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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안젤레스 코리아타운의 '마당발녀인'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3.02.06일 09:59
'캘리포니아주 중국조선족동포회'자문봉사센터 소장 김정화씨의 이야기

 조선족들과 더불어 다양한 활동을 조직하고있는 '캘리포니아주 중국조선족동포회'김정화소장(왼쪽 첫사람).

  미국서부의 관문도시 로스안젤레스 코리아타운에는 중국에서 건너간 조선족동포들이 근 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속에는 수년간 '아메리칸드림'을 안고 그 땅을 찾아간 우리 조선족동포들을 위하여 수많은 좋은 일을 해온 한 인기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캘리포니아주 중국조선족동포회' 자문봉사센터 소장이며 코리아타운의 '마당발녀인'으로 불리우는 김정화씨이다.

  연변 로투구진 출신인 그녀는 40대 젊은 녀성이지만 그가 걸어온 인생길은 그야말로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량식가공공장에서 목수일을 하는 아버지와 페결핵환자인 어머니 슬하에 딸 넷, 아들 하나로 빈한한 삶을 이어가는 가정에서 그녀는 셋째딸로 자랐다. 두 언니가 시집간 후 얼마 안되여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또 반년도 안되는 사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버렸다. 집에는 그녀와 오빠, 동생까지 세 고아만 남게 되였다.

  오빠는 외지에서 학교에 다니고 동생은 학비때문에 연변1중에 입학한것도 포기하고 돈이 적게 드는 사범학교에 진학하였다. 워낙 승벽심이 강하고 남달리 총명한 그녀였지만 가정형편이 너무도 어려워 겨우 중학을 마치고는 취직했다. 새벽에는 큰 공장의 보일러들을 찾아다니며 부엌에 땔 콕스를 주어왔고 낮에는 복장점에 나가 무보수로동으로 봉제기술을 배우고 밤이면 또 싸리나무광주리를 틀어 부업을 하면서 푼돈이나마 모아 겨우 가정살림을 이어갔다.

  부모가 남긴 단칸짜리 낡은 집이 그들 삼형제의 유일한 삶터였다. 동생은 학교숙사에 나갔지만 오빠는 당장 결혼할 때가 됐으니 그녀는 빨리 집을 나가야 했다. 어떻게 할것인가? 고민끝에 내린 결론은 그녀도 임자를 찾아 시집가는 길이였다. 나이도 어느덧 스물다섯이 되였으니 사실 때이른 혼사도 아니였다. 그의 생각을 알게 된 친구는 그에게 키 크고 인물 좋은 총각을 소개해주었는데 시어머니되실분이 새 며느리감을 보더니 키도 작고 인물도 환하지 않다고 나무랐다.

  "얼굴만 이쁘면 뭘합니까? 마음을 잘 써야지요. 두고보세요, 제가 시부모님을 어떻게 모시는가를 ..."색시의 야무지고 당돌한 대답에 시부모들은 너무도 기특하여 그만 동의하고말았다. 아니나다를가 결혼후 지금까지 근 20년간 그녀같은 효녀는 따로 없었고 고부간의 관계도 친딸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지극했다.

  그런데 시집도 그녀네 집 못지 않게 가난했다. 사실 결혼준비도 힘든 형편이였지만 량쪽이 다 비슷한 처지라 서로 리해해주면서 이불 한채, 첫날옷 한벌과 삼일옷 한벌 그리고 간단한 식사 한끼로 결혼식을 마치였다. 허나 신혼생활은 첫시작부터 고생이였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볼가 생선장사며 돼지고기장사를 해보아도 별로 남는것이 없이 밑지기 일쑤였다. 아예 복장가공이나 해보자고 마음먹고 그녀는 복장점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가공기술을 익혔다.

  바지 한견지 수공값이 2원 50전,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열벌을 만들어야 고작 25원. 하루 4시간씩 자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악착스레 재봉틀을 돌렸다. 그러면서 집세도 물고 그럭저럭 생계는 유지할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연길에 갔다가 우연히 복장가공부에 들려보니 바지가공에 호주머니 하나 더 붙이고 수공비는 5원씩 받는것이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왜 로투구에서 남의 절반값을 받고 일하지? 연길로 가자. 남이 하는 일을 나라고 왜 못하겠는가? 그녀는 밤도와 이사짐을 꾸려가지고 이튿날 곧바로 연길로 향했다. 키 큰 신랑이 다리도 바로 펼수 없는 작은 세방을 세맡고 매일 복장매대를 돌면서 일거리를 찾아서는 밤새 가공하여 시장에 가져갔다. 하도 일솜씨가 재빠르고 신용도 잘 지키기에 그녀에게는 일거리가 곱절 생겼다.

