금곡사이 높은 산에서 고생하다가 만징기골안으로 떨어지던 이야기를 꺼내 웃음을 자아낸다.

  승용차 잠간사이에 석문 구간을 지나고 회경 구간을 지나더니 큰길을 내려 자동으로 넘어가는 촌과 촌 구간 길에 들어선다. 회경 남쪽령을 넘으면 개산툰진 자동구간이라 약속대로 자동촌로인협회 김광운회장이 기다리신다. 기다리는 길가는 마침 자동3대요, 옛날 부령촌이라 100여년 력사를 가진 우리 시인 윤동주 선조들 옛집이 손저어 부르는것만 같다.“저 옛날 팔간기와집은 윤동주시인 선조들 집이 옳지요?”“옳구말구요. 우리 이곳 로인들은 모두 잘 알고있습니다. 언녕 개인집으로 되여 보전되고있습니다.”

  나는 자동촌로인협회 김광운회장님과 이야길 나누며 윤동주 선조들 이야기로 즐거운 시각을 보냈다. 승용차는 다시 달린다. 서남으로 산기슭에 이르니 자동의 농가들이 줄지어 달려온다. 이전 자동6대로 불리우던 옛 후저동마을이다. 지난 80년대 중반과 후반 연변력사연구소 시절 수차 자동현지답사를 거치면서 자동의 여러 마을들과 당지 조선사람들이주사, 마을형성사를 손금보듯 잘 알고있은 터였다.

  재미나는 이야기를 터놓으면 개산툰 팔프공장쪽 자동1대를 응달촌이라고 할때 자동2대는 리화동, 윤동주 선조들 삶의 자취 어린 자동3대는 부령촌이고 철길넘어 자동4대는 행화촌(해방전 개산툰 정동학교 자리), 서쪽 산밑마을 자동5대와 6대는 후저동, 자동3대와 6대는 5리쯤 떨어져 있다.자동6대 구간을 벗어나 한참 나아가면 골안은 크게 두갈래로 갈라진다. 오른쪽 골은 야동으로서 지신 금곡으로 넘어가는 20리쯤 늘찬 골안이고, 왼쪽골은 산너머 령너머 골안따라 두만강변의 삼합 강역으로 이어가는 40여리 긴긴 채수골이다. 채수골치기가 자동일대서 제일높은 연두봉 아래이고, 연두봉 아래에 5ㅡ6세대를 가졌던 옛 알미대 마을이 있었다.

  알미대마을 주변에는 지난세기 40년대 초반 자동과 관련되는 항일련군전사 강위룡이 산막을 가지고 활동하던 항일밀영지도 있었다지만 채수골치기에는 종래로 이르지 못한데서 구체지점은 모르는 나이지. 오늘의 현지답사 목적은 채수골치기라하는 금곡의 옛 병기공장 동굴을 찾는것이여서 잠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2

  이미 룡정의 분들로 련락이 된데서 승용차는 거침없이 왼쪽의 채수골에 들어섰다. 채수골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골안 한가운데가 외돌배기(고석)이고 외돌배기 북쪽 산기슭 바위산에 동굴 하나가 있으나 수풀이 엄청 우거진데서 골안의 엄청 커보이던 외돌배기 바위돌이며 아무것도 보아낼수 없다. 그런대로 승용차는 골안길이 뭐냐듯 앞으로 달리는데 또 두골로 갈라지는 어구 길가에 “연두봉항일련군밀영”이라는 돌 안내비가 서있다.

  일전 룡정시 로혁명근거지건설추진회 김동수님과의 통화에서 연두봉항일련군밀영 돌안내비를 룡정시 로혁명근거지건설추진회에서 지난해 10월 세운것임을 알고있었다. 연두봉항일밀영 구간에 들어선 기분이 별멋이다. 승용차는 삼합쪽으로 이어가는 채수골 늘찬 골안길이 아닌 골안 북쪽골에 들어선다.

  북쪽골은 조금 올라가다가 또 두갈래 길로 나뉘여진다. 오른쪽 길이 원길이라면 수풀속을 헤집는 왼쪽길은 풀로 덮히여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승용차는 내가 누구냐듯 씽씽 올라간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연두봉 바로 밑까지 올라갔다지만 채수골 어구처럼 수풀이 우거져 무엇하나 보아낼수 없다. 김광운 로인님은 차에서 내려 찾고찾지만 고개만 가로 젖는다. 10년쯤 잘 되는데 아리숭하기만 하다는 로인님.

  그래도 로인님은 단념하지 않고 차를 돌려 아래 구간을 다시 찾아보자고하신다. 때는 정오라 뜨거운 불볕을 토하는 땡땡볕으로 걷기가 쉽지가 않다. 당금이라도 쓰러질것만 같다. 나보다 년장자인 정두길님은 내색을 내지 않고 앞에서 걸으신다. 깊은 감동의 시각시각이다. 그럴 때 길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던 김광운 로인님이 찾았다며 환성을 지른다. 그 소리에 힘입어 우린 무더위를 헤치며 기운차게 나아갔다.

