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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5)--단재 신채호의 북경 유적지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7.05일 08:41

단재선생의 며느리 리덕남녀사와 함께 단재선생이 북경에서 활동했던 유적지를 찾아 답사하였다.보타암에서 한동안 생활하던 신채호선생은 후에 선후하여 지금 북경시 백탑사(白塔寺) 이남의 금십방가(锦什坊街) 21호와 초두호동(炒豆胡同)에서 생활하였고 동린각로(佟麟阁路) 서쪽에 위치한 석등암(石灯庵) 부근에도 거주하였다.

석등암 사원은 지금도 어렴풋이 그 모습을 보아낼수 있었다. 동린각로를 따라 서쪽으로 한동안 가노라면 5,6층 되는 주민아파트 몇채가 둘러있는 사이에 많은 단층집들이 촘촘이 있었다. 단층집가운데 건물은 전통적인 중국식 4합원(四合院) 구조로 되였고 규모가 매우 컸다. 그리고 꽃무늬를 새겨놓은 기와라든가 각가지 조각을 한 처마, 담벽을 보아서 이곳이 분명 사원자리임이 틀림없었다. 지금은 여러 주민호들이 촘촘이 비집고 들어와 함께 살기때문에 사원의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현지 가두주임이 기자들을 열심히 맞아주면서 부근에 살고있는 70세 동(董)씨 할머니 한분을 소개해주었다. 그 로인은 어렸을적에 이곳에서 살았고 60년대는 석등암의 비구니로 있었다고 가두주임이 소개해주었다.

여기가 석등암사원이 있던 곳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수십년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사원의 주건물과 담이 조금 남아있어 찾아볼수 있습니다.


동씨로인의 말에서 분명 이곳이 석등암 옛터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석등암의 규모나 더 상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사당의 비구니로 있었다는 가두주임의 소개가 맞다면 동씨할머니는 분명 가장 유력한 증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었던 탓으로 많이 소심해졌는지 로인은 분명한 경력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60년대 중국의 문화대혁명시기 석등암 건물마저 많이 파괴되여버린 상황이니 사람의 피해야 더 컸을것이다. 갖은 정신적 세파를 겪었기때문에 지금도 동씨로인은 그 한단락의 력사를 감추려고 애쓰는것이라고 판단되였다.


북경에서 본격적인 독립활동에 종사하던 신채호는 1919년 상해 림시정부 수립을 위해 상해에 가게 된다. 그러나 상해 림시정부는 미국에 위임통치를 건의한 리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 이를 단호히 반대하였다.


회의에서 자기의 주장을 스스럼 없이 피력하던 신채호는 더는 참을수 없어 회의장을 박차고 나섰다. 그런데 문어귀에 몇몇 청년들이 그를 막아나섰다.


청년들: 《안됩니다. 정부조직이 이룩되기까지는 누구도 이 자리를 못 떠납니다.》


신채호: 《우리에게 남은것이 이제 무엇이 있느냐? 대의밖에 더 있느냐? 민족적 대의가 이를 절대 용납할수 없다. 비켜라!》


청년들: 《안됩니다. 제발 여기를 못 떠납니다.》


신채호: 《그럼 차라리 나를 죽여라!》


신채호: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리승만은 리완용이나 송병준보다도 더 큰 역적이다. 리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리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전에 팔아먹으려 하지 않느냐! 그런데도 그를 우리의 대표라 할수 있단 말이냐?》


그러나 일은 단재 신채호의 뜻과 반대로 성사되여갔다. 회의를 박차고 나온 그는 상해 림시정부와 결별하고 림시정부를 반대하는 창조파의 선두에 나선다. 드디어 그는 북경에 돌아와 무장항쟁을 주도하는 군사통일주비회의 소집을 위해 노력하였고 또 1919년 중국 길림시에서 창립된 의렬단과 긴밀한 련계를 가지고 드디여 의렬단의 선언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게 된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서 보여진 절대독립론은 자치론을 철저히 분쇄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干会)의 로선을 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단재 신채호의 무장투쟁론과 민족혁명론은 만악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폭력과 폭동을 비롯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이 정당함을 시사하였다. 이는 사회주의혁명자들뿐만 아니라 의렬단이나 김구가 이끄는 상해 림시정부까지도 합리하고도 정당한 폭력수단으로 받아들였던것이다.


1920년후에 신채호선생은 관음사(观音寺)에 한동안 출가해있은 경력이 있다. 이날 오후 답사팀은 관음사를 찾아떠났다. 관음사는 북경시 북신교(北新桥) 부근의 전영강(前永康) 2항(巷)에 있었다는 기재가 있다. 현재 그곳에는 사당은 없고 좁은 골목길에 높은 담을 쌓은 민가들만이 늘어서있을뿐이다. 부근에 옛날 사당자리 같은 낡은 건물이 보였지만 지금은 고적(古籍)도서관으로 사용되고있었다. 현지인들은 이 건물은 옛날 백림사(柏林寺)의 일부 사당이 남아내려온것이라고 했다.

당시 단재 신채호는 몹시 빈곤하게 생활하였다. 독립운동 방략과 방법에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있었고 민족의 미래에 비관에 잠겨있었다. 오직 무장항쟁의 길만이 정확하다고 주장해오던 단재 신채호는 기타 타협론자들과 외교론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게다가 극심한 생활난까지 겪게 되였던것이다.


