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자 앱 | | 모바일버전
뉴스 > 문화/생활 > 문화생활일반
  • 작게
  • 원본
  • 크게

‘백년의 금광’에서 ‘문화관광의 새 랜드마크’로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25.11.04일 12:53
장백산 중심부에 위치한 길림성 화전시에는 이런 전설이 깃들어 있다.

1820년 여름, 산동성 봉래에서 온 심마니들이 장백산 위사하에서 우연히 사금을 발견했다. 이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가면서 많은 채금인들이 이 ‘황금의 골짜기’로 몰려들었다.

당시 이곳에서는 하루에 500냥(两) 이상, 한 달에 1만 5,000냥 이상, 일년에 거의 20만냥에 달하는 황금이 생산되였다. 산길을 걷다 보면 발길에 무거운 자연 금괴(狗头金)가 걸릴 수도 있었고 강가에 앉아 손을 휘저으면 반짝이는 금모래가 가득했다. 1875년에는 누군가 강에서 300냥이나 되는 큰 금덩이를 채취해 화제를 모으기도했다. 100여년이 지난 1981년에는 금 채취인 경점양(耿占阳)이 7냥이 넘는 금덩이를 주었다. 더우기 대학에 합격한 자녀의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고민하던 마을 주민이 문 앞 작은 강에서 뜻밖에 자연 금괴를 발견해 곤경에서 벗어난 사연도 있었다. 이처럼 황금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로 인해 쟈피거우(夹皮沟)는 사람들의 입에 ‘곳곳이 황금이 널린’ 신비로운 땅이 되였다.

이 지역에는 쟈피거우, 로뉴구, 판묘자, 대선구, 로금장, 삼도구, 이도전자 등 10여개의 금광이 분포되여 있다. 그 중 쟈피거우 금광은 력사가 가장 오래되였고 금 생산량도 가장 많아 ‘중국 제일의 금광’이라는 명예로운 별칭도 가지고 있다.



쟈피거우의 력사에서 한헌종(韩宪宗)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초기에는 쟈피거우 금광이 산적 량재(梁才)의 손에 점거되여 있었고 금광 로동자들은 큰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강한 의리와 정의감을 가진 한헌종은 로동자들을 이끌고 량재를 몰아냈으며 어려움과 곤궁에 처한 사람을 도와 이 지역을 ‘황금 왕국’으로 변모시켰다.

당시 광산에는 4~5만명의 로동자가 있었고 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한헌종의 손자 한등거(韩登举) 역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갑오전쟁 당시 700여명의 사냥군으로 부대를 조직해 료양을 지키기 위해 전장에 나섰으며 짜리로씨야가 침략했을 때 단호히 저항하고 적의 위협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금광 채굴권을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행동으로 이 땅을 지켜냈다.

항전시기 쟈피거우는 또 동북항일련군의 ‘비밀 작전 기지’로 되였다. 위증민, 양정우, 주보중, 왕효명 등 항일련군의 지도자들은 광산 린근의 은밀한 주둔지에서 전투를 이어가며 생활했다. 현지 주민 천덕수는 여러 차례 항일련군에 식량과 의약품을 전달하며 지원했다. 동생이 적에게 살해당했어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으며 평범한 사람의 용기로 특별한 이야기를 써냈다.

1945년 항전 승리 후, 쟈피거우 금광은 마침내 새 생명을 얻어 인민의 품으로 가장 먼저 돌아왔다. 전쟁의 상처로 광산은 황폐해졌지만 광부들은 간고분투의 정신을 발휘하며 신속하게 재건에 나섰다. 1952년에는 나보월(那宝玥)이 이끄는 착암팀이 습식착암(湿式凿岩) 기술 시험에 성공하여 로동생산률을 크게 향상시킴과 동시에 직업병 발생률도 낮췄다. 이 기술 혁신은 전국 비철금속 광산의 ‘선도적 모범’이 되였으며 나보월은 이 성과로 전국 제1차 선진집단·선진생산자 대표회의에 참석하게 되였다.

그후 쟈피거우 금광은 끊임없이 새로운 영광을 창조해 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7년 동안 총 10.6톤의 금을 채굴하여 당시 전국 금 생산량의 23.8%를 차지했다. 1971년부터 1980년까지는 금 생산량이 다시 정점을 찍어 10년 동안 13.03톤의 금을 생산하며 동기간 전국 생산량의 9.43%를 차지, 전국 1위 자리를 되찾았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는 또다시 10.02톤의 금을 생산하며 세번째 금생산 정점을 기록했다.

‘중국 비철금속 공업의 요람’으로서 쟈피거우 금광은 전국에 인재를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었다. 1948년 설립된 ‘항대식’(抗大式) 기술 훈련반은 업계를 위해 첫번째 기술 중추를 양성했다.

