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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10)—중산대학과 조선혁명가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7.10일 14:29
국공합작이 이룩된후 손중산은 군사인재양성을 위주로 하는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한 한편 국립광동대학을 정치전문인재양성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군사간부만큼 리론가와 조직가로서의 정치간부도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취한 조치였다. 그리하여 광동대학은 당원간부를 양성하는 주요기관으로 되였고 혁명사상을 전파하는 주요 통로로 되였다.


1924년 11월 11일, 손중산은 친히 혁명학교인 국립광동대학을 설립하였다. 학교터는 광주시 문명로(文明路) 215번지에 위치한 광동고등사범학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정했다. 지금은 학교가 전부 남으로 이사하여 남은 것은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던 국민당 제1차전국대표대회 소집지인 종루뿐이였다. 종루는 현재 로신기념관으로 사용하고있다.

1925년 3월 12일, 중국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이 북경에서 간암으로 서거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1926년부터 국립광동대학을 정식 중산대학으로 개칭했는데 지금까지 중산대학으로 불리우고있다.

광주시 신항서로에 위치한 중산대학교 교문.


20년대후반기 광주에 모여온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황포군관학교 입교와 동시에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교직원사업에 종사하였고 자유와 독립의 길을 적극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중산대학은 많은 조선청년들의 배움의 전당으로 되였다.


(권립 교수) 《중산대학의 전신은 1924년에 선 국립광동대학입니다. 1926년 봄에 황포군관학교의 손두환, 김원봉 등은 당국과의 교섭을 거쳐 조선인은 무료로 중산대학에 입학할수 있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당해에 57명 조선청년들이 중산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산, 김성숙 등 입니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일부는 전선으로 나가고 나머지는 후방에 남아서 계속 지하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1926년 4월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보고인 고경(高警) 134호 서류를 보면 조선혁명자들과 국민당간의 협의내용을 알수 있다. 상해에 있던 려운형(吕运亨)은 이때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汪精卫)의 초청으로 중국국민당 제2차대표대회에 참석하고저 광주에 오게 된다.

그는 1926년 1월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인 장교 손두환(孙斗焕)을 통해 국민당내 실력자이며 황포군관학교 교장인 장개석(蒋介石)을 만났다. 손두환은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장실 부관으로서 량자사이의 다리를 것이다. 만난 자리에서 려운형은 조선독립운동자들에 대한 자금지원을 요구했지만 장개석은 끝내 난색을 표했다. 대신 려운형은 혁명간부와 군사기술 전문가의 양성이 필수요건임을 인식하고 조선청년들을 입교시켜줄것을 요구하였다.

장개석은 이를 쾌히 승낙하고 국민정부 관할내의 군관학교, 국립대학, 기타 국립학교에 입학을 희망하는 조선인은 언제라도 무조건 입학을 허가하고 군교생도들에게는 서적, 숙소, 식비, 피복을 제공하고 일정액의 봉급을 지급하며 졸업후 24개월동안은 국민혁명군에 의무 복무해야 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청년들은 황포군관학교의 입학과 동시에 중산대학에 많이 입학할수 있게 되였던것이다.


광주시 중산대학은 현재 신항서로(新港西路)에 위치하였다. 교문을 들어서면 키 높이 자란 고목을 가로수로 한 길이 여러갈래로 뻗어있고 푸른 잔디가 펼쳐진 정원과 교수청사들이 있다. 학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것은 손중산의 동상과 중국 근대력사인물들의 동상들이였다.

광동성 당사연구실의 조직(曹直)선생이 70여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답사팀을 배동해주었다.


(조직 교수) 《중산대학의 전신은 손중산이 1924년에 창설한 국립광동대학입니다. 1926년 손중산을 기념하기 위해 학교명칭을 중산대학이라고 고쳤습니다.》


중산대학 도서관은 한창 수건중이여서 부분적 도서실만 개방하고있었다. 답사팀은 겨우 관리일군들을 설득해 도서관의 장서를 찾아보게 되였다. 그러나 대부분 중요한 서류들은 모두 짐으로 꿍져있었다. 답사팀은 대학의 초기 교직원상황을 찾아보았다. 산처럼 쌓아놓은 짐짝속에서 몇권을 찾아 살펴보았지만 수많은 인물들가운데서 조선사람의 이름을 찾아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였다.

당시 의렬단 간부급 단원이였던 강세우, 김성숙(金星淑), 정유린(郑有■), 장지락(张之乐), 리영준(李英骏), 최원(崔圆), 서의준(徐义骏),리활(李活) 등이 중산대학에 입학하였고 마준(马骏), 김동주(金东洲), 김원식(金元植)을 비롯한 많은 지식청년들이 이 학교에 입학하였다. 1926년 <국립중산대학 학생명책>에 의하면 50명에 가까운 조선청년들이 중산대학 본과 또는 예과에서 학습하였다.

광주 중산대학에 모여 함께 공부하게 된 김성숙과 장지락은 일찍 북경 활동시기부터 함께 혁명해온 훌륭한 동지였다. 김성숙이 바로 유명한 공산주의리론가인 김규광(金奎光)이고 장지락이 바로 혁명가 김산(金山)이다. 에드가.스노의 부인 님.웨일즈가 남긴 유명한 저서 <아리랑>의 주인공이 바로 김산이다.

오른쪽 첫사람이 김규광(김성숙).


