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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항일투사 33인] 정태진, 말과 글은 민족의 혼

[온바오] | 발행시간: 2013.08.03일 16:05
한글학회 연구위원, 박용규(朴龍圭)


▲ 정태진 선생

해방 뒤 미군정으로부터 외교부 고문관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교부 장관의 초빙도 거절하고, 조선어학회에 복귀하여 오로지 국어대사전인 <조선말큰사전>의 편찬에만 헌신하던 인물이 있었다. 6·25전쟁 기간에 부산 피난 생활을 거부하고, 서울로 올라가 1952년 10월 <조선말 큰사전> 4권의 지형을 떠놓고, 고향인 경기도 파주에 식량을 구하러 가다가 군용트럭이 전복되어 50세의 나이에 서거한 인물이 있었다.

사실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우리말과 글을 영구히 보전하기 위해 국어사전 편찬에만 헌신하였다. 이 인물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이 분이 바로 정태진(丁泰鎭, 1903∼1952, 호는 석인(石人)) 선생입니다. 그렇다면 정태진은 누구인가?

그는 1903년 7월 25일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금능리 406번지에서 태어났다. 1921년 경기고보를 졸업하였다. 1925년 3월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였다. 연희전문 재학시절 정인보 교수, 이관용 등의 감화를 받아 조선의 독립을 희망했다.

민족 교육 실천

정태진은 1925년 4월에 함남 함흥영생여고보 교원으로 취임하였다. 1927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우스터대학교 철학과와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김도연과 같은 집에서 하숙하였다. 1931년 9월 귀국하여 함흥 영생여고보에 복직하였다. 조선어, 영어, 역사 과목을 담당하였다. 교원 시절에 그는 우리말을 보존하고자 방언 수집에 전념하였다. 학생들은 그를 곧고 단단한 학자로 정평이 나서 ‘돌부처’라는 별명을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 함흥 영생여고보 재직 시 동료교원, 제자들과 함께(둘째 줄 왼쪽 3번째가 정태진 선생) 손자 정시영 님이 사진제공.


수업 시간마다 그는 여학생들에게 “너희들끼리는 조선말만을 써야 한다. 너희들이 아름다운 조선말을 안 쓰면, 얼마 아니 가서 조선말과 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게 된다.”라고 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아울러 그는 1936년 8월경에, 임진왜란 시기 남원에서 남장을 한 김홍도라는 여자가 일본군과 싸운 일, 1937년 10월경에 과거의 조선은 일본보다 문화가 발전하였다는 사실, 1938년 1월경에 임진왜란 때 평양 기생 계월향이 일본군 장수를 껴안고 익사한 사실, 1938년 10월경에 신라의 마의태자가 조국의 부흥에 힘쓴 일, 1939년 5월경에 조선민족은 파벌 투쟁에 폐습을 고쳐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교육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낸 일제는 그가 교육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선동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조선어대사전> 편찬 전념과 일제의 탄압

1941년 5월에 영생여고보를 사직하고, 연희전문학교의 동기동창인 정인승의 권유로 조선어학회로 전직하였다. 조선어학회가 추진하고 있던 조선어사전 편찬의 전임위원이 되어 1942년 8월까지 사전편찬에 종사하였다.

홍원경찰서는 1942년 8월 말경에 ‘치안유지법 피의 사건의 증인으로 9월 5일에 출두하라’라는 내용이 담긴 소환장을 정태진의 자택에 보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 회원인 정태진을 소환하기도 전에 이미 치안유지법 피의 사건의 증인으로 그를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환장을 받은 뒤에, 정태진은 조선어학회를 떠나 홍원경찰서에 출두하였다. 일제 경찰은 그를 증인이 아닌 피의자로 다루며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체’라는 자백을 받아 내려고 숱한 추궁과 고문을 하였다.(정해동, 「선친과 그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며」, 애산학보 32)

이로써 보면 일제가 이미 정태진 소환 전에 조선어학회를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체로 규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는 20여일 동안 그를 고문하여 ‘정태진이 교단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는 사실과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체’라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추궁하자, 그도 인정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정태진 소환 전에 조선어학회와 그 회원을 치안유지법 피의 사건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판단 속에서 이후 일제는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회원들을 같은 해 10월 1일부터 검거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그는 홍원경찰서와 함흥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홍원경찰서에 갇혀있을 때,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때에 다음과 같은 옥중시를 남겼다.

