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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민족교육의 공로자-채규억 선생을 기리여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1.09일 14:03
―통화사범학원 전임 당위서기 채규억선생 서거 1주년을 기리여



장춘의 유지인사들과 함께 잊혀진 조선족렬사들의 자료를 수집정리에 나선 고 채규억선생(중간).

일년전, 채규억선생은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침이슬마냥 조용히 자신이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정청장급 고위급간부인 그가 11년동안 장춘시내를 돌면서 가전제품 무료수리를 한 자원봉사자의 형상은 나의 심령에서 지워지지를 않는다.

채규억선생은 40여년동안 길림성의 민족교육사업에 혁혁한 공로를 이룩한분이다.

19세에 교편을 잡은 그는 자신의 능력과 열정으로 교육계의 인정을 받아 31세에 길림성교육청에 최초로 설립한 민족교육과 부과장이 되였고 교육청기관 당총지 전직 부서기직을 담임, 후에는 룡정현혁명위원회 부주임, 룡정 동성 김시룡농업대학 부주임을 담당하였다.

개혁개방초기 그는 51세에 또다시 길림성교육청에 돌아와 민족교육처 부처장, 기관당위 전직부서기(부청급)직에 있다가 통화사범학원 당위서기(정청급)로 임명되였다.

내가 채규억선생의 성함을 처음 접하게 된것은 1985년 통화에 있을 때였다. 예전에 대학교가 없던 통화시에 개혁개방의 덕분으로 통화사범학원이 새로 설립되여 당시 전 지구의 특대뉴스가 되였다.

뜻밖에 학원의 당위서기가 채규억이란 조선족분이라고 하였다. 나의 고중선생님 몇몇분이 학원에 전근되여 교편을 잡았는데 그들이 채규억선생에 대한 평가가 좋았다.

원래 통화사범학원 당위지도부 성원들의 단결이 문제가 되여 상급에서는 흉금이 넒고 인품이 좋으며 능력이 있는 채규억선생을 통화사범학원 당위서기로 선정하였다고 한다.

그가 부임한후 당위지도부의 단결문제는 재빨리 해결되였고 학원의 건설에 튼튼한 뒤받침이 되여 그가 1987년 임기를 마칠 때 통화시정부는 영예상을 수여하여 그의 공로를 기리였다고 한다.

1990년 《장백산》잡지사가 장춘에 들어온 다음 우리는 채규억선생과 친숙한 관계가 되였다.

《장백산》잡지사는 장춘시 남관구에 자리잡았는데 채규억선생은 남관구조선족로인협회 회장, 장춘시조선족로인협회 부회장으로 활약했기에 우리는 그와 련락이 잦았었다.

내가 큰 감동을 받은것은 채규억선생과 장춘 유지인사인 변철호선생, 김수영선생 등 “삼인조”가 1994년에 우리 말 《로인문고》를 창간한 일이다.

그들은 경비가 없고 사무실이 없고 경험이 없는 “삼무”상태에서 책임감과 사명감 하나만을 갖고 길림성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이는 로인생활잡지를 펴낸것이다.

주필인 채규억선생과 부주필인 변철호선생은 잡지발행을 위해 자비로 성내 각 시, 현을 돌았고 부주필 겸 담당편집인 김수영선생은 업여시간을 리용하여 원고편찬을 하였다.

《로인문고》는 4년동안 20호를 펴내고 1999년 그믐날 변철호선생이 자전거를 타고 잡지발행을 하다가 얼음판에 미끌어져 다리뼈가 끊어지는 바람에 막을 내렸다.

그후 채규억선생은 다년간 장춘시조선족로인협회 회장직을 담임하여 매년 11월이면 《길림신문》과 《장백산》발행회의를 가졌다. 나도 몇번이나 그가 조직한 이 행사에 참석하여 신문과 잡지에 대한 로인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수 있어 우리들의 사업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20여년간 채규억선생과 접촉하면서 그가 나에게 준 감명깊은 인상은 세가지였다.

첫째, 그는 정청급 리직간부로서 장춘시에서는 몇몇 안되는 조선족고위급간부였지만 그의 몸에서는 전혀 고위급간부란 틀을 찾아볼수 없다. 말수 적고 돈후한 인품, 언제 봐도 동네에서 존경받는 그런 어르신이였다.

둘째, 그는 고희가 넘는 년세에도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장춘시내 어느 곳을 안 다닌데가 없는 로익장(老益壯)이였다. 식성도 좋아 어느 한번은 아침식사에 콩물 여섯그릇과 기름튀우개(菓子) 7개를 먹었다고 하여 우리를 놀래웠다.

