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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형님, 어찌하여 그렇게 급히 떠나십니까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4.09.08일 14:24
[남영전 특별기고]

저명한 의학박사 고 박운봉교수를 기리여



생전의 박운봉교수(왼쪽)와 남영전선생

8월 4일 오전 9시경, 장춘대화그룹 리규광리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국 서울성모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있던 박운봉교수가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 중환자실로 옮겨져 구급받고있는 상황이라는것이였다.

전화를 놓고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쩌면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5일전만 해도 나는 박형과 통화를 하였다. 전화는 먼저 형수님이 받았는데 근간 박형은 담즙이 흐르는 담낭관이 막히고 간복수가 와서 고무관을 두개나 달고있기에 고생스럽긴 해도 지금은 음식을 조금 들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수 없었다. 박형은 5월 14일 조혈모세포이식이후 입안이 헐어 물 한모금도 못 넘기기에 줄곧 영양제주사로 몸을 지탱해왔던것이다. 옆에서 나의 전화를 듣고있던 박형이 이번에는 예전과 달리 핸드폰을 받아들었던것이다.

6월 15일, 나는 한국에서 중한작가교류회의가 끝나고 즉시 박형의 병실을 찾았다. 그때 박형의 모습은 나를 깜짝 놀래웠다. 형편없이 쇠약해진 몸, 내가 왔다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고 말 한두마디만 하면 가래가 나와 연방 닦아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물 한모금 넘기지 못했다. 듣기로는 백혈병으로 골수이식수술을 받은 환자는 모두 이러한 고비를 넘겨야 한다고 했지만 그의 상황은 너무나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가 너무 맥없고 힘들어하기에 나는 약 10분간 이야기를 나누고나서는 그와 포옹하고 병실을 떠나는데 어쩐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다시 박형을 되돌아볼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힘이 있는것 같았고 기분도 많이 좋아진것 같았다. 나도 따라서 기뻤고 마음이 놓였다. 이제는 그 험난한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단 5일만에 상황이 돌변한것이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였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못 이겨 오전 11시쯤 형수님께 전화를 걸었다. 박형은 혼미상태여서 몸을 움직여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도 기적은 일어날수 있으니 나는 지켜보자고 하였다. 오후 5시쯤, 나는 다시금 형수님께 전화를 걸었다. 박형의 상황은 여전히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8월 5일 오전 11시(한국시간), 한국입국사증이 있는 리규광리사장, 심순애총경리, 리점순녀사(김희재교수 부인) 그리고 나, 넷이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급히 서울성모병원으로 떠나면서 심순애총경리가 형수님께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그렇게 기대했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형은 오전 8시 20분(한국시간)에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시신을 장례식장으로 이동중이라고 하였다. 우리 일행은 맥이 풀려 아무런 말도 할수 없었다.

오후 1시경, 박형의 작은누이동생, 막내동생이 장례식장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장례식장에 모셔놓은 박형의 얼굴은 잠간이나마 뵐수 있었다.

8월 6일 오후 5시 30분, 형수님을 비롯한 박형의 일가친척, 한국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온 박형의 동창생 등 도합 20여명이 박형의 골회함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냈다.

그 이튿날 리규광리사장과 심순애총경리는 형수님을 배동하여 두차례나 한국통상부 중국대사관에 가서 고인의 사망신고확인 및 공증서, 골회이송수속을 하였고 8일날, 인천공항에서 장춘행의 항공권이 만석인 상태에서 용케도 장춘의 관계항공회사와 긴급련락을 지어 형수님과 박형의 작은누이동생, 막내동생 세분이 증가된 남방항공편으로 그날 점심에 박형의 골회를 모시고 먼저 장춘으로 들어오게 되였다.

우리가 타야 할 남방항공은 공교롭게도 기계고장이 생겨 두시간이나 연착되는 바람에 그날 오후 4시 15분 장춘에 도착했을 때는 아쉽게도 오후 3시 장춘에서 진행된 박형의 영결식이 끝난 뒤였다. 김희재교수, 조철, 리춘관경리 등 몇몇 친구들이 대화호텔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있었다. 김희재교수는 내가 F4비자만 있었더라면 이번에 꼭 서울에 가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것을 한탄했고 조철경리는 내가 소식만 알았더라면 나도 서울에 가는데 그러지 못한것을 아쉬워하였다.

박형은 너무 돌연히 떠나갔다. 근 20년 동안 나와 인연을 맺고 깊은 우정을 쌓은 박형, 평소에 련락이 잦았고 자주 모여 재미있게 지내던 박형, 그의 신세를 많이 져 항상 감사의 마음으로 그를 대하던 박형, 엄숙하면서도 유모아적이여서 늘쌍 사람들을 웃겨주던 박형, 단정하고 정갈한 옷차림에 언제 봐도 멋진 박형, 그의 갑작스런 떠남은 지금도 꿈만 같다.