하여 그는 처자들을 떠나보내고 자신은 관음사에 몸을 담고 승려로 된다. 이 한 단락의 력사를 두고 일부 사람들은 그가 독립운동에 절망하고 한시기 방황했기때문에 출가하였다고 지적하고있다. 하지만 1920년대 신채호의 투쟁행적을 살펴보면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라는것을 쉽게 알수 있다.

단재 신채호는 이 시기 비록 관음사에 몸을 담고있었지만 민족력사와 투쟁리론 저술에 더 없는 성과를 이룩해냈던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렬단을 비롯해 북경지역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계속 련계를 가지고 또 독립군 자금을 모아 더욱 큰 항쟁을 준비하기 위해 비밀리에 활동했던것을 보아도 그의 출가는 독립운동에 실망한 선택이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는 예리한 필봉을 무기로 새로운 항쟁을 준비하기 위해 관음사에 잠시 몸을 담고있었을 뿐이였다.


1920년대말 단재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로 활약하게 된다. 1926년 그는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 련맹에 가입하고 1927년에는 중국, 조선, 일본, 대만 등 여러 나라 대표 120명이 참가한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의 조선대표로 참가하며 1928년 4월에는 직접 무정부주의 동방련맹 북경회의를 개최한다. 이해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운동의 활동경비를 모으기 위해 위험한 길에 나서게 된다. 그는 안해 박자혜와 아들 신수범을 불러 얼굴을 본 다음 길을 떠났다.


(권립 교수) 《1928년에 이르러 선생은 반일자금을 모으러 떠났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그는 십년도형에 떨어져 려순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일제의 그 어떤 취조와 혹형앞에서도 언제나 떳떳하고 태연자약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이 일제의 압박과 수탈이 없는 자유로동사회를 건설하는것이라고 높이 웨쳤습니다. 그는 우리 동포들의 해방을 위해 취하는 일체 수단은 모두가 정당한것이라고 일제놈들앞에서 웨치고 또 웨쳤습니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소요되는 자금을 모으는 방법이란 외국 위조지페를 만드는것이였다. 그들은 이로써 폭탄 제조소를 설치하려 했던것이다. 신채호는 중국인 류병택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위페를 교환하려 했으나 놈들에게 발각되여 대만 기륭항에서 체포되고만다. 일제 옥중에서 적들과 과감히 맞써 싸우던 그는 2년후 10년 징역으로 판결받고 려순감옥으로 이송된다.

(권립 교수) 《감옥에서 그의 몸이 형편없이 쇠약해지자 한 친척이 보석하려 했지만 그 친척이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단연히 거절했습니다. 그는 1936년 2월에 56세를 일기로 옥사했습니다.》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리유로 가석방을 완강히 거부한 단재 신채호는 1936년 2월 21일 뇌익혈로 옥중에서 빛나는 한생을 마쳤다.


북경에서 신채호선생의 활동지점들을 답사하고난 후 리덕남녀사는 중국의 성인 공자를 모신 국자감(国子监)이 부근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쪽에 가보련다고 했다.

고요한 국자감 공자의 동상을 바라보며 리덕남녀사는 깊은 사색에 잠기는것 같았다. 공자는 중국의 성인으로 이처럼 사람들의 공대를 받고있는데 독립운동의 영웅인 단재 신채호선생은 무엇때문에 그처럼 불공정한 대우를 받아야만 했던가?

시원한 가을바람에 고목이 가지를 흔드는 조용한 정원에서 리덕남녀사는 신채호선생의 유가족이야기를 하였다.


광복후 한국 리승만 정권하에서 신채호의 이름이 불리워지는것이 금기시되였고 그의 유가족도 많은 압박과 피해를 받았다. 아들 신수범(1921--1991년)은 갖은 고생을 겪다가 20여세 년하인 리덕남녀사과 가정을 이루지만 일단 아버지의 일은 비밀에 부치고 살았다. 리덕남녀사는 남편의 행적이 하도 수상하여 남편이 《첩자》인줄로 알고 경찰에 고발하려고까지 하였던것이다. 신수범은 이런 안해에게 모든것을 털어놓고 저명 인사들을 찾아 아버지의 사적을 이야기해주었고 민족해방에 대한 그의 기여를 설명해주었다. 그때로부터 리덕남녀사는 시아버지 신채호의 위대한 업적을 인식하고 남편과 함께 아버지의 유적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던것이다.

단지 신채호의 유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수십년간 온갖 고생을 할대로 다하던 신수범씨는 1991년 병으로 사망하고 리덕남녀사만이 계속 신채호의 기념활동을 위해 힘쓰고있다. 리덕남녀사는 《사람은 더 없이 천할수도 있고 더 없이 청정하고 위대할수 있다》고 감회깊은 이야기를 했다.


《내 죽거든 내 시체가 왜놈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재를 바다에 띄워달라》,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죽는 순간까지 일제와 굴함없이 싸웠던 단재 신채호는 이러한 유언을 남기고 일제 감옥에서 옥사하니 나라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보지 못한 그는 정녕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것이다. 압박자들과 굴함없이 싸웠던 단재 신채호선생의 빛나는 삶과 그의 고귀하고 청정한 마음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해질것이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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