  김광운로인님은 서로 만나기도 바쁘게 수풀길 아래쪽을 가리키시며 내심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신다. 로인님이 가리킨 쪽은 무서운 풀숲이여서 길흔적이 도무지 알리지 않는다. 그런속을 헤치며 10여메터 나아가니 수풀길 아래 골물구간길은 골물로 파괴되여 엉성하기만 하다. 그 구간을 에돌아 산기슭으로 나아가니 김광운로인님은 찾았다며 기쁨을 토해낸다.

  산기슭 수풀속에는 남향집으로 인공돌벽을 이루며 10여메터 뻗은 산막터가 우릴 부른다. 돌벽 서쪽가에는 돌로 만든 구새목이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 자못 인상적이다. 김광운로인님은 이 산막이 지난세기 40년대 초반과 중반 항일련군으로 활동한 강위룡막이라며 하신다. 김광운로인님의 덕분에 우린 모진 무더위속에서 끝끝내 연두봉항일밀영ㅡ강위룡막을 찾아냈으니 그 기쁨은 이를데가 없다.

  우리 민족 항일연구가인 나로서도 처음 찾아 본 강위룡산막이다. 강위룡산막과 산막에 깃든 항일이야기는 이제 따로 전문 보여드리기로 하지만 강위룡산막은 이윽토록 필자의 발목을 잡고 놓질 않는다. 이모저모로 현장사진과 기념사진을 남기면서 나중에 산막옛터를 떠나는 나는 자주 고개를 돌리였다. 우리 력사연구가의 마음이리라.

  3

  이같이 연두봉아래 강위룡막을 찾았다면 연두봉아래로 향할 때 본 길가 숲속의 여러 옛 집터자리는? 처음 이 집터자리를 강위룡막이 아닐가 짐작하여 보았지만 강위룡막을 찾아낸 지금에는 필자앞에 그젯날 알미대마을로 생생 떠올랐다. 그래 알미대마을 옛터이지, 이곳 연두봉 동북쪽 아래에는 몇호 뿐이던 알미대마을 밖에 없었으니까. 강위룡을 받들며 항일을 지지성원하던 알미대마을이였지.

  당년의 연길현인민정부에서 1961년에 세운 주급 연두봉 항일밀영 안내비는 원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나타나

  승용차로 돌아온 운전사 최국장님은 우리 일행에게 몸소 갖고온, 스마트폰에 입력한 연두봉 항일련군밀영 옛 안내비사진을 보여드린다. 김광운로인님은 옛 안내비사진을 보시더니 저아래 길가숲속에 지금도 이 옛 안내비가 있다고 긍정적으로 말씀하신다. 와아, 또 하나의 채수골 발견이 우릴 기다린다.찾고보니 연두봉항일밀영 옛 안내비는 연두봉 북쪽가와 채수골이 갈라지는 자그만한 언덕우에 있었다. 룡정시 로혁명근거지건설추진회에서 길가에 연두봉항일밀영 돌 안내비를 세운 부근 언덕이였다. 하늘을 가리는 숲이 우거지고 풀들이 무성한데서 안내자가 없이는 아예 찾지를 못할 수풀속이지.

  자치주급 문화유물보호단위인 "연두봉항일밀영"과 연변조선족자치주 , 연길현인민정부 1961년 1월 10일 세움 등은 헤아려볼수가 있었구

  고마운 일은 인적이 끊긴 수풀속이여서 1961년에 그 시절 연길현인민정부에서 문물보호단위로 세운 세멘트 안내비는 어느 하나의 파괴도 없이 완정한 모습으로 우릴 반기는것. 검은 글씨로 된 글씨체가 가담가담 사라져 원 글씨체 전체를 보아낼수는 없지만 안내비 글체따라 연두봉항일밀영과 1961년 세움은 알아볼수가 있어 다행이라할가.

  항일유적지 현지답사의 풍만한 결실안은 하루.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로인협회 김광운로인 (올해 77세), 2009년부터 로인협회 회장으로 활동한다는 회장님의 안내로 우리 일행은 연두봉 부근에 숨은 금곡 병기공장 옛터대신 연두봉항일밀영으로 알려지는 강위룡막을 찾아내고 1961년 연길현인민정부에서 문물보호단위로 세운 연두봉항일밀영 옛 안내비를 찾았으니 엄청 수확이라 하겠다. 게다가 필자의 력사지식으로 그젯날 연두봉밑 알미대 마을터를 확인하였으니 수확은 보다 풍만하구.

  오늘의 연두봉 채수골 현지답사를 받들어나서면서 사전련락까지 도맡아준 룡정의 관련 부문과 관련 이들이 그지없이 고마운 마음이다. 이제 늦가을 락엽이 지는 철에 사방이 환히 보이는 철에 다시 연두봉과 채수골 현지답사를 벌리며 금곡 병기공장 옛터를 찾을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한없이 후더워난다.아아 연두봉아, 아아 채수골아, 연두봉과 채수골에 깃든 항일의 옛터와 항일의 이야기 우리 찾아 내리라! 세월아, 연두봉과 채수골 항일이야기 길이길이 전해 가시라!

  /리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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