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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왕자'가 왜서 곤륜산에 나타났을까[제9편]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2.16일 10:57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솔직히 뭔가 빗나가는 것 같다. 산이 아니라 식탁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야채 가지(茄子)를 경상도에서 궁중에 진상하였다는 내용은 《춘관통고(春官通考)》(1788) 등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궁중 진상품이었던 이 가지는 훗날 중국 연변의 이민들에게 '조선가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반도의 몽톡한 '조선가지'는 확실히 대륙의 길쭉한 '중국가지'와는 다른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연변에서 '조선가지'라고 불리는 야채, '신라가지'도 이런 모양일까.

  기실 반도에서 재배된 가지의 최초의 이름은 '조선가지'가 아니었다. 일찍부터 일명 '신라가지'라는 이름으로 대륙에 파다히 알려지고 있었다. 중국의 의서인 《본초연의(本草衍義)》(1116)에 따르면 "신라에는 1종의 가지가 나는데, 모양이 계란 비슷하고 엷은 자줏빛에 광택이 있으며 꼭지가 길고 맛이 달다. 이미 중국 (대륙의) 채소밭에 널리 퍼져 있다." 이에 앞서 '가지'를 "당(唐)나라 이전부터 곤륜자과(崑崙紫瓜)라고 했다"는 기록이 의서 《본초십유(本草拾遺)》(741)에 남아 있었다. 일설에 곤륜자과는 수양제(隋煬帝)가 야채 가지를 애용하면서 특별히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곤륜자과'는 '곤륜의 검은 오이라는 의미이니, '곤륜'을 거쳐서 유입된 채소라고 해서 불린 이름이 아닐까요?"

  이맘쯤이면 누구라도 물을 법한 '가지'의 이역 여행 이야기이다. 가지의 원산지가 인도요, 또 곤륜은 인도와 중국의 접경 지역에 있는 산이니, 정말이지 누군가 일부러 박아놓은 듯 아귀가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옛 곤륜은 '만산(萬山)의 조종(祖宗)'이요, '용맥(龍脈)의 조종(祖宗)'이며 중국의 명산대천에서 제일 신비한 곳이다. 이토록 신기한 곳은 당연히 여러 신들의 주처(住處)로 되고 있었다. 중국의 신화는 대체로 네 개의 축으로 이뤄지는데, 동방의 봉래(蓬萊) 신화와 남방의 초(楚) 신화, 중원의 신화 그리고 서왕모(西王母), 반고(盤古), 여와(女娲)를 대표로 하는 서방의 곤륜신화가 바로 그것이다. 와중에 서왕모는 모든 여신들의 수령이고 반고와 여와는 세상을 창조한 신이니, 서방의 곤륜신화는 단연 신화 중의 으뜸으로 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곤륜산은 대륙 서쪽 청장고원 북부의 변두리에 동서로 길게 융기된 산맥을 지칭한다. 고대 육상 실크로드는 곤륜산 북쪽에 있는 타클리마칸 사막의 남북 가장자리를 지나고 있었다.

  정말이지 '곤륜자과'라는 이름의 유래에 머리가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이다. 가지를 곤륜과 한데 잇기에는 원산지는 물론 경유지 역시 동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곤륜'이 실은 지금의 말레이시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가지가 인도로부터 말레이시아를 통해 대륙에 전파되었다고 하는 설이 나올 법 한다.

  기실 곤륜산은 바닷길에 떠도는 배처럼 한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곤륜산은 대륙의 동북부 연해에도 나타난다. 곤륜산은 산동성(山東省) 동북부에서 제일 큰 산으로 장장 백여 리를 이어지고 있다. 북위(北魏) 시기의 사서 《16국 춘추(春秋)》는 곤륜산을 '해상 여러 산의 조종'이라고 칭했다. 곤륜산은 한․당(漢․唐) 시기부터 불교와 도교 수행자들의 수련의 도장으로 되고 있었다. 금․원(金․元) 시기에는 도교 전진파의 개산조사 왕중양(王重陽)이 전진교(全眞敎)를 설립한 '동천복지(洞天福地)'였다. '곤륜'이라는 산동성의 이 지명도 전진교 때문에 사서에 또 한 번 등장한다. "(왕중양의 수제자) 구처기(丘處機)는 등주(登州)의 서하(栖霞) 사람으로… 나이 19세 때 녕해(寧海)의 곤륜산에서 전진교를 수도했다"고 《원사(元史)》가 기록하고 있다.

