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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악기, ‘성음’은 성스러운 공명 꿈꾼다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1.09.14일 11:13
  기계로 만드는 악기가 쏟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손으로 제작되여야 하는 소리들이 있다. 섬세하고도 세밀한 소리들을 자랑하는 우리의 악기들을 여전히 수공으로 제작해내며 오로지 제대로 된 소리를 위한 악기만들기 작업에 하루하루를 몰두하는 이가 있다. 연변성음민족악기공장 설립자 조춘호(53), 자연이 잉태한 귀중한 나무재료들을 다듬고 깎는다는 것, 그것을 자연바람으로 말리워 절제의 시간을 갖게 한다는 것, 공명판에 오밀조밀 여러가지 색조를 입힌다는 것, 또 매 옥타브의 미세한 소리 및 강도와 세기까지 파악하면서 악기조률에 매달린다는 것… 이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그는 마침내 가야금, 장고, 해금, 양금, 전자가야금 등 악기 연구제작의 권위적인 인정을 받으며 오늘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조선족전통악기 연구제작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단창필마로 시작된 창업

  연길시 소영진 소영촌에 위치한 그의 연변성음악기공장은 광복전 일제가 산굴을 뚫고 지었다는 격납고 바로 곁에 위치해있다. 공장은 지역적인 제한으로 아직까지 신식난방설비가 가설되지 않아 구식난로를 사용하리만치 수동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여기저기에는 대형 선반을 비롯하여 전기톱, 드릴, 대패, 절단기와 같은 목수공구들이 즐비하게 널려있었고 대패밥들이 여기저기에 무룩히 쌓여있었으며 이미 만들어진 장고, 북(조합북이라고 하는데 바퀴가 달린 틀우에 정착하는 북과 사물놀이용 북)이 천청밑까지 쌓인걸 보니 민족악기공장이라는 실감이 확연히 안겨왔다. 그야말로 소박하면서도 수수한 그런 환경속에서 그는 가장 품격있고 고고한 우리 악기들을 하나둘 세상에 내놓고 있었다.

  지금은 민족악기제작의 장인으로, 전문가로 거듭났지만 그에게도 파란만장한 지난시절이 있었다.

  지난 시기 80~90년대, 선후로 베아링공장, 등구(燈具)공장, 이앙기공장, 악기연구소로 두루 전전할 때까지 그는 평범한 로동자였고 러시아로 건너 갔을 때에는 무역업에 종사한 장사군이기도 했다. 그후 가정을 이루고 아들 둘을 낳은 후로는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더 잘 살아보자는 일념에 투척되여 2002년에는 다시 미국 밀항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러다 아르헨티나에서 걸리여 려권을 몰수 당하고 추방 당해 온 것은 그시기로 놓고 가까이에서 봤을 적에는 불행이였을테지만 결과적으로 멀리 봤을 경우에는 그 역시 정해진 운명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때 미국행을 택한 리유도 가장이라는 외에, 돈을 벌어서 이루고 싶은 꿈이 늘 가슴속에서 꿈틀댔었기 때문이였다. 꿈은 바로 30대중반이던 무렵에 연길민족악기연구소에 근무한 경력을 되살려 다시 민족악기를 만들고 싶었던 것. 그는 이렇듯 민족악기제작에 대한 첫마음과 첫설레임을 잊고 산적이 없었다. 드디어 2005년, 그는 너무나도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 단창필마로 민족악기제조업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수요하는 전설의 장인과 장인정신을 구가하는 인생길을 찬란하게 열어가기 시작했다.

