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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반산아버지》께 올리는 편지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3.12.09일 11:50
한평생 농사군으로 황소처럼 일하며자식들을 위해 살아오신 아버지 박두현.

《세월이 류수》라더니 아버지께서 저 세상에 가신지도 어느덧 30여년이 흘렀습니다. 아버지, 셋째딸 동선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그날부터 이 딸은 종래로 아버지를 잊은적 없습니다. 세월이 좋아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애절하게 가슴을 허빕니다. 아버지, 이 딸은 아버지 뵈러 마반산산소에 왔습니다. 한평생 자식 위해 고생만 하시다가 불행하게 세상뜨신 나의 아버지, 늦게나마 이 글을 바쳐올립니다.

자식들 위해 사셨던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성함은 박두현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여덟살 때 흑룡강성으로 이민와 집마당에서 우물을 파시던 부친과 형님을 가스폭발사고로 하루아침에 잃고 학교문앞도 못가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평생 한이 된 아버지께서는 자식들만은 꼭 공부를 시켜내리라 마음먹었다고 하셨습니다.

흑룡강국영농장의 기술원으로 일하시던 아버지께서는 1959년 자식들을 공부시키려고 연길로 이사를 왔다지요. 그러나 3년재해가 들이닥치면서 대식품새대를 맞게 되였습니다. 끼니조차 잇기 어렵던 1960년, 큰언니는 흑룡강대학에 추천받은 기쁨을 안고 집으로 왔습니다. 희소식앞에 며칠밤 애꿎은 담배만 태우시던 아버지는 끝내 친척들 도움으로 입학금을 마련하여 큰언니손에 쥐여주었습니다.

그뒤로 연길시국영농장에 출근하시던 아버지는 집을 마반산으로 옮겼습니다. 산골에 가서 자식들에게 밥이나마 배불리 먹이고 산부업을 해서라도 자식들 공부뒤바라지를 할 심산이였지요. 마반산기차역에서 20리 산길을 더 걸어야 도착하는 마반2대는 전기도 없고 수레길조차 변변찮은 편벽한 두메산골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이사짐을 부린 이튿날부터 생산대의 밭갈이, 후치질 등 힘든 일을 닥치는대로 하셨습니다. 봄부터 밭머리휴식시간이 되면 담배쉼도 못하고 더덕이며 약재며를 캐셨고 찌물쿠는 한여름 점심참에도 구질구질 비내리는 휴식날에도 산속에 들어가 피나무껍질을 벗겼습니다. 무거운 피나무껍질을 산더미처럼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옷은 늘 땀과 비에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땀에 절어 해진 아버지의 흰광목적삼을 씻어 깁어드렸구요.

저녁이면 아버지는 고된 로동의 피곤을 무릅쓰고 등잔불밑에서 피나무속껍질을 잘게잘게 찢어서 밤깊도록 바를 들이셨습니다. 《덜커덩…덜커덩…》 아버지의 바틀소리, 우리 자식들은 저녁마다 그 《요람곡》 들으며 꿈나라로 들어가군 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딴딴한 참나무바훓개는 아버지의 손과 바에 다슬어 반들반들해졌고 깊은 홈이 패였지요. 해마다 생산대의 바를 도맡아 들이신 아버지, 십여년동안 아버지께서 손이 다슬게 들인 바줄은 몇천메터인지 모른답니다! 그러는 아버지의 손가락은 늘 갈라터져 뻘건 살이 보였지요. 반창고도 없어 실로 아버지의 손가락을 감아드리는 우리는 그토록 모진 고생을 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기가 몹시 가슴 아팠습니다.

목숨으로 지켜준 학교 가는 길

아버지는 생산대의 빚을 안 지고 살면서 자식들을 공부시키려고 통나무벌목, 발구다리 등 힘겹고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셨지요.

어느해 봄날, 이 딸은 뒤산에 나물 캐러 올라갔다가 발구에 통나무를 꽉 박아싣고 산을 내리는 한 농부의 뒤모습을 본적 있습니다. 발구가 한창 비좁고 가파로운 산길을 미끌어져가고있었습니다. 산중턱에 주먹처럼 뚝 삐여져나온 굽인돌이를 돌 때 갑자기 왼켠으로 기우뚱하는 발구군, 굽인돌이옆은 곰처럼 웅크리고 앉은 들쑹날쑹한 바위돌, 아래는 아찔한 깊은 낭떠러지…

(넘어지면 큰일날텐데...) 조바심을 태우며 지켜보는데 그 뒤모습의 임자가 바로 아버지란것을 알아본 순간, 이 딸은 다짜고짜 발구를 쫓아 산아래로 내리뛰였습니다.

