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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7)--광동에서의 투쟁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7.07일 16:22
답사팀은 또 광주로 떠났다.

보슬비가 내리는 광주, 번쩍이는 네온등 불빛은 비속에서도 광주의 번화함을 감추지 못하고 꿈처럼 빛나고있었다. 중국대혁명시기 혁명의 중심지로서의 광주는 커다란 흡인력을 가지고 수많은 혁명지사들을 광주에 모이게 하였다. 당시 중국 민주주의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이 광주에서 군벌타격투쟁을 적극 지도하고있었던것이다. 조선민족 혁명자들도 새로운 독립의 길을 찾아 광주에 모여든것은 지난 세기 20년대였다.

(권립 교수) 《광주는 손중산선생의 혁명활동중심지로서 우리 민족 혁명자들에게는 크나큰 흡인력을 갖고있었습니다. 1917년 손중산은 광주에서 비상국회를 열고 호법군정부를 세우고 북벌을 선포했습니다. 제국주의를 한없이 미워하고 군벌을 한없이 미워한 우리 민족은 북벌전쟁에 크나큰 흥미를 가지고 지대한 관심을 보였을뿐더러 손중산선생을 찾아떠났습니다.》

광주의 황화강렬사릉원.


광주에 도착한 이튿날 답사팀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황화강렬사릉원(黄花岗烈士陵园)이였다. 릉원은 광주시 동북부 백운산(白云山)풍경구이남의 선렬중로(先烈中路)에 위치했는데 지금은 황화강공원이라고 한다.

1911년 4월 27일, 손중산이 령도하는 동맹회(同盟会)는 광주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팔에 흰천을 동인 결사대 100여명이 황흥(黄兴)의 령도하에 청정부 량광총독서(两广总督署)로 돌입했지만 다른 호응이 없었기때문에 실패하고말았다. 도처에서 적이 포위해 오자 봉기자들은 총독서 건물에 불을 지르고 빠져나왔다. 봉기가 실패한후 청정부는 많은 혁명자들을 살해하여 그들의 유체를 거리에 내던졌다.


5월 3일, 동맹회 회원 반달미(潘达微)가 《평민일보(平民日报)》의 기자신분으로 사람들을 조직해 72명 수난자들의 유해를 거두었다. 그들은 피로 얼룩져 알아볼수 없는 시신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이곳에 정중하게 매장하였다. 신해혁명이 승리한후 1912년 사람들은 이곳에 렬사릉원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1919년 화교들의 의연금으로 릉원이 확건되였다.

부지면적이 12만 9000 평방메터인 릉원정문은 십여메터 높은 석패방(石牌坊)으로 되여있었다. 정문에는 손중산이 친필로 쓴 《호기장존(浩气长存)》이란 금빛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정문에서 돌계단을 따라 300여메터 가노라면 렬사묘비가 있고 그 뒤에는 기공방(纪功坊)이 있었다. 기공방은 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큰 돌 72개를 금자탑모양으로 쌓고 그우에 자유녀신상을 조각해 만들었다. 봉건제도를 뒤엎고 자유를 찾기 위한 투쟁에서 72명 렬사들은 두려움 없이 싸웠으며 그들의 과감한 혁명정신은 중국인민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무창의 무창봉기군정부 옛터


황화강렬사들의 투쟁은 신해혁명의 도화선이였다. 렬사들의 투쟁에 크게 고무를 받은 중국인민은 손중산을 따라 무창을 중심으로 전국 도처에서 봉기를 일으켜 드디여 부패한 만청정부를 뒤엎었다. 그러나 신해혁명후, 중국은 더욱 큰 혼란기를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무창봉기가 일어나자 부패한 만청정부는 당시 군권을 잡고있던 원세개(袁世凯)를 내각총리로 임명하고 무너져가는 봉건정권을 만구하려고 하였다. 원세개는 기세 드높은 전국의 혁명정세에 비추어 혁명자로 위장하고 청조황제를 퇴위시켰다. 그리하여 남경에 설립된 참의원은 원세개를 대총통(大总统)으로 선정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야망에 찬 원세개는 혁명성과를 절취한후 즉각 국회를 해산시키고 《중화민국 림시약법(中华民国临时约法)》을 페지했을뿐만 아니라 매국적인 《21개 조약》을 일본과 체결하면서 부단히 자기 세력을 확충하였다. 비밀리에 국권을 팔아 자기 세력을 확충하던 원세개는 드디여 봉건제도를 다시 회복하고 스스로 황위에 등극하게까지 되였다.