  상기 기록에 나오는 지명들은 모두 산동성 동북부에 가지런히 모여 있는 것으로, 곤륜산이 바로 이 고장에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오히려 또 고여산(姑余山), 곤유산(崑兪山) 등 지명으로 불렸으며 곤륜산이라는 이름은 와전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현지인들도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유학 학파의 창시자인 공자도 이 곤륜산에 이름자를 내밀고 있다. 공자가문의 족보에 따르면 "장백산에서 날아온 두루미가 곤륜산에서 노닐던 암사슴과 만나니, 그 사이에서 나온 사람이 공자이다." 공자는 춘추(春秋) 시기 노(魯)나라 추읍(陬邑) 즉 지금의 곡부(曲阜)에서 출생했으니, 장백산은 물론 곤륜산의 위치를 산동성에 비정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실제로 산동성의 수부 제남(濟南) 부근에 장백산이 있으며 곤륜산과 동서로 고작 300여㎞ 상거한다. 두루미가 날개짓 한번으로 날아가거나 암사슴이 뜀박질 한달음에 달려가서 서로 만날 수 있는 위치. 족보에 나오는 장백산은 연변에 있는 동명의 장백산이 아니며, 곤륜산 역시 청장고원에 있는 동명의 곤륜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암사슴'이 노닐던 곤륜산은 반도와 대륙 최단 거리의 바다기슭에 위치한다. 수․당(隋․唐) 시기, 곤륜산 기슭의 적산포(赤山浦)라고 불렸던 석도(石島) 등에는 해상무역 항구가 있었다. 대륙 저쪽의 반도와 섬의 사절, 상인, 유학생, 승려들은 이 항구를 이용하여 산동반도 동북부에 상륙한 후 다시 육로를 통해 내륙의 오지에로 발길을 옮겼다.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명(明)나라 때에는 일명 '왜구(倭寇)'라고 불리는 일본 해적들이 이 일대에 자주 침노했다. 홍무(洪武) 31년(1398) 해상 방위시설을 세우고 "위엄이 동해를 진동한다"는 의미에서 지명을 따오니, 위해(威海)라는 이 대륙 동부의 항구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각설하고, 곤륜산은 바로 반도와 통하는 최단의 바닷길 한쪽 끝에 등탑처럼 서있다. 사실상 '곤륜자과'는 또 '신라가지'라는 이름과 함께 맞물려 바닷길을 통한 대륙의 유입 경로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대륙과 반도를 잇는 바닷길에 있던 여타의 항구와 마찬가지로 옛날 곤륜산 기슭에는 신라인들이 웅기중기 모였으며 신라방(新羅坊), 신라촌(新羅村)을 형성하고 있었다. 수․당(隋․唐) 시기 성읍 중심을 방(坊)이라고 했다. 또 성읍의 여러 골목을 방이라고 통칭하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신라방은 도시에서 신라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이르며 성읍의 바깥에 형성된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는 신라촌이라고 불렸다. 이역에 와서 삶의 새 터를 잡은 신라인들에게 사찰은 일종의 구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라인들이 집거한 곳에서는 거의 그림자처럼 신라사찰이 등장하고 있다. 신라사찰이 없는 경우에는 십상팔구 현지에서 아주 이름이 있는 사찰이 따로 있었다. 옛날 곤륜산 부근에도 명찰(名刹)이 있었다면 적산포에 살던 신라인들이 이 사찰에 가서 향불을 태웠을 법한 대목이다.

  정말로 곤륜산에는 천년 전의 유명한 고찰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안내를 맡은 왕씨 성의 기사는 현재로선 옛터뿐이라고 하면서 사찰 행을 접으라고 권고하는 것이었다. "무염사(無染寺)도 성경산(聖經山)처럼 풍경구에 있지만 거기에는 구경거리라곤 바위밖에 없어요."

  성경산은 전진교가 흥성한 곤륜산의 지맥으로, 도교의 경전인 《도덕경(道德經)》을 성물로 추앙하여 지은 이름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불교와 도교는 이곳에서도 함께 만나고 있었다. 무염사는 성경산과 서로 이웃, 불과 15㎞를 상거하고 있었다.



곤륜산의 지맥인 성경산에 도교의 창시자 노자가 좌정하고 있다.

  왕씨의 권고를 귀담아 들어야 했을지 모른다. 무염사는 결국 풍경구의 입구에 간판으로 적힌 이름밖에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리소 직원은 겨울 산행이 위험하다면서 기어이 일행의 진입 자체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무염사는 동한(東漢) 때 설립되었는데 이 지역의 제일 오랜 사찰로 한때 아주 흥성했다고 전한다. 《녕해주지(寧海州志)》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 거주하는 자는 육근이(六根)이 청정(淸淨)하고 큰 해탈을 얻는다"고 하는 의미에서 '무염사'라고 불렸다고 한다. 제(齊)나라 왕과 왕후의 무덤도 부근에 있었다고 하니 과연 소문난 곳이렷다.



