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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14] 부녀퇀 기관총명사수 주신옥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6.12일 13:20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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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례없이 간고했던 동북항일무장투쟁시기 북만의 항일련군 제5군엔 녀전사들로 무어진 부녀퇀이 활동하고있었다. 부녀퇀의 대부분 전사들은 동만의 2군에서 넘어간 조선족녀전사들인데 기관총명사수로 이름높은 주신옥(朱信玉, 1913ㅡ1940)도 그 가운데의 한사람이다.

광복후 장시기에 걸쳐 사람들은 주신옥이 어디 사람이라는 것을 시종 알지 못하였다. 지난 세기 80년대초 필자는 주신옥이 훈춘현 밀강사람이라는 단서를 쥐고 훈춘시민정국에 가서 렬사자료를 뒤져서야 그의 생애의 전반 부분을 헤아리게 되였다.

렬사자료에 의하면 주신옥은 1913년생으로서 훈춘현 밀강향 중강자사람이다. 보통키에 실팍한 편이라 한다. 생활은 째지게 가난, 그래서 《9.18》사변전에 벌써 출가해야만 하였다. 그의 친정집이라야 어머니와 오빠, 올케 세 식구밖에 없었는데 어머니는 1931년 9.18사변전후 일제토벌에 희생되고 오빠도 일본놈들에게 체포되였다. 후에 놓여나오긴 했으나 재차 체포되여 희생되고 올케는 재가하고 말았다.

친정집은 이렇게 파탄되였다. 혁명자인 주신옥의 남편도 《9.18》사변시기 일제토벌에 희생되다보니 주신옥은 의지가지할데 없는 혈혈단신으로 되였다.

하지만 주신옥의 혁명열성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그는 1932년에 입단하고 1934년에 입당했으며 훈춘현유격대의 녀전사로 되였다. 1934년 봄 이 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4퇀으로 개편되자 그는 4퇀 퇀부 작식대원으로 활약하였다. 1935년 겨울 동만의 항일근거지들을 해산하고 남북만의 광활한 지역에 진출할 때 주신옥은 부대를 따라 북만에 진출하였다. 5군에 녀전사들이 수요되자 2군 5사에서는 주신옥, 최순선 등 한패의 조선족녀전사들을 5군에 파견하였다.

이때가 1936년초로 헤아려진다. 이해 봄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과 제5군은 동북항일련군 제2군과 제5군으로 개편되고 제5군내에 부녀퇀을 두었다. 주신옥 등은 부녀퇀의 첫 조선족녀전사로 되여 1936년 봄과 여름 녕안일대에서 맹활동하였다. 이해 여름 제5군 군부는 녕안을 떠나 목릉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부녀퇀도 군부를 따라 움직이였는데 그때 녀전사라야 10여명에 불과하였다. 책임자는 왕옥환이고 그외는 모두가 2군에서 넘어간 조선족녀전사들이였다.

1936년 가을에 5군부대는 림구현의 목단강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부대의 활동지는 목단강반의 삼도통이였다. 목단강을 사이두고 강동쪽은 위만군 주둔지인데 때때로 강을 건너와 우리 부대를 교란하였다. 그때마다 주신옥 등 부녀퇀의 조선족녀전사들이 앞장서 함화공작을 들이댔다. 함화공작과 함께 항일가요도 부르고 정치선전을 드세게 내밀었다. 위만군은 처음에는 욕설을 퍼붓다가 점차 목소리를 낮추었다. 포로를 돌려보내거나 부대야회에도 참가시키니 그들은 심히 감동되였다.

함화―정치선전공작이 은을 냈다. 위만군이 다시는 집적거리지 않은데서 우리 부대는 강 이쪽에서 시름놓고 군중선전사업에 나설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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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앞두고 부녀퇀은 청년의용군과 함께 대반도저격전에 참가하였다. 주신옥은 날듯이 기뻤다. 그러나 군부의 안전을 보위하고 도망치는 적이나 답새기거나 싸움터수습뿐이여서 주신옥은 통쾌히 싸워볼수 없었다. 대반도저격전후 수차의 전투가 있긴 하였으나 주신옥이 손을 펼 기회는 없었다. 주신옥 소속 부녀퇀은 명령을 받고 청년의용군과 함께 밤낮 하루동안에 눈덮인 180리 산길을 조여 후방밀영으로 가야 하였다. 5군의 후방밀영은 목단강 동쪽, 의란현 동부 깊은 산속에 위치하고있었다.

