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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33)—제2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 사적지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7.29일 06:41
1932년 국민당반동파들은 강서중앙쏘베트지역에 대한 제4차포위토벌을 시작하였다. 장개석은 직접 총사령을 겸하고 수십만 군사를 끌어모아 서금으로 공격해왔다. 이시기 왕명(王明)을 대표로 한 《좌경》모험주의사상이 공산당중앙을 통제하고있었다. 상해로부터 중앙쏘베트지역에 온 림시 중앙대표도 《왕명로선》을 고취하면서 홍군이 창도한 정확한 전략, 전술을 배격하였다.

그들은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인 중국에서 혁명의 승리를 이룩하려면 장기적이고 복잡한 투쟁을 진행해야 한다는 객관법칙을 무시하고 대도시를 공격하는것으로 쉽게 혁명의 승리를 이룩할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수십만 반동군대가 포위공격해오고있는 상황에서 모택동은 점차 중앙쏘베트당과 홍군의 지도적 지위에서 밀려나 쏘베트정부 주석직만 보류하게 되였다. 그러나 주덕과 주은래는 계속 모택동이 창도한 적의 예봉을 피하고 약한 적을 각개 섬멸하는 유격전술로 적의 제4차포위토벌을 승리적으로 물리쳤다.

1933년 2월, 주덕과 주은래가 이끄는 중앙홍군은 황피(黄陂)와 대룡평(大龙坪)부근에 매복했다가 적 50사 전부를 섬멸하고 52사 사장 리명(李明)을 생포하였다. 3월 1일,홍군주력부대는 계속 적을 추격하여 59사 사장 진시기(陈时骥)마저 생포하였다. 패전 소식을 접한 국민당군 총지휘인 진성(陈诚)은 6개 사단 십여만 병력을 두 길로 나누어 공격해왔다.

3월 15일에 홍군주력부대는 초대강(草臺冈), 동피(东陂)부근에 매복했다가 적 2개 사단을 포위,섬멸하였다. 세차례 전투를 거쳐 홍군은 장개석반동군대 3만여명을 포로하고 수많은 무기를 로획함으로써 제4파반포위토벌전의 승리를 이룩하였다.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정부강당 옛터와 비문.


답사팀은 제2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가 열렸던 사주패(沙州坝)로 가보았다.

사주패는 서금시서남쪽 4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대회 개최지였던 강당은 지금 기념관으로 개방하고있었다. 기념관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니 나무숲사이로 거대한 로씨야식 건물이 보였다. 건물정면은 6개 기둥에 의해 5개 부분으로 나뉘여졌다. 가운데 정문이고 량옆에 각기 문 하나씩 있었으며 정문과 두 곁문사이에 창이 있었다.

정문웃부분에 커다란 붉은 별이 새겨져있고 량옆에는 노란색으로 칠한 낫과 망치의 표식이 각기 하나씩 있었다. 이곳이 바로 제2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가 열렸던 회의장이였고 또 쏘베트정부강당으로 사용되였던 유적지였다.

강당은 1933년 8월에 착공하여 년말에 준공되였다고 밝혀있었다. 제2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는 1934년 1월 21일부터 2월 1일사이에 진행되였다. 당시 상황을 보면 1933년 10월부터 시작된 국민당군의 제5차포위토벌이 한창 진행되고있던 때였다. 장개석은 동북 3성을 강점한 일본침략자들과는 거듭 타협하면서 이른바 당고협정(塘沽协定)을 체결하는 한편 50여만 병력으로 홍군을 공격했던것이다.

강당문을 들어서니 써늘한 느낌이 들었다. 부지면적이 1,500평방메터에 달하는 강당천정은 십여메터나 되여 공간이 퍽 컸다. 강당에는 무대를 향해 긴 나무걸상들이 배렬되여있었다. 그러나 강당은 창이 적어서 비교적 어두운 편이였고 무대옆 흰벽에는 당시 제2차대표대회에서 선출한 중앙집행위원회 명단을 밝혀놓은 액자가 있었다. 자세히 찾아보니 거기에 조선혁명가 삐스티(毕士悌)의 이름도 있었다. 삐스티는 양림의 로씨야식 이름이다.

중앙집행위원 명단에 나오는 필사적(양림)의 이름.