차단봉이 내린 무염사 입구.



무염사의 바위에 있는 감실,어느 관광객이 블로그에 남긴 사진이다.



  이런저런 아쉬움을 길가에 털어내기도 전에 우리가 탑승한 차량은 벌써 산을 내렸고 또 현성을 지나 위해시 해변의 옛 적산포로 달리고 있었다.

  '적산'은 석도(石島)의 바위가 적색을 나타낸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 지명은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기행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기록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된다. 엔닌은 또 이 기행문에서 적산에 사찰이 있으니 그 이름을 '적산 법화원'이라고 부른다고 적고 있다.

  적산포에 신라인들의 사찰이 설립된 건 당나라 문종(文宗, 827~840) 연간이었다. 그 무렵 신라인 장보고(張保皐, ~846) 출자하여 사찰을 세우는데, 천태종(天台宗)을 신봉했기 때문에 '법화원(法華院)'이라고 작명했다고 한다. 장보고는 통일신라 후기에 활약했던 무장이자 무역상이었다.

  법화원은 본국인 신라와 연락하는 거점이었으며 또 산동반도를 통하는 신라와 일본의 구법승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 승려 엔닌이 법화원에 들리고 여기에 8개월 동안이나 머물게 된 것도 이 같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민간 내왕에 대한 기록은 고대 문헌에서 아주 적게 출현한다. 옛 바닷길에 대한 상황은 상당 부분 승려들의 구법기록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적산포의 장보고에 대한 기록을 포함, 신라인의 대륙 생활에 대한 기록은 또 중국이나 한국보다 일본측 문헌에 적지 않게 남아있다.

  어찌됐거나 장보고와 적산의 남다른 인연 때문에 훗날 신라에는 2개의 '적산원(赤山院)'이 나타나며, 승려 엔닌도 귀국한 후 교토에 '적산선원(赤山禪院)'을 세우고 적산 명신(明神)을 만든다. 장보고로 추정되는 이 적산 명신은 현재 적산의 서쪽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좌정하여 현지인들과 신도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적산 법화원은 당나라와 신라, 일본 교류 역사의 옛 바닷길을 견증하는 유적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법화원은 당나라 무종(武宗, 840~846)이 도교를 숭상하고 멸불(滅佛) 정책을 실행하던 시기에 훼손되었으며, 그로부터 천년 후인 1990년 옛터에서 새로운 '적산 법화원'으로 거듭났고 현지의 일대 명소로 되고 있다.

  법화원에 부랴부랴 도착했을 때는 서녘하늘이 벌써 노을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휑뎅그렁한 마당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매표구의 예쁘장한 도우미는 곧 폐관한다면서 인제 입장한들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아닐세라, 사진촬영을 하면서 보려니 관리원들이 벌써 하나 둘씩 퇴장을 하고 있었다.



법화원의 폐관시간이 박두, 나오는 사람만 보인다.

  정작 이날 저녁의 식탁에 오른 화젯거리는 이게 아니었다. 하얀 접시에 담겨 '진상'된 파릇파릇한 상추가 겨울의 한기와 서운함을 함께 몰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상추는 고어(古語) 그대로 '부루'라고 하는데, 연변의 방언으로는 '불기'라고 부른다. 원산지가 지중해 연안과 서아시아라고 하는 상추는 일찍 고려에서 전래되었다고 청나라의 문헌 《천록지여(天祿識餘)》가 기록한다. 그때 고려에서 들여오는 상추(종자)가 너무 비싸서 '천금채(千金菜)'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또 같은 내용을 기록한 조선시대의 역사서 《해동역사(海東歷史)》 등의 글귀를 빌어 이 고려가 실은 삼국 시대의 '고구려'의 약칭이라고 해석한다.



적산에 좌정한 명신, 성경산에 좌정한 도교의 창시자 노자를 방불케 한다.

  이러니저러니 상추 역시 가지처럼 먼저 서토(西土)에서 반도로 유입된 후 다시 대륙으로 전래했던 것이다. 다만 그때 그 시절 가지처럼 바닷길을 따라 왔는지 아니면 육로를 걸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을 뿐이다. 상추쌈은 우리말에 "복을 싸서 먹는다"고 일컫는다. 사실상 상추쌈에는 이처럼 천년이 넘는 '실크로드'의 천금 같은 역사가 담겨있다.

  그러고 보면 반도와 대륙을 잇던 옛 실크로드는 야채의 상긋한 내음을 타고 동화 속의 '왕자'처럼 하나의 전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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