김산이 북경으로부터 광주에 온것은 1925년 가을이였다. 이때 대부분 의렬단단원들도 광주에 모여있었다. 그러나 광주에 모인 많은 조선혁명자들은 서로 분파로 나뉘였고 혁명경력도 매우 복잡하였다. 로씨야에서 풍부한 투쟁경험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조선 국내에서 온 사람도 있었으며 상해에서 온 사람도 있었고 북경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이때 김산과 김규광은 중산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무장투쟁의 군사단체를 형성하기보다는 우선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정치단체가 있어야 함을 인식하게 되였다. 이시기 이미 사상, 조직적으로 공산주의자로 된 김산과 김규광은 대중투쟁을 위한 정당수립에 심혈을 기울렸다. 더우기 광주에 모여온 수많은 혁명자들의 분파를 없애고 유력한 조직체를 만드는것이 급선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던 것이다.

수많은 우수한 조선청년들이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서 군사, 정치 교육을 받고있을무렵 광주에는 중국 동북, 로씨야 씨베리야나 모스크바, 조선국내, 일본 등지에서 온 다양한 경력을 가진 조선 혁명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중국 국민혁명운동에 직접 참가하여 그 성과를 조선의 반일독립운동으로 련결시켜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불원천리 광주에 모였던것이다. 


그리하여 단순한 친목을 도모하는 차원을 넘어서 모든 조선혁명자들을 단합시켜 이들의 힘을 한곳으로 집결시켜야 했다. 의렬단 단장 김원봉과 김규광, 김산 세 사람이 핵심이 되여 분파를 제거하고 대중운동을 형성할 준비를 다그쳤다.

우선 황포군관학교 재직자와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광주의 조선혁명군인회가 결성되였다. 1926년 6월 28일호 동아일보가 광주 조선혁명 군인회에 관련 보도를 실었다. 보도에 의하면 창립시 회원이 120명이나 되였다. 군인회는 더욱 확대 발전시켜 조선군단까지 만들 계획을 세운것으로 생각한다.


다음으로 광주의 조선혁명가들을 단합하기 위한 조직체인 류월(留粤) 한인동지회가 1926년 6월에 창립되었다. 황포군관학교의 손두환이 회장을 맡았다. <아리랑>에서 김산이 회억한데 의하면 김원봉, 김규광, 김산의 노력으로 조선인의 모든 집단과 정파를 대표하는 중앙동맹체인 조선혁명청년련맹 창립대회가 소집되였다. 대회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였고 300명 회원을 받았다. 대부분 공산주의자들이 련맹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였는데 그 가운데는 련맹 창도자인 김규광과 김원봉이 포함되였다.

1927년 4월 류월동지회는 제2차림시대회를 소집하고 지도층을 개선하였다. 마준, 정유린, 서의준, 리영준, 채원개, 리활, 김동주, 장지락, 김원식 9명이 신임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이 가운데 리활이 바로 저명한 저항시인 륙사(陆史) 리원록(李源禄1904.4.4--1944.1.16)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련모(恋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阴)을


  부지런한 계절(季节)은 피어서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저명한 저항시 <광야(旷野)>를 창작함으로써 독립과 자유를 갈망했던 시인 리륙사(李陆史)는 1904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태여났다. 1925년 일본에서의 류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의렬단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중국으로부터 조선에 들어가 일제 주요기관들을 파괴하다 체포된 윤세주의 의렬투쟁사적은 그를 크게 감동시켰던것이다. 초기 그는 북경에 자주 다니면서 조선정세 보고와 군자금 전달사업을 맡아보았다. 후에 중국에서의 혁명중심지가 광주로 옮겨짐에 따라 그는 광주의 중산대학 의과에 입학하였다. 한편 그는 조선인 혁명활동에 적극 참가하여 류월동지회인 조선혁명청년련맹의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리륙사는 선후로 17차례의 옥고를 치른다. 일제 감방에서 그의 번호가 64번이였기때문에 호를 륙사로 하였다 한다. 굴함없이 일제와 싸우면서 의렬투쟁의 앞장에 섰던 그는 몸이 쇠약해짐에 따라 붓을 무기로 삶았다. 전 민족의 수난기였던 그 암흑한 사회에서 주옥같은 시들로 항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싸우던 리륙사는 1944년 1월 북경 일제감옥에서 옥사한다. 


조선혁명청년련맹의 창립과 함께 김규광은 활발한 리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련맹의 기관지인 <혁명행동>을 창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김산은 부주필의 한사람으로 있었다. 김규광은 련맹의 모든 선언을 기초하였는데 그의 론문들은 인차 유명해졌고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련맹내부는 의연히 여러 파벌들로 나뉘여 지도권 다툼을 하고있었다. 그리하여 중앙집권을 위해 더욱 특별한 조직이 필요하였다. 김규광과 김산은 각지 공산당원 80명을 모아 조선인 공산주의비밀조직을 내왔다.

조선혁명청년련맹은 어디까지나 정당이 아니였다.의렬단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선민족독립당이 이시기 형성되였다. 조선민족독립당은 11명 위원을 선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직체계가 수립되면서 많은 조선혁명가들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수 있었다. 그들은 중국인들 틈에 끼여 어떤 사람은 고문으로 어떤 사람은 황포군관학교나 중산대학의 강사로, 어떤 사람은 혁명군사령부에서 근무하였고 또 많은 사람들이 혁명군대에 들어가 전투에 가담하였다. 그들은 자주 모임을 가졌고 함께 혁명을 론하면서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고있었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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