대회에서는 모택동의 정부사업보고를 청취하고 헌법대강(宪法大纲) 수개안을 채택하고 중앙집행위원회를 선출하였다. 조선혁명가 양림은 바로 이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던것이다.

국공분렬후 쏘련으로 갔던 양림은 동북에서 한동안 혁명하다가 주은래의 소환을 받고 중앙쏘베트혁명근거지로 오게 되였다.


1930년 봄에 귀국한 그는 상해에서 당 조직을 만났다.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동북의 유격부대를 조직하기 위하여 그를 동북에 파견하였다.


양림은 조선의 녀혁명가 리추악과 함께 동북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양림은 중국공산당 동만특위(东满特委) 위원 겸 군사위원회 서기의 신분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조선이주민이 많이 집중된 연변지역을 다니면서 대중운동을 령도하였고 혁명무장조직을 일떠 세웠다.

1931년 일본침략자들이 동북을 강점하자 그는 재조직된 만주성당위원회의 군사위원회 서기를 맡게 되였다. 각 곳에서 유격대조직에 진력하던 양림은 1932년 4월에 길림성 반석(磐石)지역에서 일어난 기세 드높은 반일농민봉기를 령도하였다. 그는 봉기자들을 이끌고 50여명 친일파들을 숙청하고 일제의 철길을 파괴하였다. 봉기후 양림은 조선혁명가 리동광(李东光), 리홍광(李红光)이 이끄는 《개잡이대》를 중심으로 반석로농의용군(劳农义勇军)을 건립하였다. 이 부대는 장시기 동북에서 활약하면서 후에는 동북항일련군(东北抗日联军) 제1군으로 확대되였다.

1932년 가을, 중앙쏘베트지역과 홍군이 계속 확대됨에 따라 우수한 혁명인재가 많이 필요되였다. 양림은 주은래의 지시에 따라 상해 지하당조직의 도움으로 중앙쏘베트지역에 도착하였다. 그는 사랑하는 안해 리추악과 작별하고 조직의 배치에 따라 새로운 사업터로 떠났다. 그후로 양림은 사랑하는 안해이며 혁명동지인 리추악을 다시 보지 못했다. 동북에서 계속 혁명활동에 종사하던 리추악은 승리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적들에게 살해되었던것이다.

황포군관학교시절부터 오랜 상급이였던 주은래는 양림을 중앙정부 로동및전쟁위원회(劳动与战争委员会)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중앙쏘베트지역의 적위대(赤卫队)를 령도하여 전선을 지원하고 후방을 보위하는것이 위원회의 주요과업이였다. 로동및전쟁위원회 주임인 주은래가 총책임을 맡았다. 양림은 이 시기 쏘련에서부터 사용하던 삐스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한어어음으로 읽으면 《필사적》이라는 뜻도 된다. 혁명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려는 그의 굳은 결심이 함축된 이름이다.


중앙쏘베트지역에서 양림은 선후로 강서군구(江西军区) 회창(会昌), 심오(寻乌), 안원(安远) 군분구 사령원, 홍군 23군 군장으로 있었고 1933년 봄에는 중앙군사위원회의 배치에 따라 월감군구(粤赢军区) 사령원으로 사업하였다. 이해 6월에 그는 홍군주력부대인 제1방면군 1군단 참모장을 담임했고 1934년 1월부터는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동원무장부(总动员武装部)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광범한 대중들을 동원하여 일선의 전투를 지원하였고 농민, 학생들을 어엿한 홍군전사로 훈련해냈다. 그리고 유력한 후방담보를 제공함으로써 홍군 주력부대의 제4차반포위토벌전의 승리를 적극 도왔다.

모택동과 주은래를 비롯한 공산당 주요책임자들은 조선혁명가인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표했다. 모택동은 양림의 안해 리추악을 동북에서 중앙쏘베트지역으로 전근시키라고 지시하기도 했지만 그후의 상황이 어려워 실현되지 못했다.

(권립 교수) 《1934년 1월 21일에 중화쏘베트 제2차전국대표대회가 서금에서 열렸습니다. 홍군총병참부 참모장으로 있던 양림은 대회의 주석단성원으로 당선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양림은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됐습니다.》


제2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가 개최되였던 강당에서 삐스티라는 이름을 찾은 우리는 모두 흥분하였다. 우리 민족 혁명가가 이처럼 중요한 대회에서 또 이처럼 중요한 직책을 맡았기때문이였다. 비록 이름은 뒷부분에서 찾을수있었지만 중국공산당내 주요인물들인 섭영진, 엽검영, 림표, 진의 등과 서렬을 나눌 정도였으니 중국공산당에서의 그의 지위가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알수 있었다.