내가 박형을 처음 만나게 된것은 1995년 가을 장춘공항에서였다. 미국의 의학박사 현봉학교수(5∼6년전 80여세로 타계)가 장춘을 방문했는데 현봉학교수가 공항을 나오자 정장차림의 한 멋진 남성분이 그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알고보니 그도 현봉학교수를 마중나온분이였다. 재미있는것은 그날 현봉학교수는 우리 두 사람간의 소개자가 되였다. 현봉학교수는 박형이 몸 담고있는 길림대학제1병원과 국외의과대학간의 학술교류건으로 장춘에 오게 된것이다.

우리는 현봉학교수님을 모시고 장백산호텔에서 저녁식사대접을 하였다. 현봉학교수는 박형의 은사였다. 그의 추천으로 박형은 1987년에 일본 도꾜대학 의학부의 연구생으로 가게 되였고 1993년에 또 미국의 박사후 공부를 하게 되였으며 연구생기간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밤 11시가 넘었지만 박형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다. 박형은 이제 곧 자기 집에 가서 술 한잔을 더 해야 은사님께 례의가 된다고 하였다. 취침중이던 형수님은 바삐 서둘러 술안주가 될만한 과일, 과자 등 식품을 다 찾아내놓았고 은사님에 대한 존경으로 큰 와인잔에 가득 부은 술을 한꺼번에 다 마셔야 했다. 첫인상에 박형은 다소 엄숙하고 까다로울것 같았지만 기실은 솔직하고 정이 넘치는 고급지식인이였다.

박형은 우리 말 문학작품을 즐겨 읽는분이다. 예전에 그는 작가의 꿈을 꾸었지만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연변변방부대 총책임자로 있던 부친의 견결한 반대로 의학의 길을 선택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매호 《장백산》잡지를 권두언에서 마지막쪽까지 다 읽는다고 하면서 어느어느 작품이 인상 깊다는 이야기를 하군 했다.

1998년 가을로 기억된다. 대화그룹 리규광리사장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어느 한분의 소개로 길림대학 제1병원 소화내과의 한 젊은 교수로부터 병을 봤는데 대단한 의학박사라고 하였다. 그는 의학리론수준도 높고 림상경험도 풍부한 아주 훌륭한 의사라고 하면서 저녁에 그들 부부와 같이 식사를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안해와 함께 대화호텔로 오라고 하였다. 그무렵 리규광리사장 부부는 병으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고 나의 안해는 병이 더 엄중한 상황이였다. 동병상련이라고 할가, 평소에 우리는 병치료문제로 련락이 잦았었다. 세팀의 부부가 모이고보니 리규광리사장이 감탄하는 그 젊은 의학박사, 교수가 바로 박형이였다. 그때로부터 우리 세팀의 부부는 종종 대화호텔에 모여 같이 식사를 하면서 박형으로부터 병치료에 대한 좋은 조언을 받았다. 따라서 박형은 간판을 걸지 않은 우리의 보건의사가 되였고 우리의 건강보호신이 되였다. 날이 가면 갈수록 우리의 우정은 친형제처럼 깊어졌다.

2000년이후, 나의 안해의 병은 점점 더 심각해져 1년에도 두세번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번마다 박형이 사전에 병실을 준비해놓아 직접 병실에 들어간 다음 입원수속을 밟는 등 특혜를 받았다. 때로는 밤중에 병이 위독해져 120구급차를 부를 경황도 못되여 박형에게 전화를 걸면 그는 자다가도 뛰여나와 병원의 간호사와 함께 필요한 주사와 약을 챙겨 택시로 나의 집에 도착하여 위급한 고비를 넘기게 하였다.

2003년 7월 13일 오전, 박형과 나는 한 회의에 참석중이였다. 회의가 시작된지 얼마 안되여 박형이 나를 불렀다. 《당신의 핸드폰이 꺼져있어 경순이(나의 안해)가 나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는데 아마도 입원해야 할것 같으니 빨리 가자》고 하였다. 그때는 박형이 자가용이 있었기에 병자는 신속히 병원으로 이동되였다.

14일 점심, 장기간 중병에 시달리던 나의 안해는 갑자기 혼미상태에 빠졌다. 구급을 했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그날밤, 박형은 병자를 돌보느라 병원에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 5시 30분, 병자는 결국 심장을 멈추었다. 시신이 장춘서북쪽에 있는 룡봉장례식장에 옮겨진 다음에도 박형은 나의 친구들과 같이 또 거기서 하루밤을 뜬눈으로 지냈다.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그는 자리를 지켜주었다.

