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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21)—국공합작의 철저한 분렬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7.19일 16:32
장개석이 피비린 《4.12》반혁명변을 일으킨후 성세호대하던 중국 혁명진영은 분렬되기 시작하였다. 장개석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남경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고 왕정위를 대표로 한 무한정부는 계속 국공합작을 주장하면서 장개석의 반역행위를 성토하였다. 한편 북경에는 장작림의 북양군벌정부가 존재했기 때문에 중국력사에서는 세 정부가 병존하는 국면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혁명자들은 반제반봉건투쟁을 계속하는 한편 새로 나타난 군벌세력과 투쟁하여야 했던것이다.

1927년 4월 19일, 무한국민정부와 국민혁명군은 무창 남호(南湖)에서 북벌선언을 발표하고 두번째 단계의 북벌을 시작하였다. 왕정위는 장개석을 토벌하자는 주은래를 비롯한 공산당원들의 동정주장을 제치고 쏘련 고문 보로딘의 의견을 받아 북벌을 결심했다.

무한 국민정부청사 옛터.

무한정부 북벌군주력에는 많은 공산당원들을 포함한 장발규(张发奎)의 제4군과 제11군 그리고 하룡(贺龙)이 거느린 독립 15사단이 포함되였다. 많은 공산당원들과 조선인장병들이 두려움 없이 싸웠기때문에 북벌군은 강대한 적을 물리치고 승승장구로 진격하였다.

전투가 가장 치렬할 때 풍옥상부대가 북벌군을 도왔고 산서의 염석산(阎锡山) 부대도 적극 호응해나섰다. 그리하여 북벌군은 하남 전 성을 석권하고 6월 2일 하남성 개봉(开封)을 점령하였다. 한편 장개석도 북벌을 시작해 이날 중원의 전략 요충지인 서주(徐州)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쟁과 외란에 시달리던 무한정부는 더욱 큰 위기를 겪게 되였고 드디여 왕정위도 혁명을 배반하고 장개석과 합류하는 길로 나아갔다.

국민군이 제2단계 북벌을 시작한후 새로운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은 1927년 4월 27일부터 무창고등사범학교(武昌高等师范学校) 제1부속소학교(第一附属小学校) 강당에서 제5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 진독수(陈独秀), 채화삼(蔡和森), 장국도(张国燾), 담평산(谭平山), 구추백(瞿秋白), 모택동(毛泽东)을 비롯한 80여명 핵심당원들이 대회에 출석하였다. 이때에 와서 전국 공산당원수는 1925년의 994명으로부터 5만 7900여명에 달했다.

대회에서는 진독수의 타협로선을 비판하였고 혁명투쟁에서 무산계급이 지도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회는 당면한 무장투쟁과 토지혁명에 관련한 관건문제에서 명확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장개석 남경정부를 성토하는 민국일보(자료사진).

국민당의 통합노력,2기 3차전원회의(자료사진).

국민당대표로 대회에 출석해 연설까지 했던 왕정위는 자기를 소자산계급으로 규명하고 겨우 단결의 대상으로밖에 인정하지 않은 공산당의 작법에 실망을 느끼고 드디여 공산당에 대해 칼을 품게 되였던것이다.

무한정부가 통제하고있는 호북, 호남, 강서 등지에서는 성세호대한 로동자, 농민운동이 계속되고있었다. 게다가 무한정부는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리게 되였다. 북쪽에서는 북양군벌과의 치렬한 격전이 계속 되였고 동쪽에서는 장개석이 무한에 대한 봉쇄를 실시하고있었으며 남쪽과 서쪽에는 장개석에게 매수된 광동군벌과 사천군벌이 수시로 무한을 노리고있었다.

무한정부가 북벌을 시작할 때 의창(宜昌)수비를 맡았던 하두인(夏斗寅)이 북벌군이 무한을 떠난 기회를 빌어 사천군벌 양삼(杨森)과 결탁하여 무한으로 공격《왔다. 하두인은 토지문제를 둘러싼 계급모순을 극대화하여 공산당과 농민운동을 타매하면서 국공합작을 주장하는 무한정부를 반대하였다. 반란군은 신속히 정사교(汀泗桥)를 점령하고 월한철도(粤汉铁路)를 차단하였다. 뿐만 아니라 반란군은 한구의 주둔군과 결탁하여 공동으로 공산당을 반대하기로 계획했다.

(권립 교수) 《150여명 조선족혁명가들은 무한으로 이전하여 무한군정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런데 5월 17일 호남군벌 하두인과 양삼이 결탁하여 무한을 대거 진공하였습니다. 이때 무한군정학교의 4000여명 학원들은 중앙독립사로 편성되여 엽정장군의 지휘하에 무한보위전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무한수비를 맡은 혁명군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한구(汉口) 수비를 맡은 제8군 군장 리품선(李品仙)은 로동자규찰대의 지휘권을 찬탈하려 했으며 장강을 봉쇄하고 무한 3진의 래왕을 두절시켰다. 위기일발의 시각 공산당은 무창(武昌)의 로동자, 농민, 학생들을 동원해 토벌시위를 전개함과 동시에 군대를 모집해 토벌을 평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무창수비사령을 맡은 엽정부대와 중앙군사정치학교 4000여명 학원들을 동원해 편성한 중앙독립사(中央独立师)를 전투에 내세웠다. 엽정부대에는 북벌에 참가했던 150여명 조선장병들로 무어진 정규부대가 있었고 중앙독립사에도 무한 중앙군사정치학교에서 훈련을 받던 많은 조선혁명가들과 학원들이 있었다.

