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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50)— 《7.6》전투(하편)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3.02.21일 09:41
1948년 7월 6일, 장춘에 포위된 국민당군은 포위를 돌파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 장춘을 포위하고있던 동북인민해방군 각 독립사단도 치렬한 방어와 반격전을 펼쳤다.

동북국민당군 부총사령인 정동국은 정예부대인 신7군과 60군 주력을 동원해 급작스레 장춘서남부를 공격함으로써 돌파구를 열려 하였다. 남부를 수비하고있던 동북인민해방군 독립6사가 치렬한 방어전을 펼쳐 끝내 국민당군의 돌파시도를 격파하고있을 때 그곁에 포진하고있던 동북인민해방군 독립 11사도 치렬한 접전을 치르고있었다. 새로 편성된 독립 11사앞에는 국민당 장개석의 직계부대인 신7군이 있었던것이다.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바탕으로 편성된 72퇀은 독립 11사 1퇀으로 개편되여 독립 6사의 서쪽, 장춘시 맹가툰부근에 포진하고있었다. 비록 뒤늦게 독립사로 승격했지만 독립 11사의 조선족장병들은 모두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지고있었다. 이들은 장춘서남부의 맹가툰을 중심으로 방송국, 장춘영화촬영소, 남호에 이르기까지의 구간을 방위하고있었다. 반면 맹가툰 정면으로 홍기가부근에는 국민당군 주력인 신7군의 한개 퇀이 마주하고있었다.

1948년 7월 5일 저녁, 국민당군은 아군의 포위를 뚫기 위한 준비를 마무리하고 이튿날 새벽녘에 본격적인 작전에 들어갔다. 놈들은 포사격과 기관총사격의 엄호를 받으면서 여러곳으로부터 공격해나왔다.

독립 11사 1퇀 7련 장병들은 비발치는 탄우를 무릅쓰고 총창을 굳게 잡고 반격에 돌입했다. 하지만 급작스레 공격해오는 적의 수는 너무나도 많았고 화력도 아주 강했다. 퇀부에서는 곧 적의 예봉을 피해 잠시 철수할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놈들은 7련 진지를 점령하고 계속 맹가툰으로 공격해왔다. 상황은 아주 위급했다. 만약 우리가 계속 주춤거린다면 국민당 신7군은 거침없이 7련진지로부터 맹가툰을 공점할것이며 이곳의 방어체계에 구멍이 뚫리면 전반 장춘서남부의 방어선이 무너질판이였다.

퇀부에서는 부대를 조직해 반격할것을 과단하게 명령하였다. 철수명령을 받아서 20분뒤 7련 전사들은 다시 반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국민당군에게 반격하기 시작했다. 7련 4반의 박문기반장은 단숨에 적 세놈을 찔러넘겼고 다시 다가온 두놈을 총탁으로 쳐 쓰러뜨렸다.부근에서 싸우던 5반의 전사 리하룡도 신속히 총창으로 적 세놈을 쓰러뜨렸다. 장춘—길림부근에서 반년간 부지런히 련마한 창격술이 큰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던것이다. 전사들은 저마다 두려움없이 총창을 들고 적과 육박전을 벌였으며 아군의 기세에 눌린 놈들은 황급히 총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7련 조선족장병들은 자기의 방어진지를 다시 찾았을뿐만아니라 계속 적을 추격해 홍기가에 이르렀다. 도주하던 놈들은 저들의 방어진지에 이르자 신속히 흩어져버렸고 멀지 않은 곳의 층집에 의지해 완고하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적아쌍방은 한시간 남짓이 맞불질을 했지만 도저히 국면이 타개되지 않았다. 가장 큰 저애는 무너진 층집에 숨어 발악하는 한무리 국민당군 병사들이였다.

이때 박문기반장이 벌떡 일어서더니 거침없이 층집앞으로 걸어나갔다. 온몸에 수류탄을 가득 찬 박문기반장은 태연하게 적앞으로 걸어가면서 큰 소리로 웨쳤다.

《총을 바치면 죽이지 않는다. 계속 투항하지 않으면 이 수류탄으로 층집을 폭파하고 네놈들과 같이 죽겠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떳떳히 다가서는 박문기의 름름한 자세에 놈들은 기가 질렸고 투항하라는 박문기반장의 벼락같은 호통에 놈들은 오금을 떨었다. 혼비백산한 놈들은 저도 모르게 총을 떨어뜨리고 두손을 들고 하나하나 층집에서 기여나와 투항하였다. 이렇게 박문기반장은 한바탕 으름장으로 층집에 숨어 반항하던 국민당 병사 23명을 단번에 생포했다.

이에 뒤질세라 리하룡도 적을 추격하다가 어느 한 층집어구에 이르렀다. 놈들은 더 도주할데가 없었고 리하룡곁에는 다른 전우들이 없었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리하룡은 막다른 골목에 이른 놈들이 더욱 황급할것이라고 짐작하고 부근에 대고 소리질렀다.

《7련 동무들 전투준비, 이놈들은 도주할 길이 없다! 2반은 오른쪽으로 3반은 앞으로…》

불에 덴 노루마냥 어쩔줄 모르던 놈들은 리하룡의 말을 믿고 부근에 우리 군 전사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 기회를 빌어 리하룡은 놈들에게 다가가 투항하라고 벼락같이 소리치자 놈들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말았다. 이처럼 리하룡도 홀몸으로 단번에 적 12명이나 생포했다.

