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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 병자호란과 중국조선족이민사/정인갑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3.06.28일 09:55
  정인갑 칼럼

  최근 몇 년간 필자에게 중국조선족의 이민사에 관한 자문이 자주 들어오곤 한다. 그러면 필자는 줄곧 아래와 같이 알려주곤 하였다: a, 1860년대~1910년의 생활이민. b, 1911~1918년 파산 이민. c, 1919~1931년 독립이민. d, 1932~1936년 자유이민. e, 1937~1945년 집단이민 등이다.

  얼마 전 필자의 자문을 받고 어느 포럼에 참가하여 이렇게 발언하였다가 중국 측 학자의 반박을 당한 사람이 있다. 중국 측 학자의 발언에 따르면 중국조선족 이민사에 1620~30년대의 ‘이민’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1620~30년대의 ‘이민’이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의 일을 일컫는 것이다. 이 문제는 중국조선족이민사에 관하여 팽팽하게 대립된 두 가지 관점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란 무엇인가? 여진족(女眞族)이 지금의 요녕성(遼寧省) 무순시(撫順市) 신빈현(新賓縣)에 후금 정권을 설립한 이래 국력이 급속히 팽창하였으며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였다. 명의 속국이며 임진왜란 때 명의 지원으로 나라를 되찾은 조선은 금-명 전쟁 때 명의 편에 섰으며 출병하여 금과 전쟁도 하였다. 조선의 후환을 없애고 명과의 전쟁을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후금은 조선에 대하여 두 차례의 대형 침략전쟁을 발동하였는데 한국 역사상 이를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이라고 한다.

  이 두 차례의 전쟁에서 금은 조선인을 부지기수로 죽이고, 재물도 부지기수로 약탈하였으며 조선인 60만 명을 노략해 갔다. 노략된 조선인은 모두 노예로 전락되었다. 심양(瀋陽) 노예시장에서 매매된 조선인 노예만 하여도 몇 만 명이나 되었다. 노예시장에서 마주친 자식과 부모, 형제가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과 땅을 진감할 정도로 비참하였다.

  노략당한 사람 중에는 왕실, 대신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세자 이형(李瀅) 가족의 남자 8명, 부인 11명, 가정(家丁) 9명, 태감 7명, 일꾼 22명이 있다. 차자 이구(李湨) 가족이 부인 5명, 가정 3명, 일꾼 16명, 병정 44명도 있었다. 그 외에 상서(尙書) 안일훈(安一訓), 시랑(侍郞) 박로(朴魯), 박황(朴黃), 무관 이집사(李集思), 문관 이명순(李明順), 미응하(米應夏),이택고(李澤高), 견류성(甄類成), 이규(李奎) 등 182명에 말 303필이 붙잡혀 갔다.

  조선왕조 때 200여 년 간 권귀 행세를 한 안동김씨의 집성촌 경북 안동군 소산(素山) 마을에 가면 김상헌(金尙憲)의 시조를 새긴 큰 바위가 세워져 있다: ‘가노라三角山아/다시보자漢江水야/故園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時節이 하 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김상헌은 예조판서에 있으며 반청(反淸)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청의 출병동조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양에 붙잡혀 가 6년간 옥살이를 하고 돌아왔다. 그가 잡혀가는 길에 서울을 지나며 쓴 것이 위의 시조이다.

  후에 청이 ‘은혜’를 베풀어 노략해간 조선인을 되찾아가게 하였으나 너무 많은 돈이나 양식을 받기 때문에 돌아온 자가 백에 한둘 정도뿐이었다. 천신만고를 거쳐 스스로 도망쳐 온 자가 있었으나 청의 압력에 못 이겨 다시 붙잡아 보내진 자도 많았다. 돈을 주고 속회(贖回)되어온 부자집 부녀들은 시집에서 더러운 몸이라며 받아주지 않아 다시 비극의 심연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1970년 12월 필자가 군복무를 할 때 행군훈련 차 요녕성 개원현(開原縣) 위원보향(威遠堡鄕)의 어느 박가촌이라는 마을에 들린 적이 있었다. 조선족이 아니라고 우기다가 80대 노인을 찾아가 반복 설득하니 “조선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 가문의 두 형제가 몇 백 년 전에 이 마을에 정착하였는데 지금은 18세대쯤 된다. 저의 조부가 한국말을 좀 할 줄 알았는데 부친 세대부터는 한국말을 전혀 모른다.”고 말하였다. 지금 북경 동북쪽으로부터 동북 전역에 이르는 지역에 이런 박가촌이 가끔 보이는데 바로 정묘, 병자호란 때 붙잡혀간 조선인의 흔적일 것이다. 다른 성씨도 많겠지만 민족 특색의 성씨가 아니므로 고증하기 어렵다.

  문제는 이 부류의 사람을 중국조선족 이민사에 넣어야 하는가이다. 정묘, 병자호란 때 중국으로 간 우리민족은 이민이 아니고 포로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잔혹한 압박을 받았으며 가장 비참한 역사의 한 페이지다. 또한 이들은 완전히 동화되었으므로 지금 우리가 말하는 조선족 구성원에 속하지 않는다. 이를 우리민족의 이민사에 넣는다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중국인이 이를 이민사에 넣자고 하지만 이는 가해자의 주장에 불과하다. 피해자의 견해를 더 존중해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60만 명 중 많이 잡아 절반이 돌아왔다고 쳐도 30만의 후손이면 지금 적어도 500만은 될 것이다. 이 또한 우리민족의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이들을 이민사에 넣으면 적합하지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 어떤 차원으로 취급하여야 마땅한가는 학술계가 연구해 볼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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