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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민족간부 채규억선생님을 추모하여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4.02.14일 14:36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고 우수한 당간부이며 한평생 민족교육사업에 충성한 훌륭한 민족간부이고 장춘시조선족로인협회의 전임 회장이며《로인문고》의 주필이였던 채규억선생님은 1월 31일 밤 11시 27분에 페암으로 88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나갔다.

2월 2일, 채규억선생님이 근무했던 단위, 로인협회에 알리지 않고 가까운 친척,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추도식, 결별식이 없이 다만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손자와 손자며느리 여덟 식구들만 그와 작별을 하고 채규억선생님의 생전 유언대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그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1994년 《로인문고》편집부 성원들과 함께 있는 채규억선생님 (앞줄 중간사람)

우리는 채규억선생님을 잃은 침통한 비애와 그이의 마지막 길을 떠나보내지 못한 애절한 심경에서 오래도록 헤여나오지 못했다.

채규억선생님의 일생은 당의 교육사업, 특히는 민족교육사업에 헌신한 일생이 였고 한평생 꾸준히 배우면서 인민을 위해 열심히 봉사한 일생이였으며 그이는 로년에도 계속 열심히 배우고 보람차게 일하면서 황혼을 눈부시게 장식한 로인들의 훌륭한 본보기이기도 하다.

채규억선생님은 1946년에 혁명사업에 참가해서부터 1987년 12월에 리직할 때까지 장장 42년간 줄곧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처음엔 고향마을의 민영소학교의 교원, 교장으로 일했고 토지개혁에도 참가하였으며 후에는 훈춘초중의 수학교원, 공농문화보급학교의 수학교원, 연변 2고중의 수학교원과 공청단서기로 일했으며 훈춘에 있는 연변4고중의 당지부서기로 일하시다가 1958년에 길림성교육청으로 전근했다.

그후 30년동안이나 선후 민족교육과의 부과장, 민족교육처의 부처장, 기관당위 전직 부서기, 제2서기를 력임하였으며 한때는 당의 파견을 받고 룡정혁명위원회의 부주임, 김시룡농업대학 부주임, 통화사범학원 당위서기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이는 다년간의 교원사업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을 뿐만아니라 길림성교육청의 민족교육담당자로서 길림성 산재지역 민족학교들의 상황을 조사, 알아보고 유수, 매하구, 류하 등지에 조선족중소학교를 건설하였으며 교원들의 수준향상을 위해 통신수업반도 꾸리고 성교육학원의 민족교육과에도 관심을 돌렸으며 전 성 교수연구활동도 조직했으며 민족의 후대양성을 위해 크나큰 공헌을 하셨다.

리직후에도 길림성의 초중졸업 시험, 고중입학 시험과 조선어 시험의 총심사를 맡고 임무를 원만히 완성하였다.

채규억선생님의 일생은 끝없는 배움의 일생이 였다.

1927년 5월 23일(음력 정묘년 4월 23일) 훈춘시 하다문향 쌍신촌에서 평강 채씨의 제 24대로 태여난 채선생님의 유년시절은 몹시 어려웠다.

그는 다섯살때 경원 채씨네마을의 참안과 백부가 일본놈들에게 참살당하는것을 목격하였고 8살에는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서부터 어머니 해주 오씨를 따라 농사일도 도와주고 장사에도 따라다녔으며 11 살 어린 나이에 인쇄공장의 학도공으로 일하면서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생활고에 시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그는 공부만은 놓지 않았다.

2년동안 서당에 다니면서 천자문도 배우고 일본어도 배웠고 2년동안 민영소학교와 훈춘해성소학교도 다녔고 13살에는 훈춘국민고등학교라는 중학교에 입학하여 광복하던 해에 졸업하였다. 그는 교육사업에 참가한 후에도 계속 꾸준히 공부하였다.

훈춘초중에서 수학교원으로 있을 때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부분은 자기가 먼저 자학하고나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성교육청에 전근한 후에도 과외시간을 리용하여 학습을 견지하셨다.

1962년에는 온주시속기통신학교를 졸업하였고 1963년부터 1966년까지 4년동안 성직속기관 과외학교의 중문학부를 다녔으며 1986년에는 세계어학습반에도 참가하였다.

채선생님은 리직후에도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6년동안이나 길림성로간부대학 게이트볼 초급반, 연구반과 보건반을 다녔고 1989년부터 로간부대학과 지질학원에서 꾸린 가정용전기제품강습반을 동시에 다니면서 반도체라지오, 록음기, 텔레비죤 등 각종 가정용전기제품의 조작원리와 수리기술을 학습하였다.

1950년에 입당한 로당원이며 청급 로간부인 그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로천수리사》와 무명 《뢰봉》이 되여 길거리에서 무료로 전기제품을 수리해주었고 때로는 집에까지 따라가서 수리해주기도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989년 10월부터 반년동안 그는 223차의 무료봉사를 하였다.

1993년에는 건강법국제훈련반에 참가하여 졸업장을 탔으며 1997년부터는 컴퓨터지식을 학습하고 타자하는 방법을 배워 한어, 조선어, 일본어 3가지 문자로 타자할수 있었고 자료 찾기, 이메일 보내기 등 컴퓨터기술을 장악하였다.

