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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의 옛 호수에 일어난 폭파사건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09.06일 15:02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거기에 호수가 있었어요? 물이라곤 없는 데요…” 말이 미처 땅에 떨어지기 바삐 공이 튕기듯 곧바로 건너오는 다른 물음이다.

  분명히 사람들은 일행의 물음이 마치 사막에서 수림을 찾는 것처럼 엽기적이라는 기색을 짓고 있었다. 옛날 심양 시내의 동북부에 큰 호수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 현지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청나라 초기 이 지역에는 인가가 없었고 호수에는 이름마저 없었다고 한다. 호수에는 철이 되면 연꽃이 무더기로 피어나고 향기가 바람을 따라 멀리 날렸다. 구경꾼들은 나중에 버드나무의 가지처럼 가늘고 길게 생긴 이 호수를 그 모양대로 이름을 지어 “유조호(柳條湖)”라고 불렀다고 한다.

  훗날 “화박관련(花泊觀蓮)” 즉 유조호의 연꽃은 성경(盛京, 지금의 심양) 팔경(八景)의 하나로 된다.



1931년 9월 18일 일력장 조각물.

  정작 유조호라고 하는 이 지명이 심양뿐만 아니라 중국 나아가 세계에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호수에 피어난 연꽃 때문이 아니다. 연꽃은 유조호라는 이 지명이 생긴 얼마 후 한 올의 연기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1877년, 청나라는 심양에서 수리작업을 시행했다. 심양 시내 북부에 도랑을 파고 강물을 끌어들여 농경지를 개간했다. 물이 흐르는 도랑이 생기자 물이 고인 호수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유조호라는 이름은 그냥 현지에 지명으로 남는다.

  유조호라는 이 이름이 사람들의 시야에 다시 떠오르는 것은 그로부터 장장 반세기라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때 옛 호수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미스터리”의 폭파사건이 생겼던 것이다.

  사실상 이에 앞서 동북 중부의 장춘 교외에 일어난 “만보산(萬寶山)사건”은 옛 호수가의 이 폭파사건을 미리 예고하고 있었다.

  보물의 산에서 일어난 사건

  아이러니하게도 만보산 역시 산체의 이름을 떠나 늪과 호수가 많은 지역이다. 일찍 청나라 때는 목축민들의 유목지로 이름난 고장이었다.

  1931년, 중국인 학영덕(郝永德)은 만보산 부근 농민 12가구의 땅을 임대한 후 땅 주인과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조선인들에게 조차하여 논으로 개간하게 한다. 조선인 180여명은 물을 가두기 위한 제방을 쌓고 수로를 만들려고 했다. 이 수로공사는 수로 주변의 중국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었다. 중국 농민들과 경찰은 수로공사의 중단을 권고했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조선인들을 이용하여 공사를 강행했다. 7월 1일, 만보산 일대의 중국 농민들이 농기구를 들고 와서 제방을 파괴했다. 이튿날 중국인 농민과 경관 5백명이 다시 현장에 모였지만, 조선인들은 일본 무력을 믿고 공사를 강행하며 7월 11일 물길이 통하게 되었다. 중국측 사료(史料)는 1일과 2일의 충돌에서 일본 경찰이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총을 쏘았으며 중국인 사상자가 수십명 되었다고 밝힌다. 아무튼 이 사건에서 조선인 부상자는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력사박물관에 전시된 14명 장령.웃줄 첫 사람이 양세봉이다.

  사건이 발생한 후 일본은 조선반도의 신문에 조작기사를 실어 사건을 대대적으로 확대 보도했다. 이에 따라 조선반도에서 반중국(反华) 감정이 일어났으며 인천과 서울, 평양 등 지역에서 중국인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본은 중국과 조선 두 나라 농민들의 충돌사건을 리용하여 동북에 병력을 증파, 만주를 무장침략하기 위한 여론 분위기를 만들었던것이다.

  기실 일본은 갑오(甲午)전쟁후부터 동북을 점령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갑오전쟁은 19세기 말 일본이 중국과 조선을 침략한 전쟁으로, 전쟁이 일어난 1894년이 음력으로 갑오의 해이기때문에 불리는 이름이다.

  후날 러시아가 북쪽으로 중국에 침입하여 동북을 그들의 세력범위로 만들자 일본은 러시아와 대전을 벌리며 러시아의 수중에서 동북의 많은 땅을 빼앗는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야심은 단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일찍 1930년 봄, 만주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은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년후 일본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1885~1948) 등은 '유조호사건'을 조작할 구체적 계획을 제정한다. 유조호가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서 행동을 전개하기에 쉽고 또 동북군(东北军)의 주둔지 북대영(北大营)과 근접하기 때문에 쉽사리 동북군과 련관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일본군의 진공에도 편리했다.