밀영은 삽시에 기쁨으로 부글부글 끓었다. 밀영에 남았던 약간명 부상병들과 부녀퇀전사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여났다. 이튿날 병원설치계획이 무르익었다. 밀영의 안전을 위해 나무를 먼곳에 가서 베여야 했다. 며칠후 아침 주신옥과 부녀퇀의 녀전사들은 청년의용군전사들의 배동하에 톱과 도끼를 들고 10여 리밖 송림속에 가서 나무를 베내였다.

첫날 주신옥은 걸싸게 해냈다. 수십대의 홍송(잣나무)이 넘어졌다. 매 한그루의 홍송이 넘어질때마다 주신옥 등 조선족 녀전사들은 잣송이를 주어모았다. 저녁에 송이를 들추니 잣이 대여섯근은 실히 되였다. 등불곁에 둘러앉아 부상병들과 같이 잣을 까먹는 재미 또한 별재미였다. 그들은 전선의 소식, 10월혁명, 사회주의 래일 등을 주고받으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백명은 푼히 용납할수 있는 후방병원이 일떠선것은 그로부터 며칠후, 그들은 또 재봉대건설에 나섰다. 날이 따뜻해질 때 5군의 전사들이 전부가 새 군복을 떨쳐입도록 힘써야 한다니 그 임무가 자못 중하였다.

때는 1937년 2월경이다. 재봉대가 꾸려지자 부녀퇀의 전사들은 3명이 륜번으로 재봉기 한대를 밤낮으로 다루었다. 한 전사가 재봉기를 돌릴 때면 다른 두 전사는 산비탈에 앉아 부지런히 군복 단추구멍을 내는 일을 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천이 거덜이 났다. 그사이 그들은 지은 군복을 몇리 떨어진 밀영의 초소에 날라갔다. 며칠후 새천이 재봉대에 이르자 주신옥 등은 또 일손을 부지런히 다그쳤다.

어느날 후방병원에 한패의 부상병들이 들이닥쳤다. 주신옥 등 10여명 녀전사들은 그들을 위문하는 한편 그들의 이불과 요, 의복을 내물에 가져다 말끔히 빨고 기워주었고 병원안팎도 깨끗이 거두어놓았다.

저녁에 후방병원 문앞에 우등불을 피우고 련환모임을 가지였다. 즐거운 노래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주신옥과 최순선 등 조선족녀전사들은 우등불을 에워싸고 흥겹게 조선족춤을 추었다. 밀영의 밤은 환락의 분위기에 잠겨 점점 깊어갔다.

1936년에 이은 1937년은 항일련군 제5군의 말하면 절호의 황금기로 알려진다. 1937년 초이후 주신옥 소속 5군 부녀퇀은 시초의 10여명 조선족녀전사들로부터 300여명의 대오를 가진 무장력량으로 급장성하였다. 부녀퇀 퇀장은 목단강출신의 중국인 왕옥환(후일 최용건장군의 부인)이고 퇀아래에 3개 전문대를 두게 되였다. 왕옥환, 주신옥, 편련화(片莲花)가 각기 3개대 대장을 맡았는데 주신옥은 부녀퇀 제2대(대대급) 대장이였다. 왕일지(王一知), 리지웅(李志雄), 랭운(冷云) 등이 선후로 지도원으로 나섰다.



주신옥렬사의 고향 훈춘시 밀강향 중강자(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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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영에 1937년 무더운 여름이 왔다. 7월 10일경 삼도통강변에 가서 우리 부대에 의거하는 위만군 삼림경찰대를 맞이하라는 군부의 지시가 부녀퇀에 전해졌다. 부녀퇀의 녀전사 서운경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경찰대는 700여명에 달하는데 대장 리문빈의 령솔하에 7, 8명 일본교관을 죽이고 의거하는 판이였다. 경찰대의 실제인원은 150여명으로 헤아려졌다.

