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민환(李敏焕, 1913-1936)은 한민환(韩敏焕) 또는 김민환(金敏焕)이라고도 한다. 1913년 조선 함경북도에서 태여나 어렸을 때 길림성 연길현으로 이주했다. 1928년에 룡정대성학교 재학중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고 1929년에 청원 등 지역에 파견되여 지하혁명활동에 종사했다. 1930년 8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공청원현위 위원으로 당선됐다.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난 후 류화현 삼원포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그 해 겨울에 중공해룡중심현위 위원으로 당선되여 공청단해룡현위 서기직을 맡았다. 1933년 봄, 30여명으로 구성된 농민자위단을 조직했으며 이듬해 가을에 자위단을 재편성하여 소년련(후에 소년영으로 개편)으로 이름을 고치고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 독립사에 소속시켰으며 소년련의 정치위원을 맡았다. 1934년 여름, 소년련 70여명 전사를 거느리고 보안련 등 부대와 함께 류하현 삼원포 달우구지역에서 일본수비군을 습격하여 적 30여명을 소멸했다.
1935년 2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 참모장으로 임명되여 집안, 흥경(신빈), 환인, 관전, 본계, 봉황성 등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수차례의 전투를 지휘했다. 그해 가을, 집안현 도첨령(逃尖岭)에서 위만주국 치안대를 습격하고 얼마후 흥경현 류수경찰서를 습격하여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36년초, 동북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련군으로 개편되자 항일련군 제1군 제1사 참모장을 맡았다. 그 해 3월에 부대를 거느리고 봉성현 야저구(野猪沟)에서 위만군 제9련을 섬멸했고 6월 양정우가 지휘한 동변도 ‘토벌’사령관 소본량의 부대를 섬멸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1936년 여름, 줄곧 료녕성 동부와 길림성 남부 일대에서 항일유격전을 벌이고 있던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총지휘 양정위는 중공중앙이 거느린 중국로농홍군 주력부대가 이미 섬북에 도착했고 화북으로 출격하여 항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리민환이 참모장을 맡고 있는 제1군 제1사를 파견하여 서정하여 료녕성 서부와 열하성 경내에 들어가 관내의 항일부대와 련계를 취하려고 했다. 6월 28일 제1사 400여명 관병들은 서정의 길에 나섰다. 하지만 일본군의 수비가 너무 엄밀하여 성공하지 못하고 되돌아오게 됐다.
7월 15일 오전, 리민환이 거느린 부대는 료양과 본계의 접경지역인 마천령(摩天岭) 대유수구(大榆树沟)에서 일본수비대와 조우하여 수비대 대장 가네다를 비롯한 일본군 30여명을 소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날 오후 적들은 또다시 포위공격을 들이댔으며 전투는 더욱 치렬해졌다. 리민환은 부대를 지휘하여 번마다 적들의 진공을 물리쳤으나 나중에 적탄에 맞아 장렬히 희생됐다. 그 때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현재 리민환장군기념비는 본계 련산관 마천령(连山关摩天岭)에 세워져 있다.
/료녕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