  동북군은 그 전신이 봉계(奉系) 군벌 장작림이 통솔한 군대로 봉군(奉军)으로 불렸다. 봉계군벌은 북양군벌의 주요한 파벌로, 그 수령 장작림이 봉천(奉天, 심양의 옛 이름)에서 출생했기때문에 봉계라고 부른다. 봉군은 1928년 말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张学良)이 기치를 바꾼후 중앙정부에 의해 국민혁명 동북변방군으로 개편, 약칭 '동북군'으로 불렸으며 병력 30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동북군은 민국(民国, 1912~1949) 시기 중국에서 유일하게 해, 륙, 공 편제를 갖춘 군대였다.



북만항일구국회 회원증, 회장은 김책으로 젹혀 있다.

  일본이 동북을 점령하는데서 동북군은 미상불 언제와 같은 큰 장애물이었다.

  드디여 폭파사건은 달이 밝은 1931년 9월 18일 밤에 일어났다. 그때 가을바람에 실린것은 유조호의 연꽃 향기가 아니라 밭의 수수가 잎사귀를 사락사락 흔드는 소리였다.

  옛 호수에서 일어난 폭파소리

  이날 밤, 일본 관동군 철도수비대의 행동소조가 야음을 타서 유조호 부근의 철길에 접근했다. 당시 이 철길은 '남만철도'로 불렸으며 일본인이 부설한것이였다.

  드디여 22시 20분 경, 북대영 부근의 철길에서 큰 폭파소리가 일어났다.

  "폭파장소는요, 우리 박물관에서 북쪽으로 3,4백미터 떨어진 곳이라고 합니다." 심양 '9.18' 력사박물관의 연구원 류장강(刘长江)은 이렇게 말했다.

  그와 같은 전문인원도 폭파장소를 확실하게 짚지 못하는것은 철길에 아무런 표시물도 설치하고 있지 않기때문이다. 도심을 지나는 철길 량쪽에는 현재 키 높이의 차단물을 세우고 철길에 접근자체를 막고 있었다.

  이곳은 봉천 도심의 북쪽으로 7.5㎞ 상거, 동북군이 숙영한 북대영과는 불과 8백m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관동군 행동소조는 즉각 북대영 방향으로 사격을 개시했다. 이와 함께 그들은 아닌 보살을 하고 상부에 "북대영의 중국군이 철도를 폭파, 훼손하였으며 현재 그들과 격전을 벌리고 있다"고 보고한다. 일본 관동군 사령부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각 부대에 즉각 명령을 하달하고 북대영과 봉천성을 진공한다.

  기실 레일은 불과 1.5m 가량 휘였을뿐이며 렬차가 여전히 운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실착'은 관동군이 폭파사건을 빌어 전쟁을 일으키는데 지장이 없었다.



북대영 옛터.

  이때 북대영에 있던 동북군 제7려단은 상부의 '저항 불허(不准抵抗)' 명령때문에 부득불 철퇴해야 했다. 이 '저항 불허'의 명령을 두고 여러가지 설이 대두하지만 동북군의 방침이 충돌을 피하는것이였다는것만은 확실하다. 관동군과의 접전은 작은 충돌일뿐이며, 충돌을 하게 되면 자칫 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오판을 하고 있었던것이다.

  결국 북대영의 7천명 수비군은 약 3백명의 일본군에 패배하며 봉천성도 단 하루밤사이에 일본군에 점령된다.

  "현재 발굴된 사료에 따르면 이날 동북군의 일부는 여전히 유효한 저항을 진행한 걸로 보입니다." 류장강 연구원은 인터뷰 도중에 이렇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고 있던 비사(秘事)를 밝혔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동북군은 총 한방 쏘지 않고 물러선게 아니였다. 일부 장병들은 항명하면 군법에 의해 처결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항일의 첫 총소리를 울렸다.

  1931년 일본이 '9.18'사변을 위해 제작한 우편엽서에는 북대영에 세운 목제 위령비가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륙군 보병 오장 니이쿠 나무츠미이 9월 18일 저녁 북대영에서 전사했다. 또 최근에는 이날 저녁의 일본군 전몰자들을 위한 추모식 사진이 발견되는 등 9월 18일 일본군의 사상자가 상당수 출현된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일본의 우편엽서에 등장한 니이쿠 나무츠미는 북대영 전투의 첫 희생자였지만 마지막 희생자는 아니였던것이다.

  흑룡강성 정부주석 마점산(马占山)과 동북군의 일부 장병도 '부저항 정책'의 집행을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일본 침략군에 항거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전면 공세 앞에서 너무 무기력했다. 일본군은 불과 반년도 안되는 사이 동북 100만㎢의 땅을 점령했다.

