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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72)—형보전역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3.03.26일 08:59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수립은 장강이남에서 작전하고있는 수백만 인민해방군 장병들을 크게 고무시켜주었다. 가난한 사람도 다 같이 잘살수 있는 평등하고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인 인민공화국이 끝내 창립되였던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은 중앙군사위원회와 중앙인민정부 주석인 모택동의 명령에 따라 백숭희집단을 소멸할 임무를 맡았다. 국민당 군계에서 《작은 제갈량》으로 불리우는 백숭희집단을 철저히 소멸하기 위해 모택동주석은 멀리 우회하여 적을 크게 포위한 후 유리한 시기를 틀어쥐고 결전을 진행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번번이 아군주력을 피해 도주하는 백숭희의 주력군을 소멸하기 위해 제4야전군은 세길로 나누어 멀리서부터 적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동로군은 제2야전군과 배합해 강서성으로부터 신속히 남진해 광동으로 진격하다가 광서경내에 진입함으로써 동부로 백숭희의 퇴로를 차단하기로 했고 서로군은 호남과 귀주부근으로 우회해 적을 포위하려 했으며 제4야전군 12병퇀 주력은 정면으로 계속 적을 몰아붙이기로 계획하였다.

국민당군 백숭희가 거느린 20만 대군은 호남성 형양과 보경도로와 월한철도연선에 포진하고있었고 동부로 광동의 여한모 부대와 서부의 송희렴부대와 련결해 반월형의 방어진을 구축하려 시도하였다.광서를 본거지로 했던 백숭희는 형양과 보경 지역에서 우세한 병력을 집중해 해방군 몇개 사단을 소멸한 후 본거지인 광서로 들어가 장기적으로 대항하려 꿈꾸고있었다. 그는 산하의 제7군과 48군, 71군 등 11개 사단 병력을 집중해 10월 5일 제4야전군 42군을 공격했지만 별 성과가 없자 다시 머리를 돌려 40군을 공격하였다.

국민당군의 행동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지휘부에서는 잠시 부대의 공격을 멈추고 적의 작전시도를 알아낸 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때 전보통신이 잘되지 않아 45군 135사가 공격정지명령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어느새 형양-보경도로를 넘어 깊숙이 적의 배후에 진입해있었던것이다.

뜻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되자 개국대전에 참가했던 제4야전군 총지휘인 림표도 급급히 무한으로 와서 직접 작전을 지휘하였다. 우세한 병력을 집중해 해방군에게 된맛을 보여준 후 광서로 철수하려던 백숭희도 자기 배후에 해방군이 나타나자 크게 놀랐다. 해방군 135사는 적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눈에 든 가시와 같았다.

백숭희는 급급히 주변의 병력을 동원해 종일 135사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전과가 없었다.

작전상황이 계획대로 될수 없자 림표사령원은 제4야전군 중로군 각 부대에 총공격명령을 내렸다. 135사의 포위를 풀기 위해 4야전군 중로군은 강대한 공격을 발동해 정면으로 적을 밀어붙였다. 한편 서로군인 13병퇀은 적이 귀주로 진입할수 없게 길을 막아나섰고 남로군도 신속히 광동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들은 여한모 잔여세력을 몰아내고 국민당 림시정부소재지인 광주를 해방함으로써 중로군의 작전을 유력하게 지원하였다. 기회를 놓칠세라 38군과 40군을 비롯한 4야전군 중로군주력은 신속히 형양-보계선을 돌파하였다.

자칫 20만 대군이 전부 소멸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백숭희는 해방군의 예봉을 피해 전면 철수를 시도하였다. 그는 남은 주력부대를 집중시키고 해방군의 포위망이 형성되기전에 틈을 타서 포위권을 빠져나왔다.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급급히 본거지인 광서로 도주하였다.

조선족장병이 다수를 차지한 40군은 신속히 적의 형양-보경방어선을 돌파한 후 도주하는 적을 계속 추격하였다. 120사는 호남과 광서의 접경지인 홍교(洪桥), 관산평(官山坪)으로 진격해 10월 8일 적 1000여명을 소멸하였고 119사는 문명포(文明铺)부근에서 적을 격퇴한 후 철수하는 적을 따라 맹렬한 추격작전을 진행하였다.

때는 가을이여서 궂은비가 구질구질 내렸다. 종일 시뿌연 안개속에 싸인 강남의 산과 물 그리고 변덕스러운 날씨는 동북에서 온 아군장병들에게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게다가 아열대지역의 고온으로 하여 역병까지 나돌아 고생이였다. 하지만 해방군장병들은 모든 곤난을 극복하고 전진하였다. 그들은 비를 무릅쓰고 달리다가 몇번이나 논밭에 넘어지군 하였고 또 밤에는 산을 타야 했다. 숲이 우거진 산길에는 뱀이 많았을뿐만 아니라 가시나무도 많았다. 많은 전사들이 가시나무에 걸려 손이고 얼굴이고 피투성이가 되였으며 뱀에게 물리는 경우도 있었다.

