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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16)— 북벌에서의 조선혁명가들(상편)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7.16일 10:46
조선족투사들이 많이 참가한 엽정독립퇀의 유력한 공격으로 정사교(汀泗桥) 천험이 돌파되였다. 북벌군은 여세를 몰아 정사교부근의 함녕(咸宁)성을 공략하고 하승교로 진격하였다. 이때 정사교천험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접한 오패부(吴佩孚)는 급급히 지원부대를 거느리고 하승교(贺胜桥)에 도착하였다.

북벌전쟁의 유명한 하승교전역이 있었던 하승교역.


월한(粵汉)철도의 다른 한 천험인 하승교는 황당호(黄塘湖)와 량자호(梁子湖)사이의 좁은 지역이다. 때는 우기여서 호수물이 범람하여 두 호수사이의 륙지면적이 더욱 좁아졌다. 오패부는 이곳에 정예부대 2만여명에 대포 60여문, 중형기관총 100여정을 배치하고 세겹의 수비진을 쳐놓았다. 정사교에서 북벌군의 우회공격을 받아 실패한 교훈을 섭취한 오패부는 10여리에 달하는 수비벽을 만들었고 언덕마다 요새를 만들어 서로 화력보완이 되게 하였다.

1926년 7월 29일부터 북벌군 주력부대인 4군과 7군은 엽정독립퇀을 선봉으로 정면공격을 개시하였다. 장기간 부패한 봉건군벌들의 수탈에 시달리던 현지 농민들은 앞다투어 북벌군을 도와나섰다. 그들은 북벌군장병들을 위문했을 뿐만 아니라 길안내를 자진해나섰다. 치렬한 공방전이 하승교를 중심으로 전개되였다.

2004년 2월 19일, 무한에 대한 답사를 마무리하면서 답사팀은 북벌전쟁의 저명한 옛 전적지였던 하승교로 향하였다. 무한시 남부로 40, 50킬로메터 달리면 강하(江夏)구에 이르게 된다. 무한시에 속하는 강하구는 중국고전소설 삼국지(三国志)에도 많이 나오는 지명이다. 그만큼 이곳은 력사가 깊은 고장이라고 할수 있다.


차는 고속도로를 따라 남행하다가 좁은 포장도로로 굽어지니 강하구에 도착하였다. 강하구 당사판공실의 가희수(柯希树)로인과 련락을 가진 다음 그분을 찾아 구정부로 갔다. 구정부는 생각보다 너무나도 초라했다. 뒤울안에 당사판공실이 있었는데 작은 2층 줄집이였다. 2층의 한쪽 구석에 사무실이 있었다. 건물은 마치 어느 농촌소학교와 같았다. 일층에 칸칸이 간판이 붙어있었고 2층도 그러했다. 헐망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니 당사판공실 주임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때 한쪽에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보던 로인 한분이 자기가 가희수라고 하면서 인사하였다. 70세에 가까운 분이였지만 몸은 건강해보였고 퍽 인자해보이는 로인이였다.

가희수로인은 원 강하구당사판공실 주임으로 사업했었는데 지금은 퇴직해 집에서 만년을 보낸다고 했다. 우리가 북벌전쟁에 관련한 전적지들을 답사하러 왔다고 하자 그분은 쾌히 승낙하면서 안내를 나서겠다고 하였다. 강하에서 차를 타고 평탄한 평원지대를 지나노라니 하승교진에 이르렀다. 하승교진은 함녕시(咸宁市) 최북단으로 무한시 강하구와 린접해있었다. 2만여 인구가 사는 작은 진이였다.