  일본의 동북 3성에 대한 대규모적인 침략은 중국사회를 흔들었다. 심양의 옛 호수에 울린 폭파소리는 종국적으로 중국인민 항일전쟁의 시작점으로 되였으며 세계 반파쇼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반만항일(反满抗日) 의용군행진곡'

  1931년 12월말, 동북군이 료서(辽西)지역을 포기하고 관내로 철수한 후 동북 항일력사의 무거운 짐은 전부 동북의용군의 어깨에 떨어졌다. 동북의용군은 동북이 일본군에 점령된 초기 동북군의 옛 부대와 애국민중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항일무장력량이다.

  잠깐, 에피소드가 있다. 이때 동북군 옛 부대의 조선인 장령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전 동북군 독립포병 제9련대 련대장 박병산(朴炳珊)이다. 그의 부대는 1932년 10월 의용군으로 다시 출현하며 원 주둔지인 흑룡강성 서부의 태안진(泰安镇)을 일거에 공략한다.

  박병산을 조선인이라고 하는것은 조선인의 고유한 토종 성씨인 박씨때문이다. 박병산은 1937년 로구교(卢沟桥) 사변 이후 또 동북군 제57군 부군단장으로 문헌기록에 나타난다.

  각설하고, 동북 의용군은 국민당정부의 무저항과 무원조의 어려운 환경 그리고 군사훈련과 무기장비 렬세에도 불구, 우후죽순처럼 발전하여 여러 지역에서 일본군에 침중한 타격을 안겼다. 의용군은 흥성 시기에 무려 30만명에 달했으며 그 영향권은 거의 동북 전지역을 망라했다.

  그들은 동북에 설립된 일본 괴뢰정부인 '만주국(满洲国)'을 기치가 선명하게 반대하고 동북을 강점한 일본군에 무력으로 저항했다.

  동북 의용군은 9.18사변의 현장인 료녕성에서 제일 먼저 흥기했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이다.

  실제로 '9.18' 사변에 앞서 항일무장부대는 이미 료녕성 지역에 나타나고 있었다. 1929년 조직된 조선혁명군은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남만주 일대에서 항일독립활동을 벌린 군대이다. 조선혁명군은 이어 1930년대 동북지역의 각종 반만항일의 세력과 련합하여 활발한 반일항쟁을 전개하였다. '9.18' 력사박물관에 전시된 동북 항일의용군 14명 장령의 사진에서 첫 사람은 바로 조선혁명군 사령관 량세봉(梁世奉, 1896~1934)이다. 조선혁명군은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중국의 항일무장투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것이다.

  "일어나라! 노예로 되길 원치 않는 사람들이여!

  우리의 혈육으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쌓자!

  중화민족이 제일 위급한 시각에 이르렀을 때

  억압을 받는 사람마다 마지막 함성을 외친다…"

  동북 의용군의 이 함성은 중국인민의 민족적 기개와 애국정신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었다. 의용군의 노래 '반만항일 의용군행진곡'은 나중에 '의용군행진곡'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국가로 지정된다.

  동북의 여러 항일무장은 수십만에 달하는 일본군과 괴뢰군 정규군을 견제했고 전국의 항일전쟁을 힘 있게 지원했다.

  그러나 의용군은 대오의 성분이 복잡하고 또 제각기 싸우는 상태였으며 유효한 협동작전을 벌일 수 없었다. 또 통일적인 지도와 지휘가 없었으며 전투 소모도 제때에 유효한 보충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37년 로구교(卢沟桥)사변이 일어난 후 일본군과 괴뢰군의 대거 진공으로 각개 격파되고 련이어 와해되어 대부분 실패로 종지부를 찍는다.

  동북의 의용군이 저조기에 처할 무렵인 1936년 2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동북항일련군이 설립된다. 동북항일련군은 동북항일의용군의 잔존한 부대와 동북반일유격대, 동북인민혁명군 등 항일무장으로 구성되며 동북의 항일전쟁 력사에서 새로운 고조를 형성한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우리의 하나같은 마음으로

  적군의 포화를 용감히 뚫고 전진하자!

  적군의 포화를 용감히 뚫고 전진하자!

  전진하자! 전진하자! 전진하자!"

  '9.18' 력사박물관 입구의 거대한 일력 형상물앞에서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일력에는 1931년 9월 18일 밤 10시경이라는 시간이 그 자리에 멈춰서있었다. 탄흔처럼 형상물에 파여지고 숭숭 뚫린 구멍은 그렇게 중국 14년 항전의 시작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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