40군 119사 경위련 련장이였던 김지한로인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평진해방후 43일간의 강행군이 있었습니다. 거의 달음박질하다싶이 전진했습니다. 그래 우리는 형보전역에도 참가했는데 백숭희부대와 치렬하게 싸웠습니다. 형보전역이 끝나자 백숭희부대는 일사천리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는데 길에는 버리고간 무기와 군수품이 가득하였고 파손된 자동차도 많았습니다. 우리는 적이 버리고간 무기나 군수품을 거둘사이도 없이 계속 추격해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참 힘들었습니다. 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지요. 그렇게 윁남국경까지 갔습니다. 거기 북해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우리 부대는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낮에는 자고 밤에는 바다에서 수영훈련을 했습니다.》

40군 119사 경위련 련장 김지한

쉼없이 달려 40군 119사는 드디여 10월 9일 양가교(杨家桥), 철당교(铁塘桥)부근에서 국민당 제7군을 가로막았다. 백숭희의 주력부대의 하나인 7군은 길을 열기 위해 흥룡산(兴龙山)과 송산정(松山亭) 고지를 미친듯이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잠시 우세를 점한 국민당군은 산하 몇개 사단의 력량을 집중해 악을 쓰고 119사 방어진지를 공격하였으며 아군장병들은 길을 막고 한걸음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적의 포화와 탄우속에 싸우고있는 전사들은 조금만 더 견지하면 아군주력이 도착해 국민당군을 깡그리 소멸할것이라는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이튿날 새벽, 양가교부근에 도착한 40군 주력과 38군이 신속히 포위망을 줄이고 국민당 7군을 공격하였다. 119사 장병들에게 막혀 꼼짝못하고있던 7군은 얼마 안되여 전부 소멸되였다. 전투에서 119사 전사들은 국민당 장군만 하여도 14명이나 생포하였다.

형양-보경전역이 끝난 후 백숭희는 15만 패잔병을 거느리고 본거지인 광서로 도주하였다. 4야전군 동로군은 맹렬한 추격전을 펼쳐 광주를 해방하고 광동성 최남단인 뢰주반도(雷州半岛)와 흠주(钦州)로 진격하였으며 서로군과 중로군은 광서에 진격해 계속 백숭희 잔여세력과 싸웠다.

하지만 추격전이라고 해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였다. 수천리 길을 아군장병들은 모두가 두발로 뛰여야 했다.광동,광서를 해방하고 줄곧 윁남 국경까지 적을 추격해 소멸한 38군 113사의 조선족전사 고광동로인은 간고한 추격전을 이렇게 소개했다.

《…행군요, 우린 두발로 윁남국경까지 갔어요. 북경, 천진이 승리하면 또 석가장 가야 하지 그리고 또 무한, 곤명…게다가 어디 똑바로 가나요? 여기저기 에둘러 가야 했지요. 만리도 훨씬 될거래요. 퇀장은 말을 타고 가고 전사들은 걸어가는데 모두 차는 타지 않았어요. 부대 참가해서부터 행군과 달리기는 기본이여야지요. 그 간고함은 누가 알아요? 몰라요! 국민당에 비하면 원래 우리 무기는 형편없었지요.

그러다 동북이 해방되니 무기가 좋았는데 그냥 밀어재꼈지요. 하지만 남방에 오니 참 곤난이 더 막심했어요. 운남성, 귀주성을 가는데 전부 길이 이래요. 구불구불...게다가 열대지방이라 종일 안개가 뿌옇고 비가 자주 왔어요. 그리고 뱀이 어찌나 많은지…어떤 때는 밥 지어 먹을 시간도 없이 계속 달려야 하는데 참 너무 힘들어 막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지 뭐요.

왜 자살하냐고? 참 누가 그 어려움을 알겠소만…며칠씩 굶는데다가 탄약 백발에 이불짐, 대야를 모두 들고 메야 하지 총도 있지…그러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정말 환성을 지르며 좋아하지요. 왜? 싸우려면 엎드려 총을 쏘고 그래야 하니 숨이래도 돌릴수 있으니깐…정말 행군이 너무 힘들어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었지 뭐요.》

전쟁년대의 고광동로인

달리고 또 달리고 밥 먹을 사이도 없이 밤 잘 사이도 없이 달리고 달려야 했다. 도주하는 적보다 더 빨리 행동하고 더 빨리 달려야만 했고 그래야 적을 포위섬멸할수 있었다. 자동차도 없고 군마도 많지 않았다. 전사들은 오로지 두다리로 달려야 했던것이다.

동북에서부터 《천하 제1군》으로 소문이 높았던 38군은 추격전에서도 용맹을 잃지 않았다. 백숭희의 잔여세력을 분산 소멸하고 중국과 윁남 국경지역까지 진출해 싸웠다. 동북에서 《선풍부대》로 소문이 났던 40군은 광서에서도 선풍부대의 특징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그들은 신속한 행동으로 언제나 적보다 먼저 달려가 적의 앞길을 가로막고 적을 소멸하면서 가는 곳마다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십만대산(十万大山)부근에서 백숭희의 마지막 주력인 125군을 소멸하기 위해 40군 119사 356퇀 장병들은 41시간 쉬지 않고 150킬로메터를 달려 적을 따라잡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40군은 46군과 협동하여 3시간의 격전을 거쳐 끝내 백숭희의 본부를 점령하고 국민당 125사를 전부 소멸하였다. 전투에서 356퇀만 하여도 2800여명을 생포하고 300여대의 트럭을 로획하였다.

광동광서전역이 끝남에 따라 중국남부는 대륙과 떨어진 해남도 하나만 남고 전부 해방되였다. 대륙에서 해방군의 침중한 타격을 받은 국민당 잔여세력은 뢰주반도를 통해 해남도로 도주하여 계속 발악하려 시도하였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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