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빌라·오피스텔 '24시간 사설 도박장' 잠입 취재… 서울에만 수십 군데]
테이블엔 주부·회사원… 옆방엔 20여명 차례 기다려
"아이스크림·담배 좀 주세요" '집밥'도 5분 만에 뚝딱 나와
칩 바꿔도, 돈 딸 때도 수수료… 시작하면 160판 해야만 퇴실
21일 밤 강남구 논현동 빌라에서 열린 ‘아파트 도박장’에서 딜러(사진 맨 오른쪽)와 사람들이 바카라 도박에 열중하고 있다.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창문을 검은 천으로 가려 놓았다. /이지은 기자 je@chosun.com
지난 22일 오전 1시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의 한 158㎡ 고급 빌라. 컴컴한 집의 유일하게 불이 켜진 방에서 9명의 남녀가 바카라 도박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방엔 바카라 전용 테이블과 에어컨, 선풍기 한 대가 전부였다. 검은 옷을 입은 여성 딜러가 무표정한 얼굴로 패를 돌렸다. 빨강(10만원)·파랑(1만원) 등 알록달록한 칩 수십 개가 순식간에 테이블 위에 오갔다. 나머지 방엔 차례를 기다리며 식사를 하거나 이불을 덮고 자는 사람만 20명이 넘었다.
'아파트 도박장'의 전형적인 현장이다. '아파트 도박장'은 주로 서울 내 고급 아파트·빌라·오피스텔 등을 빌려 불법으로 운영하는 사설 도박장을 말한다. 한 관계자는 "이런 도박장은 현재 서울 시내만 수십 군데에서 24시간 열리고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 도박장'은 치밀한 방식으로 단속을 피해가며 이웃집에서 '도박 중독자'를 양산하고 있다. 이들은 '중간연락책'이나 택시기사를 앞세워 도박할 사람을 모집한다. 업체와 연결된 택시기사가 강원랜드에서 도박을 하고 돌아가는 손님에게 '서울에도 있다'고 은밀히 소개해 주거나, '중간연락책'이 강원랜드 출입 제한일수를 다 채워 더 이상 갈 수 없는 상습 도박자를 눈여겨보고 접근하는 식이다.
도박을 하기로 하면 그 후엔 '007작전'이 펼쳐진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3일마다 개설지를 옮기므로 미리 연락을 해야만 그날의 '장소'를 알 수 있다. 이날 취재를 위해 한 '아파트 도박장'의 '중간책' 고모(40)씨에게 연락하자 '역삼동 ××호텔 앞에서 기다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10분 뒤 한 남성이 밖이 보이지 않도록 짙게 선팅한 중형 승용차를 몰고 호텔에 도착했다.
차를 운전하는 '운반책'은 '손님'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5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15분간 뱅뱅 돌아서 갔다. 혹시 모를 신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차는 고급 주택가의 평범한 4층짜리 빌라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운반책'은 '손님'이 빌라 외관을 자세히 확인하지 못하게 뒷문을 통해 3층 조용한 집 앞으로 바로 데려갔다. "아까 통화한 손님 왔습니다"라며 다시 한 번 내부와 확인 전화를 거치자 문이 열렸다.
겉은 일반 가정집과 같지만 안은 다른 세계였다. 방은 총 5개였다. 복도 끝 방에서는 우람한 남성이 문신을 새긴 팔로 돈을 칩으로 바꿔주고 있었다. 거실 뒤편 방에서는 빛과 담배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가장 큰 방인 '바카라룸'이었다. 딜러는 빠르게 카드를 펼쳤고 '손님'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종이 위에 승률을 기록해가며 돈을 걸었다. 50만원을 잃어 낙담한 여성의 입에서 "아이구야…"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파트 도박장'에선 뭐든지 주문만 하면 된다. 밖으로 나갈 필요 없이 도박만 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아이스크림 좀 주세요." "카드에서 돈 좀 뽑아다 주세요." "담배 두 갑이요." 손짓만 하면 아주머니 네 명이 부지런히 손님들에게 달려갔다. 주방에서는 '집밥'도 5분이면 준비됐다.
'손님'이 돈을 따는 것은 매우 어렵다. 돈을 칩으로 바꿀 때는 '환전책'에게, 돈을 딸 때는 딜러에게 수수료 5%씩 내야 한다. 게임을 시작하면 160판을 해야만 퇴실할 수 있다는 규칙도 있다. 돈만 따고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주고객층은 유흥업소 종사자와 아르바이트생, 주부, 회사원 등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온다는 이태원 옷가게 점원 신모(34)씨는 "돈 많은 사람들은 사설 카지노나 해외로 가겠지만 여기 오는 사람들은 형편도 안 좋으면서 버는 족족 도박을 하는 게 낙(樂)인 중독자가 대부분"이라 말했다.
조선일보 & Chosun.com 이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