셋째, 그는 항상 사회에 유익한 일을 찾아하는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자신의 가치체현이라고 생각하는분이다. 《장백산》잡지가 출간될 때마다 《장백산》의 고문인 그는 늘 잡지사를 찾아 20여부의 잡지를 가져다 로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런 일은 젊은 사람을 시켜도 될터인데 왜 선생님이 몸소 나서시는가 하는 우리의 말에 그는 《일이 있어서 움직이는것은 재미》라고 말한다.《》

20여년간 채규억선생과 접촉하면서 그로부터 받은 감명이 깊었지만 그때까지도 우리는 그가 장춘시내에서 가전제품 무료수리 자원봉사를 했다는 사실을 모르고있었다.

2010년 11월, 채규억선생의 건강이 안 좋다는 말을 듣고 나는 신문사 기자와 함께 취재 겸 병문안을 갔을 때 처음으로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였고 후에는 그와 절친한 관계인 변철호선생의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1988년, 정청장급 리직간부인 채규억선생은 한가한 생활속에서 주변사람들로부터 종종 이런 말을 들었다. 《전기밥솥이 고장나서 요지음은 또다시 재래솥으로 밥을 짓는다, 반도체라지오가 고장이 나서 뉴스를 듣지 못하게 되였다, 텔레비죤의 화면이 얼룩얼룩하다, 세탁기가 고장이 났는데 수리할 곳을 찾지 못한다…》

그때는 개혁개방의 덕분으로 적지 않은 가정에서 몇개의 가전제품을 사용했는데 고장이 나면 수리할 곳을 찾지 못해 사람들에게 불편을 가져다주었다.

물리교원출신인 채규억선생은 예로부터 전기제품수리는 그의 장기였다. 그는 서민들의 목소리를 귀에 담고 길림성로간부대학을 다니면서 가정용 전기제품 수리자격증 두개를 동시에 따내였다.

1989년 여름, 그가 거주하고있는 남호주택구 로천거리에는 이런 풍경이 나타났다. 자그마한 접어개는식(折疊式) 탁상과 의자, 도구상자, 《가전제품무료수리》간판, 주인공은 회갑을 넘긴 무던한 조선족로인이였다.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몰려들었고 가전제품이 고장난 집에서는 그 물건을 들고 왔다. 그때로부터 1999년까지 채규억선생의 가전제품 무료수리 자원봉사활동은 11년이 지속되였다.

11년동안, 채규억선생은 자전거에 그 《로천수리부》를 싣고 장춘시내 각 구역의 주택거리를 돌면서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가 수리한 품종은 반도체라지오, 전자관라지오, 록음기, 텔레비죤, 전기밥솥, 마이크로웨브 등이였고 운반하기 불편한 세탁기, 랭장고 등은 직접 집에 가서 수리해주었다. 간단한 부속품은 그가 사전에 마련한것인데 그것도 무료였다.

11년동안, 채규억선생은 장춘시 남관구조선족로인협회 회장, 장춘시조선족로인협회 부회장, 《로인문고》 주필, 길림성조선족중등전업학교 림시시험출제인(出題人)과 총감독 등 사회직무를 담임하였지만 그의 대부분 시간은 가전제품 무료수리 봉사로 이어졌다. 사계절을 가리지 않았다.

11년동안, 채규억선생의 봉사활동의 원동력은 돌아기지 않은 물건을 돌아가게 만들고 《죽은 물건》을 부활시키는 과정이 흥미로왔고 서민들의 기쁨으로부터 그의 존재가치를 보았기에 그는 항상 즐거웠고 보람을 느꼈다. 누가 물어도 그의 신분은 언제나 옛날의 물리교원이였다.

11년동안, 채규억선생은 수첩에 가전제품 무료수리 일기를 적었다. 어느날, 어느 거리에서 무엇무엇을 수리한 명세, 집에 찾아가서 수리해준 품종과 그 사람의 집주소와 전화번호.

그는 매년 평균 200여차의 봉사활동을 하였고 하루에 평균 10여종의 가전제품을 수리하였지만 사회적으로 그가 이런 봉사활동을 한다는것을 알고있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는 그저 이 일을 말없이 꾸준히 해왔을뿐이다.

1989년부터 1999년, 62세에서 72세까지, 장장 11년동안 한 정청급 리직간부가 무더운 여름과 혹한의 겨울을 막론하고 사시절 장춘시내를 돌면서 가전제품 무료수리 자원봉사를 하였다는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로서 믿어지지를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사실이였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이 있다. 2014년 1월 31일, 이날은 갑오년 음력설이였다. 그날밤 11시 27분, 채규억선생은 병원의 병실에서 87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유언으로 가족들은 누구에게도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소속한 단위에도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응당 있어야 할 성대한 영결식도 없었다.

평생을 민족교육과 사회봉사를 위해 특이한 신화를 엮은 그는 한 보통서민의 신분으로 그렇게 이 세상을 마감하였다.

채규억선생을 회억하면서 나는 늘상 이런 감탄을 거듭한다― 세상에 이런 고위급간부도 있는가!

/ 남영전 2014년 12월 24일 장춘에서

편집/기자: [ 남영전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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