하승교기차역에서 2,300메터 떨어진 곳에 이르면 검은 철교가 보였다. 가희수로인은 이곳이 바로 옛 하승교 전적지라고 알려주었다. 당시만 하여도 철교밑으로 흐르는 물이 자못 깊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겨우 개울물 정도였다. 낮은 단층 민가들과 가끔씩 황둥개를 앞세우고 마을어귀를 다니는 평온한 농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이곳이 수만명 대군이 치렬한 접전을 치렀던 하승교전적지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개울을 건너 철길밑 돌계단을 따라 7,8메터 되는 철교에 올라서니 시야가 탁 트였다. 량켠으로 멀리 산언덕이 보였고 철길을 따라 아득히 평지가 펼쳐져있었다. 군사지형에 대한 연구는 없지만 철교를 중심으로 주변의 산언덕까지 수만명 군대를 포진해 수비진을 친다면 참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할수 있을것 같았다. 이따금 렬차가 굉음을 울리며 이곳을 지났다. 중국 남북을 관통하는 철도 대동맥인 경광선(京广线)이 이곳을 통하고있었던것이다.

당시 오패부는 렬차에 사령부를 정하고 전투를 지휘하였다.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가담한 엽정부대는 선봉을 맡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장병들은 두려움 모르고 적의 진지로 돌진하였다. 엽정부대는 도림포(桃林铺)와 인두산(印斗山) 진지를 공격했지만 많은 사상을 냈고 2진과 3진에 있던 적은 공격부대를 삼면으로 포위해왔다. 이때 엽정부대는 경계를 맡은 철갑차대 기관총련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전투에 투입되였다. 다른 후원을 바라기 힘든 상황이였다.

황포군관학교 기념관에 전시된 엽정 그리고 철군표식.


부대는 진퇴량난의 궁지에 빠졌다. 이때 엽정은 단연히 계속 공격할 결심을 내리고 기관총련과 기타 부대를 집중해 인두산진지를 공격하였다. 탄우를 무릅쓰고 전사들은 두려움 모르고 돌진했다. 어떤 전사들은 총에 맞은줄도 모르고 전진하다 쓰러졌다. 엽정과 독립퇀의 참모장 주사제(周士弟)는 일부 적이 기발을 메고 산밑으로 도주하는것을 발견하였다. 적진이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판단한 그들은 공격나팔을 불게 하였다. 독립퇀 전사들은 돌격나팔소리와 함께 총칼을 꼬나들고 적진에 뛰여들어 백병전을 벌였다. 질겁한 놈들은 진지를 버리고 앞다투어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오패부는 퇴각하는 부대를 막기 위해 《칼잡이》부대를 내세웠다. 웃통을 벗고 시퍼런 칼을 든 《칼잡이》부대가 퇴각하는 병사들의 목을 사정없이 쳤다. 하지만 퇴각부대를 막을수 없었다. 더우기 맹호처럼 돌진해오는 북벌군을 막을수 없었다. 근 1000명에 달하는 적병이 하승교철교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 죽기도 하였다.


적의 혼란한 틈을 타서 엽정부대는 신속히 하승교를 탈취하고 철길을 따라 공격해왔다. 당황해난 오패부는 황급히 기차를 타고 무한으로 도주하였다.

하승교철교에 서있노라니 어느덧 치렬한 전장에 몸을 담근것 같았다. 멀리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으로부터 포성이 울려오고 함성소리가 들려오는듯 하였다. 치렬한 하승교전투에서 엽정부대만 하여도 300여명의 희생자를 내였다. 그가운데 얼마나 많은 조선청년들이 포함되여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들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이국타향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철교밑 수수한 들꽃과 개울물을 굽어보노라니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중국 근대력사에서 중요한 한페지를 차지하는 북벌전쟁, 그것도 가장 치렬했던 하승교전투에서 우리의 자랑찬 조선 열혈청년들이 싸웠다는것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다소 진정시킬수밖에 없었다.

가희수로인의 안내를 받으며 답사팀은 하승교 북벌렬사릉원(北伐烈士陵园)을 찾아갔다. 하승교전적지에서 도보로 십여분 가니 민가들이 촘촘이 들어서있었다. 좁은 골목길로 걸어가니 한메터 남짓한 높이의 돌담과 철문이 보였다. 이곳이 바로 북벌렬사릉원이였다.

하승교 북벌렬사기념비.

북벌진망렬사릉원.

북벌진망렬사릉원의 정자.