이튿날 아침 주신옥 소속 부녀퇀은 군복을 가뜬히 차려입고 새 군모를 쓰고 밀영을 떠났다. 어스름이 깃들 무렵 부녀퇀은 삼도통부근에 이르렀다. 군부의 부관과 청년의용군의 꼬마들이 마중나왔다. 새로온 자매들도 뛰여왔다.

7월 12일 점심직전에 리문빈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왔다. 5군 군장 주보중이 직접 마중나갔다. 강안은 환영나간 부대와 군중들로 꽉 찼다.

5군 군부에서는 부녀퇀에 의거가족 50ㅡ60명을 맞이하라고 지시하였다. 의거가족은 우리쪽이 산골인것을 보고 배에서 내리기 싫어했다. 주신옥 등 조선족녀전사들은 전우들과 함께 나가서 설복하였다. 의거가족들이 삼도통에 배치된후 주신옥 등 녀전사들이 여러 모로 살뜰히 대해주었다. 처음 의거가족들을 정서파동이 커서 울며불며 야단질이더니 부녀퇀전사들의 끈질긴 감화밑에 차차 정서가 안정되여갔다.

부녀퇀은 군부의 명령에 좇아 새 전사들을 이끌고 다시 밀영에 들어가 솜옷을 지었다. 안전문제로 아이를 가진 가족들도 밀영에 들어갔다. 부대가 늘어남에 따라 밤낮으로 재봉기를 돌려도 공급이 딸리는 형편이였다. 군부에서 새 전사를 보충해주어도 일손은 모자라기만 하였다.

그러던 하루 류영 등 의거가족 10여명이 밀영에 찾아오더니 돌아가지 않고 부녀퇀전사들과 함께 싸우겠다고 청들었다. 이때 중국인전우들이 동을 달았다.

《응당 그래야지요. 어떤 조선족녀성들은 아이를 가진 몸이지만 부대를 따라 원쑤를 족치고 있답니다.》

《앞으로 우리도 꼭 동무들처럼 싸우겠어요.》

류영 등 의거가족들은 크게 감동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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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군 부녀퇀의 녀전사들은 평소 선전대, 재봉대, 간호대, 정찰대 일들에 충실하지만 유사시에는 전투대로 되여 남자들과 더불어 하나 또 하나의 전투들에 참가하게 된다. 주신옥 소속 부녀퇀은 5군에서 벌린 이름난 전투들인 의란현성진공전(攻打依兰县城战斗), 전조령툰야습전(夜袭前刁翎屯战斗), 대반도매복전(大盘道伏击战斗), 희샤즈요저격전(黑瞎子窑截击战斗)에서 용맹을 떨치였다. 부녀퇀으로 말해 그중 의란현 경내 희샤즈요저격전이 대표적인 전투가 아닌가 싶다.

1937년 5월 초, 당지 반일구국회의 동지들과 정찰원들이 왜놈의 정탐 몇놈을 잡아왔다. 그들의 입에서 이 이틀사이에 벌리현의 왜놈들이 이 일대를 토벌하게 된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5군부대는 만단의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5월 4일 점심에 동북쪽 수림속에서 과연 총소리가 들려왔다. 군부에서는 부녀퇀더러 포병련을 따라 남산으로 전이하라고 명령하였다.

《또 전이하라는 명령이야?!》

부녀퇀의 녀전사들은 대뜸 뽀로통해졌다. 남산으로 움직일 때 자지러운 총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남산아래서 300여명의 왜놈을 박아실은 10여대의 트럭이 나타났다. 주신옥 등 부녀퇀녀전사들은 걸음을 멈추고 왕옥환대장을 바라보았다. 그 뜻은 불보듯 뻔했다. 왕옥환은 군부를 찾았다. 군부수장은 드디여 머리를 끄떡였다.