박형과의 접촉이 많을수록 그는 확실히 고명한 전문가라는것을 실감하게 되였다. 그는 장기간 길림대학제1병원의 소화내과주임으로서 만성간염, 간경화, 위장질병, 소화기질병 등 소화과에 속하는 병치료에 의술이 높을뿐만아니라 기타 질병도 환히 꿰뚫고있었다. 무슨 병이란 말만 나오면 어떻게 치료해야 하고 무엇을 주의해야 한다는 답안이 나온다. 그의 진단은 항상 정확했고 치료방법 또한 적절했다. 그래서 평소에 그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그가 병원진찰하는 날이면 그에게 병을 보이려고 사람들이 줄에 줄을 선다. 하루에도 100명 환자를 보는것은 보통이라고 했다. 그가 있는 소화과 입원실은 항상 만원이였고 때로는 복도에도 림시침대를 놓아야 했다.

그는 또 경상적으로 성내 기타 병원의 요청으로 종합진찰팀의 성원이 되여 먼길을 달려 환자의 병명을 적확히 찍어내군 했다. 박형이 있으므로 많은 조선족환자들은 혜택을 받았고 신뢰할수 있는 든든한 의지가 되여주어 행운이였다.

박형은 또 조선족사회발전에 뜨거운 사랑을 가진 열성가이기도 하다. 2005년 4월, 내가 상급의 지시로 길림신문사의 직무를 겸직해야 할 때, 그는 유일한 반대자였다. 곧 퇴직할 나이에 작가로서 글을 써야지 그 고되고 복잡한 행정업무에 말려들 필요가 무엇인가 하는것이 그의 리유였다. 문학애호가로서 그가 나에 대한 희망은 항상 컸기에 내가 그의 희망에 도달하지 못함에 대한 비평이라는것을 나는 잘 알고있다. 하지만 내가 길림신문사의 직무를 겸직한 다음 그는 신문을 꼼꼼히 읽으면서 신문개혁에 대한 조언을 많이 해주어 나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다. 신문사와 《장백산》의 행사에 그는 통지만 받으면 아무리 바빠도 빠짐없이 참석했고 좋은 의견을 내놓아 고문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조선족농촌 의료하향길에 연화조선족향을 찾은 박운봉교수 /최승호기자 찍음

10여년 동안 박형은 의료계통의 대표인물로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의 부회장직에 있으면서 회의때마다 개성 있는 의견을 내놓았고 장춘중의약대학 박사생지도교수 남정형님과 같이 의료팀을 인솔하여 공휴일에 수차례 조선족농촌을 돌면서 농민들에게 무료진찰을 하여 많은 미담을 엮기도 하였다. 2013년 3월, 진흥총회지도기구가 바뀐 다음 그는 진흥총회고문위원회 부주임직으로 활약하였다.

2014년 1월 18일, 총회의 일년총화대회때 박형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김희재교수에게 물었더니 골수이형성증후군으로 진단받고 요즈음은 오전에 치료받으면서 진찰을 하고 오후에는 집에서 휴식한다고 하는것이였다. 그래서 댁을 찾아갔더니 얼굴에 다소 피곤기가 보였지만 정신상태는 좋았다. 입원치료를 받고저 그는 국내외의 관계병원의 상황들을 검토하고있었다.

3월 22일 오후, 총회가 소집한 장춘시조선족민간단체친목회의가 끝난 다음 회장인 신봉철길림성공상학원당위 서기와 김문관 전임 성통계국 국장 그리고 나 세 사람이 박형의 댁으로 병문안을 갔었다. 박형의 정신상태는 여전하였다. 그는 골수이식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그래도 아세아에서 규모가 제일 큰 한국성모병원을 택하는것이 적합하지만 치료비가 만만치 않다고 하였다. 언제나 남의 어려움에 발벗고 나서는 신봉철서기는 여러면으로 도와나섰고 또 4월 13일, 박형의 한국행을 위해 특별히 환송연을 베풀어 박형은 감개무량해하였다.

4월 16일, 박형은 형수님 그리고 골수공급자인 큰누이동생과 함께 서울로 떠났고 5월 14일 조혈모세포이식수술을 받았다. 전화를 걸었더니 박형은 무균특급병실에서 한달간 관찰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온몸이 아파서 못 견디겠다고 하였다. 얼마후 또 전화를 걸었더니 이번에는 형수님이 받았다. 하루에 한번, 그것도 반시간의 면회시간으로 제한된 이 특급병실이지만 박형의 통증이 너무 심하기에 병원측에서는 형수님이 24시간 병자를 동반하는것을 허락했다고 하였다. 그때 박형은 너무 아프고 맥이 없어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때로부터 전화는 언제나 형수님이 받았다.

8월 5일 박형이 떠나간 다음, 그의 막내동생 박운필과 나는 한 호텔방을 쓰면서 침통한 심정을 못 이겨 밤늦도록 박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궁금한 사항은 또 형수님으로부터 알게 되였다.