그러자 원세개를 토벌하는 투쟁이 시작되였다. 운남 도독 채악(蔡锷)은 운남에서 군사를 일으켜 귀주, 광서, 광동, 절강 등지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거듭되는 실패로 하여 1916년 3월, 원세개는 퇴위를 선포하고 그해 6월 6일 울화증으로 죽었다. 원세개가 죽은 뒤 두목을 잃은 방대한 북양군벌들은 각자 자기 세력을 확충하기에 급급했고 서로 끊임없는 권력쟁탈을 진행함으로써 인민들을 다시 도탄속에 밀어넣었다.

북양군벌가운데서 세력이 비교적 큰 군벌들로는 직계(直系)군벌 풍국장(冯国璋)과 조곤(曹锟), 환계(皖系)군벌 단기서(段祺瑞), 봉계(奉系)군벌 장작림(张作霖), 진계(晋系)군벌 염석산(阎锡山)이 있었고 운남의 당계요(唐继尧), 광서의 륙영정(陆荣廷)의 세력도 막강하였다. 이들은 영국,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을 등에 업고 국권을 팔고 인민을 수탈하면서 저들의 세력확장에 여념이 없었다. 

1917년 북평의 중앙정권을 잡은 환계군벌 단기서 역시 손중산의 《림시약법》을 페지하였다. 이에 손중산은 《림시약법》을 보위하고 민주혁명의 성과를 되찾기 위한 호법운동(护法运动)을 호소하고 호법군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남방 각지의 군벌들도 서로 자체의 리익관계로 분렬되면서 호법운동도 성공하지 못했다. 호법운동이 실패한후 손중산은 새로운 혁명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거듭되는 실패를 겪은 그는 새로운 혁명군대가 있어야 함을 절박하게 인식하게 되였고 혁명을 지도할 더욱 유력한 당조직을 만들어야 함을 깨닫게 되였다.


광주시 해방로(解放路)를 따나 북에서 남으로 가노라면 월수공원(越秀公园), 중산기념당(中山纪念堂), 인민공원(人民公园)이 차례로 나타난다. 그 가운데서 중산기념당은 중국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선생을 기리기 위해 축조되였다. 답사팀이 탄 차가 기념당 정문에 들어섰을 때 손중산선생이 친필로 쓴 《천하위공(天下为公)》이라는 글발이 새겨진 커다란 편액이 정문에 걸려있는것이 보였다. 《추호의 사심도 없이 모든것을 백성을 위한다》는 글뜻에서 혁명선구자 손중산선생의 드넓은 흉금을 느낄수 있었다. 기념당은 거대한 극장으로 되여있었다. 록화가 잘된 기념당정원 정면에는 거대한 손중산동상이 있었다.

광동성의 중점문화재인 중산기념당은 광주시민과 해외 화교들이 손중산을 기념하기 위해 돈을 모아 축조한것이다. 기념당은 손중산선생이 일찍 사용했던 총통부 옛터에 축조되였는데 중국 유명한 건축설계사 려언직(吕彦直)선생이 설계했고 1929년에 착공하여 1931년에 준공되였다. 중산기념당은 화려한 팔각형건물로서 외형은 장엄하고 웅위로와보였고 푸른 기와로 된 지붕은 민족특색이 짙어보였다. 실내는 3238개 좌석이 배치된 거대한 공연장이였는데 회의장소로도 사용되였다.

해방후 정부에서는 1988년까지 7차례에 걸쳐 자금을 투입해 건물을 수건하였다. 그리하여 정원은 6헥타르로 확대되였고 70여년이 넘는 극장건물도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될수 있었다. 지금 이곳은 광주시의 주요 관광지의 하나로 되여 국내외의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들고있다. 


이 시기 중국공산당중앙은 시국에 대한 주장을 발표하고 손중산의 혁명을 적극 동조하였다. 1921년 12월, 국제공산당 대표 마린은 리대소의 소개로 계림에서 손중산을 만났다. 그는 국제공산당을 대표하여 더욱 광범한 로농대중과 단결하고 혁명무장의 핵심으로 될수 있는 군관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두가지 건의를 제기하였다.