릉원입구에 《하승교북벌진망 렬사릉원(贺胜桥北伐阵亡烈士陵园)》이라는 소개가 흰 대리석에 검은 글로 새겨져있었다. 글은 하승교전투를 간단히 소개하고나서 릉원을 만들게 된 경우를 밝혔다. 하승교전투가 있은후 국민혁명군과 현지 농민들은 희생된 렬사들을 이곳에 매장해놓았던것이다.

1929년 10월, 국민정부는 이곳에 묘지와 정자를 만들고 기념비를 세워놓았다. 그뒤 1982년과 1996년, 2003년 세차례에 걸쳐 무한시정부에서 릉원을 보수하고 주변에 소나무를 심어놓았다. 그리고 1992년에 릉원을 호북성 성급문화재로 확정했다고 새겨져있다.


릉원에 들어서면 커다란 무덤이 보인다. 거기에는 《국민혁명군 제4군 북벌진망 렬사지묘(国民革命军第四军北伐阵亡烈士之墓)》라고 씌여있다. 많은 희생자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채 이곳에 함께 매장되였던것이다. 묘지뒤편으로 6각형 기념정자가 있었는데 돌로 축조되여있었다. 그뒤에 6메터남짓한 높이의 기념비가 있었다. 기념비에는 《국민혁명군 제4군 북벌진망 렬사기념비》라고 쓴 당시 국민정부 주석이며 립법원 원장이였던 호한민(胡汉民)의 제자가 새겨져있었다.

7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묘지와 정자, 기념비는 매우 낡아있었다. 또한 관리일군이 없었기 때문에 릉원은 헐망하고 황페하였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고 구석구석 쓰레기가 쌓여있었다. 부근 농민들이 릉원 한쪽켠에 야채를 심기도 하였다.

가렬처절한 하승교전역의 휘황한 승리와 오늘 황페해진 북벌렬사릉원을 대조하노라니 마음은 아프기 그지없었다. 160여명 조선혁명자들이 엽정독립퇀에 있었기 때문에 하승교전투에서도 많이 희생된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릉원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하나도 밝혀져있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알수 없었다. 북벌전쟁에 관한 문화재보호와 력사연구가 이 정도이니 우리가 중국력사의 대하속에 한줄기 강풍으로 싸워왔던 조선혁명자들의 자취를 찾기 힘들지 않을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사교, 하승교 전투승리에 이어 북벌군은 신속히 무한을 포위공격하였다. 1926년 9월 5일 북벌군은 무창(武昌)성을 포위공격하기 시작하였지만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쉽게 공략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구(汉口)의 수비군이 봉기함에 따라 한구와 한양(汉阳)은 쉽게 함락했다. 제4군은 그뒤 한달남짓한 동안 무창을 공격하기 위해 힘썼다.


오패부의 주력을 섬멸한후 북벌군주력은 강서전장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오패부의 패망을 관망하고만 있던 손전방도 이른바 《중립》의 허울을 벗어던졌다. 오패부 다음으로 자기가 북벌군의 공격목표로 될것이라고 판단한 손정방은 절강, 복건, 강소, 안휘, 강서의 군대를 끌어모아 북벌군을 막으려 시도하였다.

9월 6일 북벌군은 무한공격과 함께 2군, 3군, 6군을 강서에 진입시켜 손전방을 공격하였다. 북벌군은 선후로 감주(赢州), 평향(萍乡), 의춘(宜春) 등지를 공략하였다.

무한을 공격하는 4군 엽정부대에 리용을 비롯한 많은 조선인장병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타 부대에도 조선인장병들이 많았다. 제2군에는 포병련장 강파(姜波)와 기관총대 련장 리동화(李东华)가 있었고 제6군에는 기관총 교관 김준섭 외에도 포병영 영장 리검운(李劒云,李检云), 부영장 권준(权畯), 부관 안동만(安东晚)이 있었다. 이들은 남창공격전, 무창공격전, 남경, 구강, 선창 공격전에서 모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더욱 많은 조선족전사들이 이들과 함께 피 흘리며 싸웠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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