시침은 정오 12시를 가리키고있었다. 적들의 군용트럭이 아군의 지뢰매설구에 들어서자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삽시간에 적군의 트럭 6대가 아군의 지뢰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포병련의 포탄이 연해연방 나머지 적군트럭을 들부시기 시작하였다. 이어 부녀퇀녀전사들도 멸적의 총탄을 퍼부었다. 전군에 이름난 기관총수 주신옥은 백발백중이였다. 그의 기관총 울부짖음속에서 적들은 삼대쓰러지듯 무리로 쓰려졌다.

뜻밖의 지뢰폭발, 포격, 사격에 적들은 혼비백산했다. 대부분 적들이 죽어번드러졌거나 부상 입고 넘어갔다. 살아남은 적들은 음페물을 찾아 죽기내기로 반격하였다. 이때 우리의 한 기병련과 부분적 청년의용군전사들이 짓쳐왔다. 이때를 타서 주신옥 등 부녀퇀의 전사들은 산아래로 달아가 적들을 무찔렀다.

전투는 네시간에 걸쳐 결속되였다. 적들은 250여명이 죽어버리고 20여명이 포로되였다. 적 자동차 10여대 전부가 파괴되지 않으면 무용지물로 되여버렸다. 총과 탄약 등 전리품은 기수부지였다. 통쾌한 전투였다. 부녀퇀의 전사들이 전투에서 위풍을 떨쳐보기는 처음이다. 주신옥은 이 전투에서 백발백중의 기관총사수로 크게 이름을 떨치였다.

1937년 가을 일제놈들은 추기대토벌에 나서면서 항일련군 제5군 등 우리 항일부대를 일거에 소멸하려고 날뛰였다. 9월에 주신옥 소속 부녀퇀은 5군군부를 따라 목단강 좌안의 사도하자(四道河子) 후방밀영으로 전이하였다. 9월 29일, 이곳 사도하자 후방밀영에서 중공길동성위 상무위원회 사업회의가 열리고 항일련군 제4군과 5군, 7군, 8군, 10군을 망라한 제2로군을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제2로군 총지휘는 주보중 5군 군장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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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위회의후 부녀퇀의 제1대와 3대는 5군의 여러 부대들에 귀속되고 부녀퇀 퇀장 왕옥환과 주신옥이 이끄는 제2대는 장진화(张镇华)사장의 기병사를 따라 보청(宝清)일대에로의 원정길에 나서게 되였다. 제2대에는 조선족녀전사 주신옥과 최순선 그리고 진옥화(陈玉华), 류영 등이 주요녀전사로 나섰다.

1938년 초이후 북만항일련군 부대들에 대한 일제놈들의 토벌은 갈수록 잦아갔다. 이해 5월과 10월사이 서란과 오상쪽으로의 서정에 참가한 5군부대들의 손실은 너무도 참중하였다. 서정에 참가한 5군 부녀퇀의 제1대와 제2대는 10월하순의 우스훈하 8녀투강전투까지 벌리며 산산쪼각이 났다. 11월에 이르러 적들은 오늘의 림구현 조령지구(刁翎地区)와 목단강 북안지구(北牡丹江沿岸地区)들에서 또 전례 없는 동기대토벌을 벌리였다. 적들의 동기대토벌의 중심은 주보중장군이 이끄는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와 5군 부대였다.

이 시절의 중공길동성위 비서처는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저저마다 손에 총을 잡고 2로군 총지휘부와 함께 행동하게 되였다. 주신옥을 대장으로 하는 5군부녀퇀의 제2대도 2로군 총지휘부와 같이 움직이였다. 성위 비서처와 부녀퇀 제2대에는 조선족녀전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부대동지들과 마찬가지로 배고프면 약간의 콩알을 씹고 목마르면 눈을 움켜먹으면서 두달 남짓한 적들의 동기대토벌을 이겨나갔다.

1939년 1월말, 주신옥 소속 5군 부대는 제2로군 총지휘 주보중장군의 지휘하에 적들의 겹겹한 포위망을 헤치며 조령지구의 대백순골(大百顺沟)에 집결하였다. 대백순골에서 다시 기아와 모진 피로를 이겨내며 결사적인 3주야의 급행군으로 적들의 세번째 봉쇄선을 넘어 류수하자(柳树河子)에 이르렀다. 그들은 계속하여 목단강을 넘고 쟈피거우(夹皮沟)를 거치면서 사도하자(四道河子) 상류지구에 이르러서야 적들의 최후 포위권에서 벗어나 로야령(老爷岭 ) 서쪽으로 진군할수 있었다. 그만치 1939년은 동북항일련군 부대들로 말해 보다 어려운 험난한 시절이였다.

