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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같은 마음의 소유자 김보배할머니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1.10.18일 14:44
  “김 보배할머니는 정말 조련찮은 분입니다. 마음이 비단 같이 고울 뿐만 아니라 사상각오 또한 높기로 우리도 따라가기 힘들답니다. 자신의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에서 해마다 로인협회에 성금을 보내주고 있는데 이번에도 중국공산당 창립 100주년을 맞아 우리 로인협회에서 활동경비에 보태라며 1,000원을 기부해왔지요.” 장백조선족자치현 조선족로인협회 김영희 회장은 이렇게 올해 91세에 나는 ‘장백진 좋은 사람’ 김보배할머니를 칭찬한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훨씬 좋다고 말하는 김보배할머니

  “저 는 1931년에 한국 경기도 평택의 한 시골에서 태여났습니다. 아버지는 일제의 치하에서 빼았긴 나라를 찾겠다고 독립운동을 하였지요.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병환에 시달리다가 원통하게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국이 없는 망국노의 설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압니다.”

  독립운동가인 김보배의 아버지는 남존녀비가 심하던 그 시절에 녀자아이도 당연히 글을 배워가지고 사회에 진출해야 된다면서 딸을 소학교 6년은 물론이고 부근에 중학교가 없자 서울에 상경시켜 글공부를 시키기까지 하였다.

  “아버지의 병세가 심해져 결국 1년 반 밖에 다니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지었지요. 그러다가 1947년에 아버지가 독립운동하던 시절의 의형제되는 분의 소개로 경기도 수원의 한 산부인과병원에 취직했습니다.”

  김 보배할머니는 이렇게 우연하게 시작한 병원 일이 운명처럼 조선전쟁이 일어나자 전쟁터에서 간호사로 있으면서 부상병들을 돌보고 또 압록강반에 자리잡은 장백조선족자치현에서 병원과 부유보건소를 돌며 간호사와 의사로 근무하면서 1985년 퇴직할 때까지 백의천사로 반평생을 살아왔다.



늙어도 사상각오가 무뎌져서는 안된다며 매일 독서를 견지하는 91세 김보배로전사.

  “1950 년 6월 25일 조선전쟁이 일어나자 저는 그해 8월 18일에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조선인민군 의용군에 참군했습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이였던 것 같습니다. 후에 중국인민지원군이 들어오자 저는 지원군을 따라 최전방 의료대에서 간호원으로 있으면서 부상병들을 돌봤습니다. 그 와중 고생이야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하겠습니까.”

  20 살을 금방 넘긴 김보배는 폭음이 천지를 진감하는 전선에서 선혈이 랑자한 부상병들의 상처를 처치하고 미처 호송하지 못한 부상병들을 둘쳐업고는 젖먹던 힘을 다해 포연 속을 헤쳐갔다. 부상병들을 살릴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못하겠느냐면서 김보배할머니는 이젠 옛말이 돼버린 당시 가렬처절한 전쟁년대를 떠올린다.

  후에 부대 후방병원에 옮겨가서도 김보배는 부상병들을 친인처럼 살뜰히 보살폈다. “전쟁터에서 한창 젊은 나이에 눈을 잃은 병사들, 팔다리를 잃은 병사들, 온몸에 화상을 입은 병사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김보배는 이렇게 조선전쟁에서 3년 동안 부대에서 간호사로 있다가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조선전쟁에 나갔던 남편을 따라 장백현에 와서 자리를 잡고 인생의 제2막을 시작하게 되였다.

  “조 선전쟁에서 돌아와 병으로 앓던 남편은 몸이 좀 회복되자 법원에 출근하고 저는 가두에서 조직하는 식자반에 나가 조선글을 모르는 부녀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식수조림, 도로보수, 농촌지원과 빈곤호돕기 등 여러가지 일들을 돌아가며 하면서 처음 몇년을 보냈습니다.”

  1959 년 김보배는 28살이 되던 해에 남편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오직 남편 한사람만 믿고 중국까지 따라왔는데 가장 사랑하던 친인이 떠나다니 그 아픔이야 어디에 하소연하랴. 그리고 어린 자식 3명과 시어머니를 돌보는 막중한 임무가 그녀의 두 어깨에 떨어졌다.