홍원에서

망국의 한도 서럽다하거늘 아버지 또한 돌아가시니(國破父亡事事非)

망망한 하늘 아래 어디로 가자는 말인고?(天涯無際我何歸)

한 조작 외로운 혼이 죽지 않고 남아 있어,(一片孤魂今猶在)

밤마다 꿈에 들어 남쪽으로 날아가네.(夢裡向南夜夜飛)

함흥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아들 정해동이 징병 1기로 일본군에 끌려가게 되어 면회를 왔다. 정태진은 아들에게 “사람은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정도를 걸어야 된다.”라는 말씀을 주었다고 한다.

1944년 9월 30일 나까노 예심판사는 정태진에게 개정치안유지법 제1조 후단의 결사 목적 수행 행위죄를 적용하여 공판에 회부하였다. 일제는 그가 영생여고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주입하여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하도록 선동한 점과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결사가 조선어학회임을 알면서도 들어가, 그 학회가 추진하고 있는 조선어사전 편찬에 종사함으로써, 이 결사의 목적 실현을 돕는 행위를 한 점을 문제 삼았다.

1945년 1월 16일에 함흥지방법원의 니시다 판사는 예심종결에 의거하여 그에게 징역 2년형을 언도하였다. 그는 어려운 집안 살림을 생각하여 상고를 포기하고 일제의 언도대로 복역하고 1945년 7월 1일에 출옥하였다.

▲ 1945년 조선어학회 재건시 사진. 앞줄 오른쪽 3번째가 정태진. 사진 출처 '한글학회 100년사'


해방 뒤 <조선말큰사전> 편찬에 헌신하다 서거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었기에, 이제는 우리 민족이 마음대로 우리 말글을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말과 우리글인 한글을 애용하여 자주 문화를 꽃피우자는 염원을 다음의 시에서 정태진은 드러내었다.

우리의 말은 자연의 꽃이요,

우리의 글은 문화의 꽃이다.

이 말 이 글이 빛나는 날에

아름다운 꽃향기

쓸쓸하던 이 강산에

새 봄을 자랑하리.

해방 뒤 그는 미군정청과 대한민국으로부터 고위관료직의 제의를 거절하고, 조선어학회로 돌아가 ‘조선말큰사전’의 편찬 업무에 집중하였다. 아울러 여러 대학에도 출강하였다.

1946년 6월에는 <한자 안쓰기 문제>를 발간하고, 10월에는 김원표와 <중등국어독본>을, 12월에는 시집인 <아름다운 강산>을 간행하였다. 1947년 4월에 <고어독본>을 발간하였다. 1948년에 김병제와 함께 <조선 고어 방언사전>을 펴냈다.

▲ 정태진 저 <한자 안쓰기 문제>(1946) 정시영 님 제공

1948년 3월 20일 일본의 오사카 학무국이 재일동포를 교육하는 모든 교육 기관에서 조선말로 교육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내렸는데, 이에 대해 그가 강력히 항의하는 글을 <조선중앙일보>에 게재하였다. 그의 우리 말글 인식이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말과 글은 한 민족의 피요, 생명이요, 혼이다. 우리는 지나간 마흔 해 동안 저 잔인무도한 왜적이 우리의 귀중한 말과 글을 이 땅덩이 위에서 흔적까지 없애기 위하여 온갖 독살을 부려 온 것을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리고 몸서리가 쳐진다.(중략)동포여! 우리가 뭉치어 우리의 아름다운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킬 때는 온 것이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혼을 영원히 지키어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깨끗하게 전하여 줄 우리의 보물을 저 강도 왜적에게 다시금 백주에 빼앗기고 짓밟히게 하지 말자!”(「말과 글을 피로써 지키자!」, <조선중앙일보>, 1948, 4, 10.)

1949년 9월 25일 그는 정인승·정열모·방종현 등과 함께 한글학회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6·25전쟁 중에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 그러나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을 멈출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52년 5월 20일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28일에 <조선말 큰사전> 4권의 지형을 떠 놓았다. 그 뒤 고향인 파주에 식량을 구하러 가다가 군용트럭이 전복되어 11월 2일 5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 파주시 금릉리에 있는 정태진 기념관.(정시영 님 사진제공)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금촌읍 금능리 419-1번지에 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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