그후 리대소는 상해에서 여러차례 손중산을 만나 침식을 잊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중국공산당에서는 또 수많은 당원들을 직접 광주에 파견해 혁명활동에 종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광주는 중국신민주주의 혁명중심지로 되였고 수많은 조선혁명자들도 광주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권립 교수) 《한편 광주에 있던 우리 민족 항일인사들은 1921년 9월 광주거주 한인한고향회를 건립하고 서로 돕고 아끼면서 반일투쟁의 방향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광주에 있던 우리 민족 반일인사들은 형제민족과 손잡고 광주중한협회까지 건립했습니다. 협회회원은 초기에 70여명, 한달후에는 수백명으로 증가했습니다. 광주의 많은 군정간부들과 지명인사들이 이에 참가하여 우리 민족의 해방투쟁을 지지해나섰습니다.》


손중산과 호법군정부는 조선민족의 독립을 적극 지지했을뿐만 아니라 상해림시정부의 요인들과도 두터운 친분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신정, 려운형, 려운홍, 박은식 등이 선후로 군정부를 방문하였으며 동맹회 회원이였던 신정은 림시정부의 특사신분으로 호법군정부와 교섭하기도 하였다. 손중산을 만난 신정은 림시정부 승인문제, 조선청년 교육문제와 관련해 합의를 보고 유력한 지원을 받았다.

신정은 또 박태화(朴太和)를 비롯한 십여명 림시정부 관원들을 광주에 파견했다. 이들은 광동성 각계의 도움을 받으면서 박태화를 회장으로 하는 류월한인회(留粤韩人会)를 조직하였다. 류월한인회는 광주의 조선이주민들을 도와주는 한편 혁명가들을 단합시켰다. 그후 류월한인회가 주도로 되여 중국과 조선 지명인사들이 광동도서관에 모여 《중한협회(中韩协会)》를 건립했다. 손중산이 이끄는 호법정부의 많은 의원들과 관원들이 중한협회에 참가해 두 나라 혁명투쟁을 공동히 진행하기로 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朝鲜总督府警务局)의 자료를 보면 20세기초 광동에는 500여명 조선 이주민들이 살고있었다. 그 가운데 광주에만 300명이 있었는데 남성 80명에 녀성 220명으로 집계되여있었다.


20년대에 들어서서 이주민뿐만 아니라 많은 혁명자들이 광주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1925년, 광주에 조선혁명자들이 60여명이 활동하고있었고 1927년에는 급증하여 800여명이나 되였다. 이들 가운데는 동북에서 군사기능을 배우고 유격전을 전개하던 독립군 400여명이 있었고 로씨야에서 다년간 투쟁해오던 100여명 조선혁명자들이 포함되였다.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포병, 기관총 기술을 배우고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은후 국제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온 조선인 군사간부 30여명도 포함되여있었다. 이들은 쏘련 고문단과 함께 와서 중국 각계 요인들과 련계를 달아주고 통역을 하기도 했다. 이밖에 조선과 일본에서 건너온 애국자 100여명, 동북공산청년동맹 성원 70여명도 있었다.

도처에서 총과 폭탄으로 일제요인들을 사살하던 의렬단도 이시기 광주로 본거를 옮겨오기 시작한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를 주장하던 의렬단은 민중에 의지할 힘을 찾아야 했던것이다. 여러차례의 의거가 있었지만 일반인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상황이 나타나자 의렬투쟁도 새로운 방략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하여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의렬단성원들이 조직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광주에 모여왔다.

광주에 모여온 이러한 조선청년들은 거의 다 지식인으로서 애국자일뿐만 아니라 정치활동가들이였다. 이들은 대부분 국내외에 흩어져 분산적으로 활동하고 투쟁해왔기때문에 투쟁경력이 달랐고 정치견해도 같지 않았다. 공산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민족주의자도 있었고 무정부주의자도 있었으며 관망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가 중국혁명에 동조하면서 새로운 독립투쟁의 길을 찾았고 중국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조선독립투쟁의 성공을 이끌어낼 공동한 꿈을 지니고있었던것이다.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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