그후 수십년 동안 전국 각급 각류형의 비철금속 광산에 관리 및 기술 인재 7,000여명을 공급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 쟈피거우 금광은 과학기술을 날개로 끊임없이 자체 한계를 극복해 나갔다. 2003년에는 동북지역 최대 규모의 금 정련소를 건설하여 년간 30톤의 제련 능력을 갖췄다. 2005년에는 품질 관리 체계 인증과 상해황금거래소의 제품 자격 인증을 획득하여 상해황금거래소의 첫번째 회원 기업이 되였다. 2006년 9월에는 오랜 채굴 력사, 심층 채굴 기술, 루적된 금 생산량, 다양한 인재 공급 등의 우세를 인정받아 중국황금협회로부터 정식으로 ‘중국 제일의 금광’으로 명명 되였다. 2018년 7월에는 이도구 광산의 수직 갱도가 -1500m까지 굴착에 성공하며 아시아 금광 수직 갱도 깊이 최고 기록을 세웠다.

쟈피거우 금광은 ‘백년의 금광’에서 ‘문화관광의 새 랜드마크’로 변모하고 있다. 이곳은 금문화 전시, 애국주의 교양, 생태관광 체험을 아우르는 종합 명소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1820년 우연한 발견에서 시작해 이제 문화관광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 이곳은 앞으로도 영광과 꿈을 간직한 이 땅에서 ‘황금’ 문화를 이어가며 ‘황금’ 빛을 발산해 나갈 것이다.

/중국길림넷

뉴스조회 이용자 (연령)비율 표시 값 회원 정보를 정확하게 입력해 주시면 통계에 도움이 됩니다.

남성 0%
10대 0%
20대 0%
30대 0%
40대 0%
50대 0%
60대 0%
70대 0%
여성 0%
10대 0%
20대 0%
30대 0%
40대 0%
50대 0%
60대 0%
70대 0%

네티즌 의견

첫 의견을 남겨주세요. 0 / 300 자

- 관련 태그 기사

관심 많은 뉴스

관심 필요 뉴스

최근년간 휘남현 루가조선족향은 농업 구조 조정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현지의 우수한 생태자원을 활용해 중약재 산업에 집중하며 ‘정부 주도, 기업 운영, 농가 참여’의 효과적인 모식을 통해 작은 오미자가 주민 소득 증대와 향촌 진흥을 이끄는 주요 산업으로 성장
1/3
모이자114

추천 많은 뉴스

댓글 많은 뉴스

1/3
녕안출신 기업가들 고향에 돌아와 통큰 투자

녕안출신 기업가들 고향에 돌아와 통큰 투자

녕안홍흠지능정공유한회사 개업식 성황리에 어거리풍년을 맞이하는 금추의 계절에 녕안시로부터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재청도녕안향우회 전일수 전임회장과 김명 현임회장이 합자형식으로 고향인 녕안시 경제기술개발구에 2000만원을 투자, 가전제품용 변압기 공장을 세

소일금(조선족), 강서성민족단결 개인모범 표창예정대상으로 선정

소일금(조선족), 강서성민족단결 개인모범 표창예정대상으로 선정

최근 중공강서성위 통일전선부, 강서성민족종교사무국은 표창예정인 30개의 강서성민족단결진보모범집단과 30명의 강서성민족단결진보모범개인을 확정하고 공시를 진행했는데 그중에는 구강시 도창현 명도호텔 총경리 소일금(녀, 조선족)이 포함되였다. 도창현 중화민족

올해의 흑룡강|국가 식량안전을 수호하는 '밸러스트'가 되다

올해의 흑룡강|국가 식량안전을 수호하는 '밸러스트'가 되다

농업은 천하를 안정시키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전략적 산업이다. 성위 제13기 제7차 전원회의 이래 흑룡강성은 습근평 총서기의 '3농' 사업에 관한 중요론술과 흑룡강성을 시찰하는 기간에 한 중요연설, 중요지시 정신을 참답게 관철실시하고 중앙1호문건과 중앙농촌사업

모이자 소개|모이자 모바일|운영원칙|개인정보 보호정책|모이자 연혁|광고안내|제휴안내|제휴사 소개
기사송고: news@moyiza.kr
Copyright © Moyiza.kr 2000~2025 All Rights Reserved.
모이자 모바일
광고 차단 기능 끄기
광고 차단 기능을 사용하면 모이자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이자를 정상적으로 이용하려면 광고 차단 기능을 꺼 두세요.
광고 차단 해지방법을 참조하시거나 서비스 센터에 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