1939년 12월, 5군의 장진화사장은 2로군 총지휘 주보중의 지시에 따라 주신옥이 이끄는 부녀퇀 제2대 등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보청(宝清)의 서부지대에서 활동하면서 목단강연안으로 전이하려 하였다. 부대는 부금(富锦), 화천(桦川) 지구에 이르렀을 때 두차례나 절대적으로 우세한 적의 대부대와 조우하여 상망이 적지 않았다. 1940년 1월 10일 이후에는 보청의 란봉(兰棒)산구에서 또 적들과 두차례의 조우전을 거치면서 주신옥 소속부대는 상망이 절반을 넘어섰다. 련속되는 포위돌파와 전투, 극도의 추위와 기아로 하여 부대는 희생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여 이제 2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부녀퇀 제2대도 주신옥, 최순선, 류영 등 6명이 장진화사장을 따를뿐이였다.

그러나 이들 20여명 항일련군 전사들은 미봉할수 없는 치명적인 화근을 심어놓았다는것을 누구도 모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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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일 이후의 마지막 전투는 자못 치렬하여 한시간 나마 지속되였다. 우리 동지들이 많이 희생되고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할수없이 철거할 때 미처 대오를 따르지 못하고 뒤에 떨어졌던 중국인 녀전사 온숙청(温淑清)이 그만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온숙청은 보청현 경무과로 압송되고 적들의 혹형을 이겨내지 못한 그는 장진화사장의 소부대활동이랑, 탄요와붕 비밀지점이랑 모두 불어대고 말았다. 적들은 인차 탄요와붕 부근에 대량의 병력을 배치하여 우리 소부대의 출현을 기다리고있었다. 하지만 우리 주신옥 소속 소부대는 이를 알리가 없었다.

북만의 엄동은 혹독하게도 매서웠다. 눈보라 칼바람은 살을 에이는듯 견디기가 어렵다. 이토록 혹독한 추위속에서도 누구하나 어렵다는 말 한마디 던지지 않았다. 그속에서 어느덧 1940년 2월을 맞이하니 2월 7일, 주신옥 소속 20여명 소부대는 망망한 림해를 힘겹게 헤치며 우리 내선(内线)이 비상식량을 갖고올 탄요와붕(炭窑窝棚)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탄요와붕에는 숯을 굽는 내선이 보이지 않았다. 아주 미더운 동지인데 일은 뭔가 비틀어지고있었다.

장진화사장이 생각을 굴리는데 갑자기 탄요와붕 주위숲속에 매복하고있던 적들이 총을 쏘아댔다. 총소리에 따라 급기야 적정을 일별하니 적들은 아군의 10여배에 달하는 일제토벌대무리들이였다. 동지들이 즉각 전투태세에 들어갈 때 장진화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였다.

《동지들, 생사결단의 시각입니다. 우리는 적들과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절대 반역자로 되여서는 안됩니다!》

그때 장진화사장의 가장 가까이에는 주신옥 대장이 지켜서고있었다. 그는 《사장동지, 시름놓으세요. 마지막 한사람이 남아도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라고 대답을 주었다. 그러는 주신옥 등 전우들이 그지없이 고마웠다.

숲속에 매복했던 적들이 돌격을 개시하였다. 20여명의 소부대는 적들을 하나 또 하나 쓸어눕히였다. 그러나 전투는 치렬하여 적들은 벌써 세번째 돌격을 들이댔다.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장진화사장이 다리와 어깨, 팔 등에 부상을 입고 우리 동지들도 상망이 늘어갔다. 주신옥 등 6명 녀전사들도 모두가 부상을 당하고 나머지 소부대 전사들은 전부가 희생되거나 흩어졌다. 동지들을 엄호하던 장진화 등 7명은 중과부적으로 적들에게 체포되여 보청현감옥(宝清县监狱)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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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화사장은 반역자가 되지 않고서는 살아날 길이 없다는것을 너무도 똑똑히 알고 6명의 녀전사들과 속셈을 터놓았다.