  어느덧 결혼 1년이 되자 그녀는 귀여운 아들을 낳게 되였다. 일욕심이 강한 며느리를 대견하게 지켜보던 시어머니는 애가 돐이 되자 며느리더러 시름놓고 일하라며 손주를 업어갔다. 아들을 떼여놓는 부모의 마음은 쓰리고 아팠지만 어쩔수 없었다. 세월이 약이였다. 한창 복장가공으로 신나게 일하고있는데 어느날 또 좋은 정보를 알게 되였다.

  연길시복장공장에서 기술공을 모집하여 싸이판에 보낸다는것이다. 시간당 2.75달러씩 준다고 하니 연길에서 아글타글 벌기만 퍽 나은 돈벌이가 아닌가? 워낙 복장업에서 내노라 하는 그였는지라 수백명 실기응시자를 제치고 선참으로 합격되였다. 인젠 출국길이 눈앞에 보이는것 같았다.

  그런데 갈수록 심산이라고 시련은 또 찾아왔다. 출국비용 2만 6000원을 어떻게 갖출가 근심이 태산같은데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급성맹장염에 걸려 당장 수술을 해야 하였다. 수술비 500원도 없어 그는 생각끝에 별 거래도 없던 사촌오빠를 찾아갔다. 아프다는 말은 못하고 출국비용 500원이 모자라니 먼저 꿔달라고 사정하였다. 열심히 살아오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본 사촌오빠는 선뜻이 돈을 내놓았다. 그녀는 남편도 시부모에게도 알리지 않고 친구와 함께 병원에 가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3일만에 병원을 뛰쳐나와 자기 혼자 집에서 점적주사를 맞았고 일주일후에는 실을 빼야 하는데 병원가는 비용이 아까와 집에서 가위를 불에 달구어 소독하고 실을 끊고는 집게로 실을 한오리한오리 뽑아냈다.그런 후 배를 단단히 동여매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수술비용 230원밖에 쓰지 않았고 후에는 언니들의 도움으로 수술후 보름만에 싸이판으로 가는 출국길에 올랐다.

  희망과 꿈으로 부푼 가슴 안고 찾아온 싸이판은 그야말로 상상밖의 천길나락이엿다. 그곳에서의 나날은 완전 노예생활이였다. 아침 일곱시부터 밤 한,두시까지 근 20시간이나 되는 고된 로동은 물론 그보다도 무시로 가해지는 사장과 지배인들의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쌍욕질과 폭행은 참으로 견뎌내기 힘들었다. 그자들은 로무일군들을 아예 인간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 지옥같은 곳에서 일각이 삼추같았지만 어떻게 하든 빚은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매일 이를 악물고 귀를 막고 참고 견디여 만 3년이란 계약이 끝나자 곧바로 메히꼬행을 신청하였다.

  한국사장을 따라 낯설고 물선 지구 반대쪽 검은 피부색의 나라 메히꼬땅에 도착하니 언어불통때문에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죽으라는지 살라는지 우선 말을 알아야 이 땅에서 살아남을것이 아닌가? 그녀는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달려들어 스페인어사전을 보풀이 일게 번져가며 읽고 외우고 하였다. 일터에선 손짓발짓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몇달간 꾸준히 노력하니 차츰 그들이 지껄이는 소리들을 약간씩 알아들을수 있었다.

  '하면 된다.'이것이 그녀의 인생신조이다. 1년간 밤낮이 따로 없이 극성스레 애쓰는 그녀의 모습에 메히꼬인들도 감동되여 적극 도와주었다. 차츰 귀가 열리고 말문이 트이더니 2년이 의사소통은 문제없고 3년만에는 아주 막힘없이 메히꼬인들과 어울릴수 있었다. 한국사장은 그녀의 놀라운 의력에 탄복하여 기한이 되자 선참으로 그녀의 요구사항대로 미국행을 열어주었다.