  설립 초기, 그는 14만원의 자금으로 민족악기제조라는 거창한 “작업장”에 뛰여들었다. 하지만 가야금, 장고, 북, 해금을 제조하고 견본을 시장에 내놓았는데도 주문은 커녕 소매도 하지 못했다. 주문이 없어 사처로 뛰여다니면서 홍보를 견지하기를 6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북 한개도 팔지 못했다고 한다. 밀항길에 실패했을 적에는 허구픈 웃음이라도 나왔다고 하는데, 악기공장을 세운 후 주문이 안들어오는 일은 정말 죽을 맛 그 자체였다고 회억하는 조춘호는 창업 초기의 방황과 고난은 지금도 어떤 말로 형용이 잘 안된다고 한다. 잘 버텨내야지, 민족심 한가닥, 꿈 한가닥 안고 맨발의 청춘으로 달려온 열정의 분투사, 그는 그냥 주저앉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장인의 정성과 집념

  다시 희망을 꿈꾸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물건을 알리려고 견본을 들고 시장바닥을 헤맸다. 그러나 여전히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악기제작에 대한 사랑과 집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제작과정인데다가 우리의 아름다운 정신적재부임에도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것을 전문기관에서 인정하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또 그것은 어쩌면 아주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조춘호는 감정을 받으려고 견품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성 평양악기공장에 보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성에서는 마침내 인증서를 보내왔다. 그 인증서에는 가야금, 장고, 해금, 양금, 전자가야금 등 악기에 관해 음색, 모양, 민족악기의 고유한 특색 등 세가지에 대해 특히 인정한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수입하던데로부터 그후에는 조선에 수출하고 있는 상황을 이룩해냈다고 그는 자랑스럽게 전하고 있다.

  그외에도 전자가야금의 공명에서 힌트를 얻은 조춘호는 해금에 공명통 2개를 정착하는 특허를 신청했다. 공명이란 어떤 진동체가 울리면 같은 진동수를 가진 다른 진동체가 따라 움직이는 현상을 말한다. 그가 만드는 악기에 사용되는 공명통은 하남성에서 들어오는 오동나무를 많이 쓰는데 오동나무가 음색의 전도률이 높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전도률이 높다는 한가지만으로는 악기 제작후 질까지 보장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건조시간, 섬세한 제작과정, 과학적인 조합공예가 유지되여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특히 우리민족의 공명악기 경우가 그렇다. 공명악기인 가야금은 우리민족의 전통 현악기이다. 가야금은 조선반도 가야국시기에 우륵이라는 사람이 가실왕의 명령을 받고 만들었다고 기록되여 있고 당시 일본에까지 전해졌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신라금이라고 칭송하리만치 그 존속력사가 길고 제작과 공예가 복잡하다.

  전통가야금은 정악가야금과 산조가야금이라는 12현이지만 현재는 15현으로부터 25현까지 개량되여있다. 가야금은 오동나무의 뒤면을 파고 기러기발이라고 하는 받침대를 얹혀 만드는데 주로 가곡반주, 가야금산조, 가야금병창 등 우리민족음악 전반에 거쳐사용되고 있다. 이는 청아하고 부드러운 음색으로 오늘날 가장 각광받는 대중적인 민족악기이기도 하겠다.

  고생끝에 락이 온다고 조춘호의 성음민족악기는 권위적인 인증을 받으면서 한달 주문량이 수백대에 이를 때도 있었다. 어느 해인가 화룡시에서 단번에 북 50개, 사물놀이 북 500개, 장고 500개를 주문하기도 했다. 이렇게 주문이 폭주하고 일감이 많을 때면 20여명의 일군들이 상주하기도 했다.

  민족악기의 제작은 마음으로 일을 하는 한땀한땀의장인정신이 기반으로 되여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현재 장고, 북, 소고, 룡고 등 타악기와 가야금, 아쟁, 거문고, 해금, 등 현악기; 퉁소, 단소, 피리 등 관악기 그리고 상모, 칼춤용 칼, 무용부채 등 70여종의 민속악기를 생산하고 있는 성음민족악기공장에서는 예약이 쇄도할 때가 많다. 많을 때에는 한달에 북, 장고만도 1000개씩 만들어야 한다. 그가 이미 사회에 내놓은 가야금은 5000대가 넘고 장고, 북은 만여개를 초과하며 기타악기들도 수천개씩 된다.

