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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3)—조선의용군의 동북진출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9.22일 09:52
중경에 자리하고있던 국민당통수인 장개석은 일제패망후 전국범위에서 자기의 독재통치를 실현하려는 야심을 품고 세력확장에 서둘렀다. 이를 실현하려면 중국 서남부와 서북부에 모여있는 국민당정예군을 신속히 전국 각지 특히는 전략적요지인 동북에 보내야 했다. 일본이 항복할 기미가 보이자 장개석은 8월 10일에 즉각 팔로군과 신사군에게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일본군 두목인 오까무라 야스지(冈村宁次)에게 비밀전보를 보내 국민당군에게만 투항하고 공산당군에게는 절대 항복하지 말라고 전했다.

8월 14일, 장개석은 대표를 쏘련에 보내 《중쏘친선동맹조약(中苏友好同盟条约)》을 맺게 했다. 장개석을 통해 동북에서 세력을 뻗치려는 미국을 제어하고 전후 동북에서 실리를 챙기기 위해 쏘련은 장개석국민정부와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공산당과 팔로군에 대해 줄곧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미국은 전쟁시 조차법을 연장해 계속 국민당에게 막강한 후원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함대를 동원해 국민당군을 각지에 수송했다.

공산당이 항일군민을 이끌고 섬북과 화동, 화북의 광활한 근거지를 개척했기 때문에 국민당군은 동북으로 오는데 배길과 항공로를 리용할수밖에 없었다. 미군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으며 장개석은 대량의 관원과 정예군을 동북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름진 동북대지는 국공량당의 쟁탈대상일 뿐만 아니라 쏘련과 미국이 세력범위를 확장하는 초점지로 변해갔다.


1945년 봄, 연안 양가령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기간 모택동은 《우리 당과 중국혁명의 최근과 미래 전도로부터 보면 동북은 각별히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지금의 모든 근거지를 다 잃는다 해도 동북만 장악하면 중국혁명은 공고한 기반을 가지게 될것이다》라고 재삼 강조했다.

일제패망을 앞두고 중국공산당에서는 동북근거지 창설에 선손을 썼다. 연안에 있던 팔로군 총사령 주덕은 쏘련군의 진격과 함께 련속 7개 작전명령을 내렸다. 이 가운데 8월 11일 주덕이 반포한 제6호 명령은 다음과 같다.


《쏘련홍군의 중국과 조선 경내로의 진입작전을 돕고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에 참가하고있는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 부사령 박효삼, 박일우는 즉각 소속부대를 통솔해 팔로군과 극동북군 각 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진격해 적을 소멸하는 동시에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함으로써 조선해방의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준비를 하라.》

중국관내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은 주덕총사령의 명령에 따라 신속히 동북으로의 진군길에 들어섰다.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의 300여명 학원과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있던 수백명 조선의용군은 각기 팔로군부대와 함께 동북으로 발길을 재우쳤다.

선전공작을 하는 조선의용군

항일전쟁시기 중국관내에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특수한 국제부대인 조선의용군이 있었다. 1938년 10월 10일, 포화가 울부짖는 무한에서 창립된 반일무장인 조선의용대는 국민당군과 함께 싸우면서 중경까지 갔다가 다시 항일최전선인 팔로군의 태항산항일근거지로 갔다.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의 령도하에서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으로 확대되여 항일근거지 군민과 함께 두려움없이 일제와 싸웠다.

조선의용군은 또 자체조직인 조선독립동맹을 창건하고 유능한 간부를 선발해 동북을 포함한 전국 조선인집거구에 파견함으로써 조선주민들에게 항쟁의 희망을 심어주었고 항일에 나서도록 조선청년들을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중국내 조선 열혈청년들은 조선의용군을 찾아 태항산과 연안으로 왔으며 일제 강제징병에 끌려갔던 많은 조선청년들도 각성하고 조선의용군에 찾아오기도 했다.