  '자유와 기회의 땅' 아메리카에 왔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생소한 이국땅에서의 생활은 또다시 고행길이였다. 거리에서 며칠 헤매다가 요행 옛 고향의 언니를 만나 그 집에 얹혀살면서 일자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식당복무원도 해보고 사우나에서 때밀이도 하고 안마방에서 지압도 하면서 차츰 그곳 생활에 적응하였다.

  후에는 세집도 잡고 보건식품사업도 하면서 점차 수입을 늘렸다. 몇년후 미국 영주권을 쟁취하자 2009년에는 12년이나 갈라져 살며 서로 그리던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도 미국에 이주하여 다시 오붓한 가정을 이루고 세식구 열심히 살고있다. 새해 8.15에는 시부모님을 뵈러 중국으로 간다며 애들처럼 들떠있었다.

  그녀는 이국땅에서 자신이 겪은 고통만큼이나 주위 조선족 형제자매들의 고통을 잘 헤아려주었다. 어느 누가 거처할 곳이 없어 거리에서 헤매면 그녀는 우선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안착시키고 일자리를 구해준다, 방을 얻어준다 하며 분주히 돌아쳤고 말과 법을 몰라 누가 불리익을 당하면 자기가 나서서 그들을 도와주군 하였는데 이 몇년간 그녀의 도움으로 미국땅에 정착한 우리 동포들만도 50여명이나 된다.

  하여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서는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녀는 따뜻한 마음과 넓은 인맥으로 친정집 '큰언니'로, 코리아타운의 '마당발녀인'으로 활약하며 뭇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을 한몸에 지니고있었다. 그러던 그녀는 2010년에 또 큰 종양수술까지 하여 무거운 일을 할수 없게 되였다. 그러자 그는 쯤쯤이 우리 동포들의 카드구입과 우편, 송금 등 일들을 도와나섰고 또 열심히 자습하여 '보험회사자격증'도 땄으며 앞으로는 또 '부동산중개자격증'도 딸 계획이란다.

  그녀는 가정이 곤난하여 어릴 때 공부를 다 못한 한을 가슴에 안고 또 이곳 외국어학원의 대학본과과정 입학준비도 하고있었다. 영어와 스페인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미국사회의 각종 인터넷정보도 제때에 장악하여 지난해부터는 할리우드영화촬영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여러가지 보조역까지도 맡아하는 등 외국에 나간 조선족녀인으로서는 놀라울 정도의 인기인물로 활약상을 펼치고있었다.

  항상 열정적이고 활달한 그녀는 지금도 우리 조선족동포들의 일이라 하면 밤낮이 따로 없이 차를 운전하고 동분서주하면서 자기 일처럼 해결해주고 그 누가 중국에서 찾아오면 극력 시간을 짜내여 구경시키고 안내해주는 등 그의 일과는 항상 빈틈없이 꽉 차있군 한다. 하기에 그곳에선 누구든지 무슨 일이 생기면 일단 그녀를 찾고 그녀와 련락되기만 하면 십중팔구는 해결을 보군 한다고 한다. 그녀의 능력과 책임감은 참으로 보통이 아니였다.

  최근에는 또 미국에서 일하는 우리 동포들의 생활을 더욱 뜻있고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동포회 성원들을 이끌어 월요일, 화요일 오전 영어학습반을 조직하였고 자기가 직접 학생회장을 맡고있다. 그녀는 또 배구, 테니스 등 여러 가지 종목의 아침운동도 조직하고있으며 명절에는 조선족동포회 주체로 각종 문예오락과 축구와 육상 등 체육경기를 벌이는 등 유익한 활동들을 펼치고있다. 요즘에는 또 한국코치가 조직한 배드민턴클럽에 가담하여 매일 아침 두시간씩 테니스를 치고 오전에는 영어학원의 공부를 하며 오후에는 일터에 나가는 등 날마다 뜻있는 하루하루를 만들어가고있었다.

  지금 '미국 캘리포니아주 중국조선족동포회'의 한 책임일군으로 일하고있는 그녀는 오늘도 우리 동포들을 위해 열심히 뛰고있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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