《반역자가 되는것 외에는 살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전쟁의 고험을 겪으며 혈전의 길을 헤치여온 항일련군전사들입니다. 이번에 우리는 싸움터를 헤치기보다 더 준엄한 고험을 겪게 됩니다. 희생될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자고로 인생 뉘 죽지 않으리오, 붉은 마음 남겨 청사에 빛나리〉(自古人生谁无死,留取丹心照汗青)라는 이 옛시구를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을 앞둔 장진화의 비장한 맘속 말이였다. 《자고로 인생 뉘 죽지 않으리오, 붉은 마음 남겨 청사에 빛나리》 이 명구는 700여년전 남송의 항원명장(抗元名将)이고 애국시인인 문천상(文天祥, 1236-1283)이 광동 해풍 북쪽의 오파령(海丰北的五坡岭)에서 원나라군(元军)에 포로되였을 때 지은 시ㅡ《령정양을 지나면서》(过零丁洋)의 한 구절이다

심히 감동된 주신옥 등 6명 녀전사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사장동지, 시름을 놓으세요. 우리는 서서 죽을지언정 앉아서 살기를 바라지 않을것입니다. 우리는 목숨이 붙어있는한 적들과 끝까지 싸우겠습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일제놈들은 큰 보배라도 얻은듯 기고만장해서 선참 장진화사장을 끌어내다가 혹형을 가하였다. 죽음을 초개같이 여기는 장진화한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적들은 예쁜 의복에 꽃같이 차리고 양복에 가죽구두까지 받쳐신은 반역자 온숙청을 감방에 들여보내 철같은 장진화의 마음을 돌려세우려고 망상하였다. 그때 장진화는 몸에 중상을 입은데다가 혹형까지 받아 자리에서 일어날수도 없는 처지였지만 반역자를 보자 눈에 불이 이글이글 일었다. 그는 초인간적인 의지로 자리에서 번개같이 일어서더니 온숙청을 단발에 문가로 차넘겼다.

적들은 장진화사장한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자 독수를 녀전사들에게 뻗치였다. 주신옥 등 녀전사들이 심문실에 불리워갔다. 걸을 때마다 족쇠와 수쇠가 철컥철컥 무거운 금속성을 내며 감방의 구석구석에 울려 퍼지였다. 적들은 녀전사들을 살살 얼리다가 주신옥의 서리발찬 욕설에 눌리웠다.

《우리 부대가 어디에 있느냐구? 우리 부대는 어디에나 다 있다. 네놈들이 있는 곳에는 우리의 부대가 있다. 우리는 너희들 야수, 살인귀들을 꼭 소멸할 것이다. 똑똑히 알려주마. 중조인민은 만만치 않다. 우리는 혈채를 꼭 받아내고야말 것이다.》

주신옥은 자기의 체구로 전우들을 막아서면서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

《흉수, 야수들아, 네놈들은 실패했다. 네놈들은 우리 중조인민의 항일결심을 꺽을 수 없다. 앞으로 그 어느날, 우리는 네놈들과 이 혈채를 꼭 청산할것이다. 네놈들 끝장이 오라지 않다.》

《네놈들 끝장이 오라지 않다!》

녀전사들이 목소리를 합치였다.

적들은 주신옥, 최순선, 류영, 곽영순 등을 온숙청처럼 손쉽게 꺾을줄 알았지만 첫시작부터 빗나갔다. 한풀 꺽인 적들은 여러 녀전사들중에서 주신옥이 가장 강하게 나온다는것을 보아내고 단독으로 끌어내여 시뻘건 쇠꼬챙이로 지지려고 서둘렀다. 이때 전우들이 주신옥의 앞을 막아나섰다. 그들은 결사적으로 쇠꼬챙이를 빼앗아가지고 놈들한테 달려들었다. 녀자들이라고 만만히 여기고 심문할자 몇몇만 파견한 적들이여서 심문실은 온통 란장판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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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에 돌아온후 주신옥은 전우들의 상처를 조심스레 닦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옳아요. 응당 이렇게 해야 해요.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항일련군전사이며 공산당원이지요. 우리가 만만치 않다는것을 적들이 똑똑히 알게 해야 합니다. 헌데 아직 투쟁이 끝나지 않았어요. 적들이 갖은 술책을 다 꾸며댈수 있으니 경각성을 높이자요.》