하북성 발해연안에는 지금도 논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일제의 강제이주로 10여만명 조선농민들이 하북 발해만 연안에서 벼농사를 짓다 남겨둔 논이다. 당시 하북성 로태(芦台)농장과 란현(滦县)의 백각장(百各庄)농장에 조선농민이 많이 집중되였고 벼 생산량이 많기로 비교적 유명했다. 이곳 조선농민들을 쟁취하기 위해 조선의용군간부들은 비밀리에 집단부락을 다니며 항일구국사상을 선전했다. 패망을 앞둔 일제가 조선인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더욱 가심화함에 따라 많은 조선청년들이 조선의용군을 찾아나섰고 팔로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격했다. 

하북 발해만의 로태농장 

 란현백가장에서 조선의용군을 찾아간 김응삼로인        


현재 길림성 반석시에 살고있는 김응삼(金应三)로인은 하북성 로태농장부근의 백각장이라는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15살이였던 그는 동네 낚시터에 낚시대를 드리운채 친구 세명과 함께 부모 몰래 조선의용군을 찾아 연안으로 갔다. 이들은 진찰기변구에 찾아가 조선의용군을 만났으며 조직의 파견을 받고 연안에 가서 연안군정대학 학원으로 되였다.


김응삼로인은 조선의용군을 찾아갈 때의 일을 회억하며 지금도 자랑스러운 모습이다.

《친구의 아버지를 통해 연안에 조선의용군이 있다는 이야기를 비밀리에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래서 호기심도 있고 또한 조선사람들의 부대에 참가하여 싸워야만 일본놈의 탄압에서 해방될수 있다고 생각하고 갖은 고생을 다하며 연안으로 떠났습니다. 적의 또치까밑으로 기여서 사선을 넘었습니다. 집에 알리면 반대할가봐 낚시대를 팔자로 강가에 드리워 놓았습니다. 그것은 부모들이 보면 팔로군을 찾아간줄 알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한달만에 연안에 도착하였는데 그때의 그 기쁨은 이루다 말할수 없었습니다.》

답사팀이 연길에서 만난 강재렬(康在烈)로인 역시 어린시절을 하북성 란현에서 보냈다. 그는 김응삼로인과 한마을에서 자라면서 서로 잘 알고있는 사이였고 그 역시 부모몰래 진찰기변구의 조선의용군을 찾아갔다.

란현로태농장에서 조선의용군을 찾아간 강재렬로인.


《우리마을 백각장에는 경찰소가 있고 일본놈 한개 소대가 있었지요. 의용군은 가만히 밤에 마을에 와서 얘기도 하고 선전도 하고 그랬지요. 우리는 군분구에 찾아가서 리대성을 만났습니다. 란현 백각장은 진입니다. 그분은 키가 크고 그때 34살이였습니다. (혁명에 참가한지) 한 9년이 된다고 그러던데 그때도 장가는 못가구, 왜놈 망한 다음에 결혼도 하고 그랬지요. 그러니깐 처음에 가서는 전부다 한족이랑 함께 있었는데 한족말 잘 못했습니다. 그때 16살이였으니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른이 하는 일을 얼마든지 할수 있다고 하면서 도로 마을에 보내면 왜놈에게 붙들려 못산다 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옷을 입고 총을 메고 입대했지요. 총길이와 키가 비슷했습니다. 모두들 나를 꼬맹이라고 불렀어요. 12살짜리도 있었는데 형님이 군대가니깐 따라나서 입대했다고 합니다. 》


당시 팔로군 진찰기변구에는 리대성(李大成)을 대장으로 하고 박재남을 정위로 한 190여명 조선의용군이 있었다. 이들은 하북성 로태농장의 일본군 거점을 까부시고 팔로군 기타 부대와 함께 조선의용군선견대에 편입되여 동북으로 향했다.


79세 고령인 강재렬로인은 일제가 패망할 때 일본인을 항복시키고 무기를 빼앗던 이야기를 했다.


