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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불러보는 아버지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4.06.20일 16:11
해마다 추운 한겨울이 지나고 꽃샘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나는 청명절을 손꼽아 기다린다. 어머니가 세상 뜬 이듬해부터 청명절은 나의 명절이였다. 그날이 되면 꼭 어머니산소로 찾아간다. 어머니가 보고싶었다. 거기 가서 어머니한테 제사상을 차려드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고있다는것도 알려드리군 한다.

장춘에 온지도 어언 20년이 넘는다. 내가 산소에 가지 못할 때면 꼭 고향친구나 친척들에게 부탁하여 산소에 가서 어머니께 술을 부어드리게 한다.

그런데 나는 산소에 갈 때마다 마음 한쪽구석이 허전함을 금할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 어머니 산소에 제사상을 차리고 술을 붓고 절을 올린 뒤 동쪽하늘을 바라보며 가슴속으로 《아버지도 함께 와서 드세요》라고 외우군 한다.

더구나 금년 청명절은 나의 마음을 류달리 설레게 하였다. 60여년전에 피끓는 청춘으로 조선전쟁터에 나갔다가 전사하였고 오랜 세월동안 오매불망 고향에 돌아오기만 바라던 영령들이 중한쌍방의 합의와 관련부문의 공동한 노력으로 한국을 떠나 눈물겹게 집으로 돌아왔다. 듣기로는 해당 부대의 유가족들이 DNA검사를 하고 심양에 세워진 지원군렬사비에 명단을 새겨넣는다고 한다.

그럼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 계실가, 아버지도 돌아오신다면 얼마나 좋으랴. 렬사비에 아버지 이름을 빠치지 말고 새겨넣어야 할텐데, 아버지가 돌아오신다면 어머니와 합장해드릴텐데, 그러면 마음이 얼마나 후련할가... 청명에 화피창렬사릉원에 가서도, 장춘렬사릉원에 가서도 아버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의 머리속에서 맴돌이쳤다.

아버지는 1945년 길림성 통화 류하현에서 동북항일련군에 입대하여 194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47년 리홍광지대 166사 피복관리장으로 있으면서 가족을 통화로 데려왔다. 그뒤 아버지는 심양을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한후 항미원조전쟁에 나가셨다. 모두들 나를 유복자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태여났을 때 아버지는 전장에서 싸우고계셨다.

내가 두세살때인것 같다. 어머니는 나를 보고 《아버지 언제 오나 머리 긁어보렴.》 하군 하였다. 처음에 어떻게 긁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후에는 언제나 앞이마를 긁은 생각이 난다. 동네 이모랑 오시면 나에게 《뒤통수를 긁으면 아버지가 오래 있다 오신다》고 했기때문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싶었던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네살때이다. 우리 집에 아저씨 한분이 오셨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분을 보자 대성통곡을 하시였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으나 그저 할머니와 어머니가 너무 슬피 우시니 따라 울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저씨를 마주하고 앉아 울었고 나는 구들 한켠 벽구석에 엎디여 엉엉 울었다.


어머니는 27세에 두 딸을 거느린 청상과부로 되였다. 어머니는 억척스레 일했다. 그때 군렬사가족으로 무휼금이 나왔지만 생활유지에는 퍽 부족하였다. 어머니는 닥치는대로 일하였다. 삯빨래도 하였고 식당의 식모도 하였고 묘포에 가서 벼모를 키우는 일도 했고 지어는 남성들과 함께 량식마대를 나르는 일도 하였다. 나중에 군속피복공장이 세워지면서 재봉공으로 들어가 고정된 일자리가 있게 되였다.

내가 소학교를 다닐 때였다. 오후에 좀 일찍 하학하면 나는 어머니의 공장에 달려가보군 했다. 어머니는 애들이 공장에 오면 안된다고 했지만 나는 어머니가 윙윙 돌아가는 전기재봉침에 대낮에도 전등을 달고 일하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여 자꾸 그곳으로 달려가 접수실 할아버지한테 넉살을 부리고 들어가군 했다. 하긴 내가 가면 아버지를 못 본 애라고 가여워할뿐 누구 하나 나를 막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 가보면 생산지표그라프가 있었는데 어머니 이름우의 줄이 제일 높았다. 어머니는 생산모범이였다. 주일날도 휴가도 별로 없었고 밤에는 퇴근후에도 일을 더하군 하였다. 언제나 나는 할머니가 지어준 저녁밥을 먹고 한잠 자고 깨여나보면 그때 어머니가 돌아와 저녁식사를 들고있었다.