  “남 편이 돌아갈 때 큰아이가 7곱살이였였습니다. 민정국에서는 저의 가정의 곤난한 형편을 료해하고 렬군속식당에 들어가서 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일하다가 1961년에 장백조선족자치현 이도강병원에 가서 사업하게 되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10년 가까이 놓았던 간호사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였다. 그리고 그후 1985년 퇴직할 때까지 줄곧 의료전선에서 환자들에게 자신의 열정을 쏟아부었다.



김보배로전사를 찾아 위문하고 있는 당지 군부대 관병.

  “지난 세기 60, 70년대에 우리 이도강 농민들의 생활은 째지게 곤난하였지요. 소금이 한근에 14전이였는데 그것마저 살돈도 없었으니 병을 보일 돈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지요.”

  장백현 이도강은 고한산구라 당시 극산병 영향으로 심장병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가 많았다. 병원에서는 오미자와 인삼을 달여서 극산병 후유증으로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복용시켰다.

  “한 밤중에 심장병환자가 발생하면 우리는 두말없이 달려갔습니다. 밤을 새는 날이 푸술하였습니다. 당시 저의 로임이 28원이였는데 저는 그 돈을 아껴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약도 사드리고 심지어 소금도 사드렸어요. 또 배급으로 나오는 몇근 안되는 쌀을 챙겨가지고 산모집에 찾아가서 죽을 써서 드리기도 하면서 맡은바 일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 번은 룡강촌이라는 마을에서 한밤중에 전화가 와서 산모가 금방 아이를 낳았는데 대출혈로 생명이 위험하다고 했다. 목숨이 경각을 다투는 일이라 빨리 가야만 하는데 자전거 탈줄은 모르지 그래서 김보배는 잠든 아들을 깨워 자전거를 타게 하고는 그 뒤에 앉아서 손전등을 비추면서 밤길을 달려갔다. 날이 휘붐히 밝아올 때까지 응급치료를 해서야 산모는 비로서 겨우 의식을 회복하고 영아도 무사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제서야 온마을 사람들은 두 생명을 살려냈다면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올렸다.

  “농촌병원이다보니 이와 비슷한 일들을 수없이 많이 겪었지요. 밤길을 얼마나 다녔는지 몰라요. 17년 동안 이도강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안가본 마을이 없습니다. 그때는 정말 밤낮이 따로 없이 뛰여다니면서 일만 죽도록 한 것 같습니다.”

  후에 사업의 수요로 장백조선족자치현 중의원과 부유보건소에서 일하게 되였지만 그의 사업열정은 퇴직할 때까지 줄곧 식을 줄 몰랐으며 의료사업에 참가한 이래 수차나 선진사업자의 영예를 지녔다.



증손까지 둔 김보배할머니의 행복한 만년.

  로 년에 와서도 자신에 대해 높이 요구하고 남을 배려하는 고귀한 품성은 변함이 없이 항상 여전했다. 앓는 사람들을 찾아가 따듯이 위로해주고 생활이 어려운 이웃들을 도우면서 맛있는 음식도 대접하고... 김보배할머니는 자신의 힘이 닿는대로 말없이 남을 돕는 일에 석양을 불태웠다.

  1999 년부터 그는 장백진경로원에 처음에 사과 한상자로부터 시작하여 매년 음력설 같은 명절 때마다 성금을 보내 로인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데 보태라고 했다. 장백진경로원은 한족로인들이 만년을 보내고 있는 경로원인데 김보배할머니의 따듯한 선행으로 이곳에서는 민족단결의 미담이 훈훈하게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장백조선족자치현에 조선족경로원이 세워지자 김보배할머니는 역시 매년마다 자신의 퇴직금을 털어서 로인들에게 맛잇는 음식을 대접하도록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2009 년 김보배할머니는 장백조선족자치현로간부국으로부터 리퇴직모범일군으로 당선되였으며 조선족로인협회로부터 수차나 우수회원과 특수공헌상 그리고 85세가 되던 2015년에는 장백조선족자치현 장백진 당위와 정부로부터 ‘장백진 좋은 사람’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지녔다.

  김 보배할머니는 나라가 점점 부강하니 로년에도 근심걱정 없이 살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하다면서 자신은 받는 것보다 베푸는 것이 훨씬 좋다며 이제 돌아오는 설에도 경로원 로인들에게 명절선물을 준비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흐믓하다고 말했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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