그날 오후 적들은 구두에 《협화복》 차림을 한 반역자 온숙청을 녀감방문앞에 내세웠다. 주신옥과 그의 전우들은 두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였다. 자기를 때려죽일듯 노려보는 사람들앞에서 온숙청은 말도 변변히 걸어보지 못하고 비실비실 물러났다.

보청현공서에 다닌다는 일본놈, 공서놈 우두머리들이 심문실에 몰키였다. 곽현장이라는 작자는 오늘오후 모두가 함께 아니라 여섯녀자들을 하나하나씩 심문하여 황군의 무서움을 알게해야 한다면서 곁의 위병더러 주신옥부터 끌어내라고 지시하였다.

주신옥이 끌려오자 곽현장은 온화한척하면서 이름이 뭔가고 물었다. 주신옥이 떳떳히 서서 한마디 대꾸는 하지 않자 이번에는 쏘파에 앉으라고 권하였다. 주신옥은 그래도 요지부동이다. 급줄이 단 산림대 왕대장놈은 말채찍을 휘두르며 《벙어리야, 어느 부대에 있는가고 묻는다》고 호통쳤다. 그 가련한 호통에 주신옥은 랭소로서 대답하였다.

《나한테서 무엇을 더 들을것이 있느냐? 우리 부대는 어디에나 다 있다. 네놈들이 있는 곳에는 우리 부대가 있단 말이다.》

그러자 악이난 왕대장놈은 채찍으로 주신옥의 몸이고 얼굴이고 마구 갈기였다. 주신옥의 얼굴에는 인차 피줄이 일어서고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주신옥은 왕대장놈의 얼굴에 피로 범벅이 된 춤을 내뱉았다. 그때 옆에 있던 일본놈이 벌떡 일어서며 군도를 와락 뽑아 주신옥의 목에 대고 아우성쳤다.

《너 량심이 아주아주 나빠. 죽여 버릴테다.》

주신옥은 낯빛하나 변치않고 놈들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분노가 이글거렸다. 절망한 일본놈은 군도를 도로 칼집에 넣고는 쏘파에 앉아 씩씩거렸다. 위만군중대장이 벌겋게 단 인두를 가지고 들어와 위협을 들이댔다.

《말할테냐, 말하지 않을테냐......》

이자의 말이 채끝나기도 전에 주신옥은 번개같이 인두를 빼앗아 그자를 지지려고 달려들었다. 황겁한 위만군중대장이 권총을 뽑아들자 곽현장은 위병에게 눈짓을 주어 앗아내도록 하였다. 랑패상이 된 위만군중대장은 얼굴이 벌개가지고 문밖으로 달아났다.

응접실은 일대 혼란에 빠지였다. 주신옥은 위병에게 끌려나갔다. 보청현의 적들이 알심들여 고안해낸 유인술은 실패로 돌아갔다. 심문도, 혹형도 실패하고 모든것이 실패하였다. 적들은 뒤늦게야 자기들과 싸우는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깨닫고 철저히 실망하였다.

눈보라가 기승치는 1940년 2월의 어느날 밤중에 적들은 장진화사장을 비밀리에 삼강성특무기관에로 넘기고 주신옥 등 6명 녀전사들을 형장에로 내세웠다. 주신옥 등 6명 항일련군전사들은 손에 손잡고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비장한 심정으로 적기가를 힘있게 불렀다...

적들은 장진화사장한테서 주보중 등 항일련군 주요지도자들의 행적을 알려고 날뛰였지만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다. 1940년 2월 장진화사장은 가목사감옥에서 31세를 일기로 영용히 희생되였다.

2015년 4월 15일, 다시 정리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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