밤중에 소나기가 오면서 바람이 불면 낡은 집 지붕이 새여 집안구들에 비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우리 바로 옆집의 아저씨는 비옷을 걸쳐입고 지붕에 올라가 집수리를 하였지만 어머니는 비옷도 없이 맨옷바람으로 찬비를 맞으면서 지붕에 흙을 떠올려가면서 수리하였다. 이런 어머니를 지켜보는 나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 가정을 이끌어가는 어머니의 두어깨는 너무 무거웠다. 사람들은 차마 보고만 있을수 없었던지 어머니에게 재가를 하라고 소개하군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모두 거절하자 후에는 누구 하나 이 일을 입밖에 더 꺼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는 렬사의 자녀들에게 이붓아버지 밥을 먹이고싶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스물이 넘도록 한번도 《아버지》라는 말을 입밖에 내보지 못했다. 동학들에게도 아버지에 관한 말을 할 여건이 있으면 《아버지》 세 글자를 입에 담기 두려워서 그 말을 아예 삼켜버리군 했다. 그러나 《아버지》 세 글자는 나에게 어마어마한 존재였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 첫 학부형회의에서 학급담임선생님은 어머니에게 내가 장난기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어머니는 나를 앉혀놓고 《너는 아버지가 혁명을 위해 몸까지 바쳤고 지금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있는것이 무엇때문인지 알겠지?》라고 하였다. 단 한마디 말씀이였지만 나의 가슴을 퉁퉁 두드리는것 같았다. 나는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저의 행동을 보세요》라고 한마디로 대답하였다. 나는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하고 학교 각항 활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그해 나는 전 학년에서 1등의 성적을 따내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언니가 사범학교에 다닐 때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때 언니는 나에게 《우리의 아버지는 의로운 일에 몸 바쳤으니 우리는 꼭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학생이 되여야 한다》고 편지로 나를 고무격려하였다. 언니의 그 말은 그때에도 그랬고 그후 나의 한평생에 계속 아버지를 따라배워 의로운 일에 헌신해야 한다고 나를 가리키고있다.

혁명렬사의 후대라는 영예로 나라의 훌륭한 일군이 되여야 한다는것은 나의 좌우명이였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갔고 수많은 가정에 불행을 안겨주였다. 금년 3월 대만 려행차에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병이였던 대만로병사를 만나게 되였다. 그는 금년 87세인데 로병사 양로원에서 여생을 보낸다고 했다. 고향이 섬서성인 그는 유람 명승지옆에 세워진 《로병사양로원》에 살았는데 휠체어로 유람객으로 붐비는 명승지에 나와 휴식의 한때를 보내고있었다. 《전에는 자나깨나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생각이였지만 갈수가 없었지요. 후에 조국의 개혁개방과 량안관계가 회복되면서 고향에도 몇번 다녀왔어요. 여기에 나와 앉아있다가 고향사람이라도 만날가 하여 매일 살피고있지요.》라고 했다.

가이드의 소개로 알게 되였는데 이 로병사들은 국내전쟁시기에 국민당군대에 들어갔다가 포로되여 중국인민해방군으로 편입되고 조선전쟁이 일어나자 중국인민지원군으로 편성되여 조선전쟁에 나갔다가 미군에 포로되여 집체로 대만에 압송되였다고 했다. 이 로병사들은 대만에 온 뒤 장개석의 전략수요에 따라 출전 방어에 령활하게 쓰일 길수리를 하였다고 했다. 피와 살로 닦은 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고생이 막심하였다. 우리 일행은 그들이 닦은 도로를 따라 세계 3대협곡중의 하나로 꼽히는 대만 태로각 협곡을 유람하였다. 그들이 닦은 전략방어의 도로가 오늘날에는 유람길로 변한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부동한 리념과 갈등이 극복되여 지원군의 유해가 한국으로부터 반환되고 대만의 로병사들도 고향을 다녀갈수 있게 되였다. 우리는 세상에 전쟁과 살륙이 없어지고 인류의 평화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금년 청명절날 나는 고향에 가지 않고 길림화피창렬사릉원과 장춘시렬사릉원을 다녀왔다. 나는 고향을 그리면서 내가 직접 제사상을 차려드리지 못하지만 할머니, 어머니가 계시는 통화206병원 뒤산에 떨기떨기 피여나는 진달래꽂속에서 저세상에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만나시기를 간절히 빌었었다.

/리순희 글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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