《아버지, 제발 이 일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이 딸은 아버지의 두다리를 붙잡고 눈물을 좔좔 흘리며 빌었어요. 소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저의 머리를 쓰다듬던 아버지는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야 너희들이 배 곯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지!》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고 흑룡강성에서 달려온 큰언니 박길자(왼쪽)와 함께.

그후에도 뒤산 그 위험한 발구길엔 아버지의 발자국이 그냥 찍혔어요. 어느날, 발구길밑의 채 녹지 않은 얼음을 잘못 디뎌 넘어지는바람에 아버지는 황소 발에 밟혀 왼쪽 어깨뼈가 골절됐어요. 인사불성이 되여 병원에 실려가서 처치받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돈이 없어 약도 못 썼지만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으셨어요. 상처가 좀 낫자 아버지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셔서 또 밤낮 없이 일하셨습니다.

그때 우린 매일 이른 아침 큰 강을 건너가 기차를 타고 학교로 갔습니다. 60~70년대 부르하통하와 해란강이 합류해 마반산자락을 감돌아흐르는 강은 깊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셔서 장대기를 들고 먼 강에 나가보셨습니다. 장마철이면 아버지는 힘겹게 바줄을 당겨 세찬 물결을 헤가르며 우리를 태워 강을 건너주셨습니다.

제일 위험한 계절은 초봄 그때였습니다. 간밤에 슬쩍 얼었던 얼음장이 한걸음 내딛는 순간 꺼져내려앉을 때면 온몸이 오싹해나군 하였습니다. 때론 앞에서 길을 내며 걷는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방금 밟고 나서는데 발밑에서 얼음장이《쾅-》 하고 깨지면서 강물속으로 둥둥 떠내려가기도 했지요. 이렇듯 15년동안이나 자식들의 앞에 나서서 위험한 강을 건네주시던 나의 아버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우리는 사고 한번 없이, 지각 한번 하지 않고 강을 건느고 기차를 타고 학교에 당도하군 했습니다

우리 자식들은 아버지의 정성에 보답하려고 집안일도 돕고 농사일도 거들면서 먼 학교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학기말이면 우리는 우등생성적표며 《3호학생》상장이며를 타다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너무 기쁘셔서 환한 미소를 짓군 하였습니다.

친아버지가 아니였던 의붓아버지

문화대혁명시기 중학교를 졸업한 둘째언니와 제가 재교육대상이 되여 귀향했어요. 자식들의 진학길이 막히자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해온 농민자식들에게 재교육이라니 웬 말이냐며 리해되지 않아 한탄했지요.

그러면서도 앞길이 막막해 실망하는 자식들을 둘러보시더니 한 말씀하셨지요. 《이 밤이 아무리 길어도 밝을 때가 올거다. 농사일을 하면서라도 책은 놓지 말거라.》

역경속에서도 한번 먹은 마음 굽히지 않는 아버지의 그 말씀에 마음이 든든해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았고 계속 간고분투를 했어요.

나(오른쪽)와 둘째언니(웃쪽)는 의붓아버지를 친아버지로 알고 그 사랑에 행복하기만 하였습니다.

대학입학의 기회는 끝내 왔습니다. 1977년 둘째언니는 대학에 갔구요. 저도 이듬해 대학에 갔어요.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그 모습 지켜보는 우리들은 더없이 감격되였습니다. 아버지는 중년에 상처하고 딸 하나 데리고 딸 둘 딸린 어머니와 재혼을 하셨다지다. 그해 큰언니가 열다섯살이고 둘째언니(친언니)가 세살, 제가 한살이였지요. 생계마저 어렵던 그 가난한 세월에 우리 두 의붓자식을 친자식처럼 키워주시고 대학교에까지 보내주신 나의 아버지, 그 다함 없는 사랑과 은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두딸이 대학에 가자 예순이 넘는 아버지였지만 더구나 손 쉴새 없이 허리 펼새 없이 억척스레 일하셨지요. 그러나 한공에 몇십전씩밖에 안 가던 세월이다보니 생활은 그냥 어렵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간혹 하는 고기추렴에도 안 갔지요. 실농군인 아버지는 호도거리농사를 한번 지어봤으면 하는 소망을 지니고 좋은 세월이 오기를 고대하셨습니다.