채규억선생님은 우리와는 남다른 특수한 연분이 있다.

변철호의 말대로 우리는 《삼형제》이며 채선생은 《우리 삼형제의 맏이》였다.

우리 세 사람은 중국에서의 첫번째의 우리 말 로인잡지인 《로인문고》(후에 《로인생활》로 개칭) 를 창간하고 4년간 어렵사리 경영하면서 두터운 우정을 맺었다.

그 당시 우리 나라에 《소년아동》,《청년생활》,《연변녀성》등 우리 말 잡지들이 많았지만 유독 로인들의 잡지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 발양하며 조선족로인들에게 정신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1994년부터 《로인문고》를 발간하였다.

잡지의 취지는 광범한 조선족로인들의 념원을 반영하고 《로인들의 다정한 길동무가 되여주고 로인들의 친근한 벗이 되고자 함》이였다. 《로인문고》의 발간은 사회 각계 유지인사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성인대 비서장이였던 리정문주임은 《로인문고》의 창간호에 축사까지 보내주었다.

당시 우리가 채규억선생님에게 《로인문고》를 함께 꾸리자고 청을 들자 그는 아주 선뜻이 승낙하였다. 그리하여 채선생님이 사장 겸 주필을 맡고 변철호가 출판 및 발행담당 부주필, 김수영이 편집 전담 부주필이 되였다.

그때로부터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로인문고》를 꾸리느라 《누가 시키지도 않는 고생을 사서 하면서》 《환난지우》가 되였다. 우리는 한푼의 보수도 받지 않았거니와 오히려 자기들의 돈을 밀어넣어야 했다.

채선생님은 70고령의 청급간부였지만 시종 우리와 함께 동분서주하며 원고를 조직하고 잡지를 인쇄하고 발행하느라 진땀을 뻘뻘 흘렸다.

변철호는 자전거를 타고 눈길을 달리다가 넘어져서 둔부뼈가 골절되여 몇달동안 병원에서 고생했지만 끝내 지팽이신세를 면치 못했다.

우리의 헌신적인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4년간 발행한 《로인문고(로인생활)》는 중국조선족로인협회의 《교과서》와 광범한 로인들의 《길동무》의 역할을 했으며 우리 말 로인잡지가 없던 공백을 메웠으며 동북3성 조선족로인협회의 경험교류와 협력 등 로인사업의 광활한 길을 개척함에 일조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채규억선생님은 1960년대초부터 반세기나마 우리와 가까이 상종한 오랜 친구이며 또 김수영의 인생의 고비마다에 튼튼한 버팀목이 되여준 은사이기도 하다.

우리 두 사람은 1960년 8월에 연변대학을 졸업한 그때부터 채선생님과 상종하기 시작했다. 다년간 사업하다가 연대 중문학부를 다닌 변철호는 졸업하자마자 직접 장춘시에 배치받아 근 30년간 줄곧 교육사업에 종사하다보니 자연 성교육청의 민족간부인 채선생님과 거래가 많았고 게다가 년령이 비슷하고 두분 다 일찍 사업에 참가한 토지개혁간부인지라 자연스레 가까운 벗이 되였다.

김수영은 처음 사업에 참가할 때부터 채선생님과 인연을 맺었다. 1960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졸업생 6명이 길림성교육청의 부름을 받고 민족교육과에 와서 길림성산재지구의 조선족소학교 교원 통신수업반을 꾸리라는 임무를 받고 길림과 통화로 3명씩 배치되였는데 그때 채선생님은 민족교육과의 부과장이였다.

1977년 료녕성교육학원에서 통화고중에 있던 김수영을 데려가려고 했을 때 채규억선생님이 《수영선생은 우리 길림성교육학원에 데려오련다》고 끌어당겼고 그때로부터 장춘으로 전근시키려고 장장 7년동안이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1983년에 채처장이 통화사범학원의 당위서기로 통화에 부임해서부터 다년간 《장백산》잡지사를 여러 모로 관심을 돌렸고 1990년 《장백산》잡지사가 장춘에 입성한 후부터 채규억선생님은 또 《장백산》잡지의 고문이 되여 물심량면으로 후원하면서 자주 상종하게 되였다.

1994년부터 우리 세 사람은 《로인문고》를 출간하느라 《3위1체》가 되였고 2002년에 채규억선생님이 장춘시조선족로인협회 회장직을 맡은 후에는 우리를 모두 고문조에 가담시켰기에 래왕이 계속 빈번했다. 채선생님은 또 2002년부터 변철호가 주요 책임을 맡은 장춘조선족사 편집위원회에 초빙되여 교육사 부분을 책임지고 다년간 많은 심혈을 몰붓기도 하였다.

우리의 친절한 지도자이고 친밀한 벗이였던 채규억선생님은 영원히 다시 돌아올수 없는 길을 총총히 떠나갔다.

《생로병사》는 인생의 자연법칙이라 비록 채선생님의 몸은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그의 고상한 품성과 미덕은 그의 눈부신 업적과 더불어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

고 채규억선생님이시여, 고이고이 잠드소서.

/ 변철호 김수영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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