혁명군은 엽정의 지휘하에 무한남부 지방(纸坊)부근에 수비진을 쳤다. 치렬한 접전을 거쳐 반란군을 물리친후 엽정은 후속부대를 거느리고 토지당(土地堂)부근에서 적 주력을 포위하였다. 반란군이 우세한 병력을 믿고 다시 반격하기 시작하였다. 전투가 더욱 치렬해지자 중앙독립사가 전투에 투입되였다.

그러나 실전경험이 없는 독립사는 적의 반격을 막아낼수 없었다. 엽정은 정규군 한개 영을 보내 독립사를 지원하게 하는 한편 사수할것을 엄명하였다. 이에 큰 고무를 받은 혁명군은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완강하게 싸웠다. 쏘련에서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았고 또 줄곧 엽정을 따라 북벌전쟁을 치러온 박영(박근성朴根星), 박근만(朴根万), 박근수(朴根秀) 세 형제는 다른 조선인 사병들과 함께 영용히 싸웠다.

무한정부 고위관원들이 하두인과 양삼 반란을 제압한 부대를 위문.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용감하게 돌진하는 혁명군앞에서 적들은 드디여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혁명군은 앞다투어 돌진해 적을 소멸하고 토지당을 점령하였다. 300여명 반란군 패잔병들이 도주하였을뿐 주력이 이곳에서 전부 소멸되였다.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조선혁명가 박근만, 박근수 형제는 6월 5일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였다.

(권립 교수) 《조선족혁명가 박영, 박근수, 박근만은 무한 토지묘근처에서 반란군을 물리쳤습니다. 조선족 용사들은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고 무한보위전에서 대공을 세웠습니다. 박근만과 박근수 형제는 용감하고 지혜롭게 잘 싸워 소문이 났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하승교(贺胜桥)에서 무한으로 돌아오던중 답사팀은 토지당전적지를 찾아보았다. 귀청을 째는듯한 총, 포소리가 멎었고 용감하게 돌진하던 조선혁명가들의 함살(喊杀)소리도 멎은지 오래다. 전적지에는 아무것도 없고 모두 밭으로 변해버렸다.

부근에 조금 높은 둔덕이 있었고 거기에 옛날 작은 사당 하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잡초만 무성할뿐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었다. 다만 길가에 작은 도로표식 하나가 있어 거기에 새겨진 “토지당(土地堂)”이란 석자를 보고 토지당 전적지임을 판단할수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하두인의 반란군은 전호를 파고 수비진을 쳤으며 혁명군은 넓은 평지로부터는 적을 포위하고 두려움 없이 싸워 적을 소멸했던것이다. 자랑찬 우리 민족 선렬들이 이 유명한 전투에서 앞장서서 싸웠고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것이다.

토지당전투의 승리로 무한정부는 하두인과 양삼의 반란을 평정하고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였다. 그러나 무한정부 주석인 왕정위를 비롯한 국민당은 계속 반란군을 비호하면서 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동자, 농민운동을 견제하였다.

그리하여 5월 21일 장사에서 군벌 허극상(许克祥)이 마일사변(马日事变)을 일으켰다. 그는 100여명의 공산당원을 살해하고 호남성 총공회와 농회를 봉쇄하였다. 강서에 웅거해있던 주배덕(朱培德)도 경내의 공산당과 로동자, 농민운동 지도자들을 견제하고있었다.

1927년 7월 15일, 왕정위는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하고 공산당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무한국민당중앙 상무위원회 제20차 회의를 소집하고 여러 가지 구실로 공산당과 분리할데 관한 결의를 지었다. 그리고 도처에서 공산당과 로동자, 농민 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탄압하였다. 왕정위는 《천명을 잘못 죽일지언정 한사람도 놓지지 말라(宁可狂杀千个, 不使一人漏网)》는 구호를 내세우고 많은 공산당원들을 학살하였다. 이로써 국공합작은 철저히 파렬되고 중국혁명은 또다시 피못에 잠기게 되였다.

(권립 교수) 《7월 15일에 왕정위는 대학살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북벌전쟁이 실패하고말았습니다. 4000여명이나 되던 중앙독립사는 천여명밖에 남지 않았고 150여명의 조선족용사들은 견정불이하게 엽검영동지의 지휘하에 군관교도단에 참가하여 제2영 5련에 편성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2차 국내혁명전쟁을 맞이하게 되였습니다.》

무한과 남경정부의 합류를 력사에서는 《녕한합류》라 한다.(자료사진)

중국혁명이 실패의 시련을 맞이하고을 때 중국공산당은 7월 비상회의를 소집하였다. 국제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무한정부에서 탈퇴한다고 선포하였다. 7월 12일 중국공산당은 진독수의 우경(右倾) 투항주의로선을 극복하고 새로운 림시중앙 상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장국도, 주은래, 리유한(李维汉), 장태뢰(张太雷), 리립삼(李立三)이 상무위원회 성원으로 되였다.

왕정위가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한후 중국공산당내에서 무력항쟁의 주장이 더욱 고조되였다. 주은래, 장태뢰, 모택동를 비롯한 공산당원들은 국민당의 피비린 탄압에 무력으로 항쟁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로동자, 농민 봉기를 준비하였다.

1927년 장개석, 왕정위가 선후로 혁명을 배반함으로써 중국력사는 제2차국내혁명전쟁시기(1927--1937)에 들어서게 된다. 이 시기는 중국의 광범한 피압박 인민이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 장개석을 대표로 하는 국민당의 반동통치에 맞써 무력항쟁을 전개한 시기이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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