박형은 도꾜대학 의학부에서 7년 동안 석사, 박사 연구생으로 있었다. 형수님은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그의 일본류학생활을 유지했었다. 박형의 석, 박사 연구과제는 다름아닌 백혈병이였다. 경제난으로 박형은 수시로 자신의 피를 뽑아 백혈병연구실험을 하여 일본에서 특히 외국인에게는 더 까다로운 박사론문을 순조롭게 통과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박형의 백혈병은 그때 어찌하여 심어진 씨앗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번에 서울성모병원측에서는 박형의 골수이식수술을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 리유는 박형(67세)과 골수공급자인 그의 큰누이동생(63세)의 년령, 이식골수의 질량, 병자의 면역력 등 조건이 미달인 까닭일것이다. 하지만 박형은 골수이식수술을 고집했다고 한다. 보수치료는 어떤것인가? 수시로 수혈을 받아 생명을 유지하는것이다. 박형은 남의 피를 받으면서 그렇게 살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백혈병연구 박사로서 조건미달의 상황에서 수술의 모험성을 그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있었을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연히 수술을 선택하였다. 이것은 박형의 담력과 한 지식인의 량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8월 8일 오후 3시, 장춘시 조양구장례식장 박형의 영결식에 길림성인대 전임 부주임 남상복, 길림대학제1병원 원장을 비롯한 임직원,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진흥총회 신봉철회장을 비롯한 회원들 그리고 각계 인사들까지 300여명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장춘에서는 규모가 크고 격이 높은 영결식이였다.

박형, 문화대혁명때의 로3기(老三届)지식청년, 자신의 생명의 피로 연구성과를 올려 중국류학생중 선참으로 도꾜대학 의학부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영예의 소유자, 암세포에 관한 론문이 미국, 일본의 유명의학지에 50여편이나 발표되여 국내외전문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은 유명학자, 소화과치료에서 국내1류 수준으로 손꼽히는 전문가, 48명의 석, 박사 연구생을 양성한 박사생지도교수, 수많은 환자들에게 건강과 복음을 안겨준 소화과 주임의사, 민족의 발전과 부흥을 위해 열성을 다한 고급지식인!

박형은 자신의 일생으로 분투란 무엇인가, 민족사랑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의 량지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안을 남겨놓고 우리곁을 떠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를 외우고있다.

박형이 떠나간지 한달이 되였지만 금년에 85세의 고령이고 식도와 심장질환으로 자주 입원치료를 받는 김영준주임(전임 길림성민위주임)은 지금도 악몽에서 깨여나지 못하고있다. 그가 입원했다는 소식만 알면 박형은 언제나 그의 병실을 찾았고 그의 병력보고를 꼼꼼히 검토했으며 때로는 꽃바구니를 사들고 와서 위로해주던 장면이 늘 눈앞에 생생하다고 한다. 박형의 말만 나오면 그는 목이 메여 뒤말을 잇지 못한다.

치료비를 챙겨주고 환송연을 베풀면서 서울에서 건강한 몸으로 돌아올 환영연을 약속한 신봉철서기는 올 사람은 보이지 않고 갑작스레 비보가 날아왔으니 왜 가슴이 아프지 않겠는가!

장기간 같은 의학계통에 있으면서 박형과 친형제처럼 우정이 두터웠던 남정교수는 소식이 끊겨 박형의 영결식에도 참석하지 못한것을 두고두고 가슴아파한다.

박형이 있음으로 하여 늘쌍 자랑과 자호감을 가졌고 이번에 골수공급자인 박형 큰누이동생의 한국행에 어려움을 해결해준 류천문 총재는 그때 엄격한 리직심계(离职审计)를 받는중이라 몸을 뺄수 없어 서울에 못 간것을 두고두고 가슴아파한다.

박형과 《사돈관계》라고 평소에 모이기만 하면 곧잘 롱담을 하던 김증손교수(며느리가 박형의 석, 박사 연구생)는 박형의 영결식이 있던 그날(8일) 새벽에 소중한 친인을 잃어 불행한 두 친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고 한다.

나의 큰아들과 아래웃층에 살면서 박형은 늘 나의 어린손자놈을 귀여워했고 일요일날 잔치집에 다녀올 때마다 사탕봉지를 챙겨다주어 그를 무척 따랐던 손자놈은 요사이 큰할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제 어미에게 묻는다고 한다.

듣는 말에 박형이 몸 담았던 길림대학제1병원 동료들과 그의 연구생들은 이번 추석날(9월 8일) 박형을 기리는 여러 행사를 진행한다고 한다.

박형과 친형제처럼 지내던 사람들, 박형과 우정이 깊은 동료와 친구들, 박형의 세심한 지도로 출세한 그의 연구생들, 박형의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한 사람들, 어찌 그를 잊을수 있으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를 외우고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곁을 떠나지 않았다.

2014년 9월 3일 장춘에서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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