2,000여명을 용납할수 있는 강당은 회음(回音)이 좋았고 시야가 탁 트였다. 창문보다 문이 많은것이 특징이였는데 해설원의 설명에 의하면 적의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쉽게 회의장을 빠져나갈수 있도록 문을 많이 만들었다는것이다.

강당건물뒤에는 방공호가 있었다. 너무 오래된 방공호이고 또 지질구조의 변화를 고려해 개방하지 않고있었다. 그러나 대회개최지에 방공호까지 파놓고있었으니 당시 홍군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짐작할수 있었다. 국민당의 비행기가 수시로 폭탄을 던질 위험이 있었기때문이다.


대회유적지곁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원상태로 잘 보존된 사주패 마을이였다. 당시 쏘베트림시중앙정부기관이 바로 이 마을 수십채의 가옥에 설치되였다. 집들은 대체로 흑과 기와로 되여있었다. 강남의 풍격인지는 모르겠지만 건물은 모두 흰벽에 검은 기와였고 붉은 글로 《홍군만세!》, 《인민들은 홍군을 옹호한다!》는 구호가 씌여진 담벽이 이따금 보였다. 푸른 잔디와 나무숲 사이에 얼른거리는 가옥들은 유난히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모택동이 거주하였던 가옥.

모택동과 현지 농민들이 판 물 맑은 우물-“홍정”.


강당과 마을사이에는 거대한 고목에 가리운 기와집 한채가 있었다. 모택동이 거주하던 곳이다. 나무는 긴 가지를 펼쳐 마당과 기와집을 모두 덮을 정도였다. 홍군부대 지휘권을 박탈당한 모택동은 이 시기 군중사업과 당 작풍 사업에 심혈을 기울렸다. 그는 이를 많은 농민들과 접촉하면서 인민들의 질고를 헤아릴수 있는 좋은 기회로 간주하였다.

쏘베트중앙정부 주석이였던 모택동은 간부들의 봉건악습을 고쳐주고 부패를 방지하는 유력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군중의 생활을 관심하고 사업작풍에 주의하자》라는 유명한 글을 발표하고 또 《탐오, 랑비 행위를 징벌할데 관한》제26호 주석령을 내렸다. 그때 쏘베트 2차대회 강당을 지을 때 공정처의 좌상운(左祥云)이 처장직무를 리용해 공금 246원을 탐오하고 도주하다 체포되였다.

중앙정부는 좌상운을 공개심판하고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유력한 조치가 있었기때문에 쏘베트지역의 군민의 정은 더욱 깊어졌고 인민들은 공산당 간부와 홍군을 열렬히 옹호하였다. 인민들은 당의 간부들을 애대하였고 자녀들을 홍군에 보냈다.

모택동은 실천속에서 군중에 의지하고 군중을 발동한다는 군중로선을 제기하게 되였다. 쏘베트지역 인민들은 지금도 스스럼 없이 농민들과 접촉하고 인민의 질고를 헤아려주는 모택동을 잊지 않고있다.

사주패 마을앞에는 작은 늪이 있었고 늪가에는 작은 돌기둥과 쇠사슬로 둘러놓은 우물 하나가 있었다. 우물은 1933년 9월,모택동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함께 팠다고 한다. 1950년에 현지인들은 모택동을 기념하기 위해 우물가에 비석을 세우고 《물마실 때 우물 판 사람 잊지 않고 시시각각 모주석을 그리네》라는 글을 새겨놓았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이 우물을 《붉은우물》이라 해서 홍정(红井)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우물을 마실수 있었는데 물맛이 시원하고 좋았다.

모택동주석과 같이 실천을 중시하고 인민의 질고를 헤아릴줄 아는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이 있었기때문에 중국공산당은 중국혁명을 이끌고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위대한 승리를 이끌어낼수 있었다. 때문에 양림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혁명자들은 중국공산당을 믿었고 중국혁명의 승리와 함께 조선인민의 독립이 이룩될수 있다고 확신하였으며 중국공산당을 따라 두려움 없이 투쟁하였던것이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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