  현재악기들은 전국각지의 여러 지역과 동북 3성 50여곳의 조선족 중소학교에 이미 공급되였으며 내몽골, 하북성, 청해성, 강소성, 절강성 국내 여러 지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파키스탄, 미국 등 나라에 수출되기도 한다. 공장 역시 연변대학예술학원 민족악기개발단위와 지정구매단위, 연변박물관 민속악기 현장제작지정단위, 연변 100대 성실전략파트너단위로 부상되였다.

  그리고 연변민속학회 리사로 활약하고 있는 조춘호는 일찍 2013년 9월 3일 평양에서 열린 국제악기전시회에 참여하여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민족악기제작의 명맥을 오늘까지도 정성과 집념으로 이어가고 있다.

  잘려나간 끝손가락과 가족

  2000년, 연길민족악기연구소에서 근무할 적에 악기제작을 하다가 오른쪽 식지 손가락끝을 기계에 잘리웠다. 그러나 나무를 깎고 다듬으며 갈라터지기를 반복했을 볼품없는 투박한 손끝은 자신의 소명을 했다는듯이, 장인의 어떤 훈장마냥 또 열정의 흔적마냥 그를 항상 채찍해주는듯 했다.

  조춘호가 가장 감사히 생각하고 있는 그의 안해 전순녀(48세)는 “남편은 콸콸하면서도 자상하고 세심한 사람이다. 한생을 민족악기제작에 심혈을 쏟아온 그는 나에게 있어 존경의 대상이다”라고 전했다.

  룡정 태생인 전순녀는 21살에 이앙기공장에 출근하는 조춘호와 결혼했다. 남편이 기뻐할 때면 더 기뻐해주고 힘들어할 때면 작은 힘이라도 돼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그녀는 남편의 생활과 공작의 동반자로 30여년을 함께 하였다.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려 아이들 용돈도 잘 쥐여주지 못하는 상황이였어도 그녀는 남편은 꼭 성공하리라는 믿음을 가졌고 가족과 함께라면 두려울 것 없다는 신념으로 내조에 힘을 다 했다. 가까운 곳에도 그 흔한 려행 한번 못하고 살았다지만 전순녀는 지금도 아이들과 함께 공장에서 남편의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큰아들 조성준(28세)과 조은성(15세)은 엄마를 따라 자주 공장에 다녀가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 조춘호를 한창 옆에서 도우며 또 여러가지 이야기도 나눈다고 했다. 그들은 “잘려나간 끝손가락을 볼 때면 마음 아플 때도 있다. 아버지는 악기를 만들 때에 가장 멋지고 근사하다”라며 아버지에 대한 인상과 기억을 전했다.

  “악기제작 일이 할수록 재미가 있고 보람차다” 조춘호의 말이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수 없다는 말이 있다. 조춘호는 악기제작의 꿈을 위해 참 오랜시간을 노력하고 버텨왔으며, 반복되여 지루할법도 한 수공작업임에도 불구하고 하면 할수록 재미있다고 말한다. 제작의 과정은 어쩌면 마음의 즐거움을 있게 하는 과정이며 더우기는 마음의 수련을 쌓아가는 과정이기도 하겠다. 결국은 완성되는 것은 악기뿐만이 아니라, 온몸과 마음을 다해 쏟은 보람으로 얻어지는 성스러운 공명과 울림, 그리고 사명이기도 하겠다.

  장인의 장알진 손끝에서 태여나는 공명, 조춘호는 향후에도 우리 문화의 한 맥을 이어가는 민족악기를 제작하여 그것을 타지역의 여러 민족들에게 알리고 또 우리들의 소리와 정서를 고이 지켜가는 것이 변함없는 꿈이라고 말하고 있다.

  /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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