어느 《5•1절》이였습니다. 명절 휴가에 집으로 갔던 이 딸을 멀리 바래주시던 아버지께서는 담배쌈지에서 꼬깃꼬깃 한 돈 2원을 꺼내주시며 말씀하셨지요. 《돈이 적다. 차비나 하거라.》

그렇게 젊고 영준하던 어버지의 얼굴엔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박혔고 그토록 거쿨진 건장한 체구였던 아버지는 구부정한채 마디가 툭툭 불거진 투박한 손으로 내게 그 돈을 건네고있었습니다. 저는 하염없이 솟구쳐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앞에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른 몸을 돌려 발걸음을 재우쳤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꼭 아버지께 효도하리라 결심하면서...

마반산 양지바른 언덕에 아버지를 모시고

1979년 5월 13일, 아버지께서 사망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부고를 받고 우리 자식들은 정신없이 집으로 뛰여갔습니다.

마반산과 연길은 지척이지만 생활난에 쪼들리던 우리 형제들은 어쩌다 연길로

영화구경을 왔다가 얼음과자 한대씩 사먹고 연길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

이른 새벽에 담배모상판일에 나가셨던 아버지께서는 차사고를 당하였습니다. 머리에 치명상을 입고 오른팔이 끊어진채 피가 즐퍽한 땅우에서 운명하시며 아버지께서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셨고 끝내는 눈을 감지 못하셨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천으로 여러벌 감싼 시체는 선혈로 얼룩져있었습니다.

객사를 당한 아버지는 따뜻한 집안 온돌이 아닌 차디찬 창고 땅바닥에 처참히 누워계셨습니다.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본 자식들은 가슴이 찢어지는듯했고 하늘이 무너지는듯했습니다.

신체가 건장하고 기술이 좋았던 아버지께서 그토록 고대하던 호도거리농사를 눈앞에 두고, 이제 2~3년이면 대학을 졸업할 딸들의 효성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채 어쩌면 이렇게 한 많은 농부의 일생을 마치시는가요!

아, 가난이 원쑤였습니다! 세월도 무정합니다! 한평생 소처럼 일하시던 우리 아버지 성한 몸 하나 온전히 갖지 못하시고 이렇게 세상을 떠나신단 말입니다!

고향분들도 눈물을 주체 못하며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장례가 끝난후 아버지무덤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우리 자식들은 농민아버지의 운명이 너무도 기구해서 목놓아 통곡했지요. 울고울다가 그토록 견강하셨던 아버지앞에서 울고만 있을수 없어서 굳은 맹세를 다지며 산을 내렸습니다.

그후 아버지를 닮아 손재간 좋은 작은 남동생이 먼저 연길시공신촌 기업에 들어와서 일을 잘해 집을 타고 어머니를 모셔왔습니다. 둘째언니와 저는 대학을 졸업하자 큰 남동생과 녀동생을 연길시에 데려다 공부를 시켜 대학을 졸업시켰습니다. 우리 자식들은 각자 직장에서 사업하면서 아버지 같은 로백성들을 위해 성심으로 일했습니다. 지금 큰언니는 대학졸업배치를 받은 흑룡강성에서 그냥 살고있고 우리 다섯 자식은 연길시에서 잘살고있습니다.

아버지 이젠 시름놓으십시오. 여기 마반산은 웅위로운 산도 무슨 명산도 아닌 매돌모양의 평범한 산이지만 아버지가 계시는 이곳은 영원히 우리 형제들이 오매에도 잊지 못하는 마음의 고향입니다.

이른봄부터 산나물이며 산열매며 마지막 락엽 한잎까지도 먹을거리, 부업거리로 전부 주고나서 빈 몸으로 소리없이 겨울속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산 마반산은 영원한 아버지산입니다.

아버지 나의 영원한 마반산아버지, 해마다 봄이 오면 만물이 소생하는데 아버지께서도 다시 한번 소생할수 있다면 연길집에 모시고 가서 한번만이라도 고기국밥을 배불리 대접하고싶습니다. 따뜻한 새옷을 해드리고싶습니다.

세월이 좋아져 지금 연길시에서는 농민들도 의료보험, 양로대우를 향수하면서 행복하게 사는데. 단 한번만이라도 아버지를 모시고 따뜻한 아빠트에 살면서 함께 락을 나눠봤으면…이 딸의 십년 생명으로 아버지의 하루 소생을 바꿀수 있다면 달갑게 달갑게 그렇게 해드리련만!

아버지, 이젠 편히 눈 감으시고 쉬세요! 아무런 근심걱정하지 말아주세요. 래세에는 꼭 못 다한 효성 다해드리겠습니다! 아버지께 큰절 올립니다!

/ 박동선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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