맹가툰반격전에서 7련 전사들은 사상자 한명도 없이 적 51명을 소멸하고 43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전투후 박문기는 전투영웅칭호를 수여받았고 리하룡도 대공 한차를 기록받았다.

한편 독립 11사 1퇀 1련 장병들은 장춘영화촬영소부근의 춘광학교자리에서 치렬한 접전을 거듭했다. 장춘시서남부에 위치한 춘광학교는 아군의 전연진지로서 적진지와 아주 가까웠다.

1948년 7월 5일, 춘광학교부근의 순라임무를 맡은 1련 전사들은 2패를 학교건물에 진주시키고 기타 전사들은 부근에 포진해있었다. 이날따라 장춘의 날씨는 무척 뜨거웠다. 조용히 매복해있는 전사들은 불볕에 구슬땀을 흘리며 쉼없이 울어대는 풀벌레의 소리에 시달리고있었다. 오늘따라 적 진지가 여느때보다 많이 조용하였다. 늘 들려오던 적의 말소리도 들을수 없었고 이따금씩 해빛에 번뜩이던 적군의 철갑모도 보이지 않았던것이다. 경각성을 늦추지 않고 정신을 가다듬었지만 어둠의 장막이 드리울 때까지 별 동정은 없었다.

밤은 소리없이 찾아와 주변은 먹칠한듯 캄캄하였다.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우며 순라하고 매복해있던 장병들은 모두 단잠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밤 한시쯤 되여 갑자기 전연진지에 100여명 적이 나타났다. 놈들은 저마다 기관단총을 들고 몸에는 수류탄과 비수를 차고 달려들었다. 보초를 서던 몇몇 전사들이 급기야 놈들을 발견하고 곧바로 육박전에 들어갔다. 보초를 서던 아군전사는 몇명밖에 없었지만 놈들은 백여명이나 되였다.

전사들은 총창으로 찌르고 총탁으로 때리면서 갑자기 나타난 놈들과 싸우면서도 학교건물지하실에서 휴식하고있는 전사들을 잊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그들은 숨질 때까지 놈의 철갑모끈을 으스러지게 틀어쥐고 적의 목을 조이며 손을 놓지 않았다.

지하실에서 휴식을 취하던 전사들은 갑자기 들려오는 인기척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놈들의 급습임을 판단한 그들은 곧바로 총을 들고 출입구로 향했다. 하지만 놈들은 이미 출입구를 봉쇄하고있었다. 건물출입구가 하나밖에 없었기때문에 출입구를 돌파하느라 많은 전사들이 쓰러졌다.

위급한 시각에 2패 패장은 담요를 찾아 몸에 쓰고 그우에 물을 뿌린 다음 출입구로 뛰쳐나갔다. 적의 총알이 담요에 맞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사들이 나올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았다. 뒤늦게 뛰쳐나온 2패 전사들은 희생된 보초병들과 패장의 원쑤를 갚으려고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러나 적의 수는 워낙 많았기때문에 2패의 20여명 전사들이 희생되였다.

7월 6일 7시에 이르러 부근의 3련이 급히 달려와 지원해주었다. 3련 련장은 춘광학교진지에 도착하자 곧바로 각 패 패장과 반장들을 거느리고 지형을 관찰하고 초소를 증설함으로써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7시쯤 되여 놈들이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사들은 자욱한 포연속에서 놈들의 포사격에 머리를 들수 없었다. 적의 화력이 너무 강했기에 전사들은 잠시 지하실에 몸을 피했다가 적이 공격해올 무렵 각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복수의 총탄을 퍼부었다. 아군의 정확한 사격에 놈들은 많은 시신을 남기고 물러나버렸다.

적의 공격이 멈춘 기회를 빌어 련장과 지도원은 신속히 적정을 분석하고 작전방안을 토의하였으며 전사들은 탄약과 수류탄을 보충받았다. 이윽고 놈들이 두번째, 세번째 공격을 발동하였다.

3련 장병들은 침착하게 싸우면서 적의 포격을 피한후 화력을 집중해 적보병을 소멸함으로써 끝내 적의 공격을 물리쳤다. 전투에서 3련 전사들은 87명 적을 소멸했지만 아군은 희생자 한명밖에 없었다.

1948년 7월 6일 새벽, 독립 11사 1퇀 3영의 진지에서도 치렬한 접전이 벌어졌다. 국민당 신7군의 한개영 병력이 9련이 수비하고있는 진지로 공격해왔다. 9련 전사들은 긴밀히 단합해 침착하게, 두려움없이 싸웠다. 3시간 남짓한 전투에서 9련은 세배나 되는 적의 공격을 6차나 물리쳤다.

련장이 부상당해 후방에 수송되자 김종복(金钟福) 부련장이 지휘를 맡았다. 하지만 그도 부상당했다. 지도원이 후방으로 가라고 권했지만 그는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계속 전투를 지휘하였다. 황창진 반장은 반 전사들을 거느리고 전연진지에서 적 20여차의 공격을 물리치면서 50여명 적을 소멸함으로써 전투후 특등전투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전투가 승리적으로 끝난후 9련 전사들은 300여명 적을 소멸하였지만 아군은 8명 중상자밖에 나지 않았다.

《7.6》전투는 국민당 장춘수비군의 마지막 대규모적인 포위돌파작전이였다. 수비군은 세개 사단의 주력을 동원해 장춘시서남부로 돌파를 시도하였지만 조선족장병을 위주로한 독립 6사와 독립 11사의 완강한 저항에 부딛쳐 대량의 병력만 손실보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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