《로태농장을 공격할 때 나는 어려서 잘 모르고… 100여명 대원들이 경찰소를 포위하고 일본이 투항했는데 투항하라고 선전했습니다. 국민당이 와서 무기를 압수할가봐 팔로군이 먼저 가서 무기를 빼앗으려 했던것입니다. 처음에 일본놈들이 투항하지 않았는데 후에 편지가 와서 〈우리 처자를 다 보호할수 있는가?〉는 조건을 제기했습니다. 우리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하면서 너덧시간 담판을 하더니 일본놈들이 총을 다 바쳤습니다. 총을 몰수하고는 몇사람이 남아서 거기에 있다가 9월 27일쯤에 동북에 간다고 했습니다. 》


가장 먼저 동북으로 향발한 공산당부대는 리운창(李运昌)이 거느린 기열료군분구의 1만 3000여명 장병과 2500명 지방간부들이였다. 하북에 있던 리운창은 주덕총사령의 명을 받고 8월중순부터 세길로 나누어 동북으로 떠났다. 이 가운데 16군분구 사령인 증극림(曾克林)이 조선지대 450여명을 포함한 약 2500명 장병을 거느리고 동로로 진격했고 그 뒤로 리운창이 3000여명 장병을 거느리고 따랐다.


산해관부근에서 공산당부대에 투항하지 않고 국민당군을 기다리던 2000여명 일본군과 괴뢰군이 그들을 막아나섰다. 증극림은 산해관을 에돌아 가던도중 쏘련군을 만나자 곧바로 산해관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쏘련군의 포격지원을 받아 이들은 천하제일관으로 불리우는 전략요새인 산해관을 점령하고 일본군 잔여세력과 괴로군의 많은 무기와 물품을 로획했다.

한편 연안의 조선혁명군정대학 학원들은 김두봉, 박일우 등 조선독립동맹 지도간부와 함께 장가구를 거쳐 승덕쪽으로 나갔고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있던 조선의용군도 신속히 산해관쪽으로 출발했다.

태항산의 수백명 조선의용군도 동북진출을 서둘렀다.

북평(북경)에서 하북의 조선의용군을 찾아간 최명세로인.


연변에 있는 최명세(崔明世)로인은 비교적 일찍 조선의용군에 참가한 항일로간부였다. 91세 고령인 로인은 청각이 나빴지만 종이에 쓴 질문을 보면서 자기의 경력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섭현(하북성)에 가서 조선독립동맹을 찾아 6월 초하루날에 독립동맹에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정치학습, 군사학습 하다가 8월초에 감자농사를 했습니다. 감자씨를 뿌리러 산에 갔다가 저녁에 각 분대에서 심은 호박을 따서 우리 부대 화식반으로 가져갔습니다. 김응순, 김봉숙이 있다가 〈그걸 모르는구만〉라고 하더니 호박을 메고다니며 〈일본놈들이 투항했소!〉라고 웨쳤습니다. 그래서 호박을 던져버리고 제방에 가서 경축할 준비를 했지요. 섭현 남장의 절당이 숙소 겸 교실이였는데 2중대가 저쪽이고 개인사택에 더러 있고 우리 1중대는 절당칸 하나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교장인 무정이 작은 방 하나를 썼어요. 우린 일본이 투항했다구 떠날 준비를 했는데 8월 29일날 동북으로 떠난다 했습니다. 걸어서 산해관까지 들어왔습니다. 8월 29일에 떠났는데 산해관에 도착한것이 10월 말이였습니다.》

팔로군 뿐만 아니라 신사군에도 조선의용군 화중지대가 있었다. 일제가 강점하고있던 상해에서 탈출해 신사군에 입대한 항일간부 김현대(金显大)로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상해에서 신사군의 조선의용군을 찾아간 김현대로인.


《저는 상해를 탈출해 신사군부대를 찾아갔습니다. 신사군 1사에 편입됐는데 모두들 잘 왔다구 했습니다. (1945년) 3월 12일 좌우일것입니다. 조선동무들이 3사에 다 집결한대요. 3사는 황극성(黄克诚)부대이고 1사는 속유(粟裕)부대였습니다… 조선사람들이 그때 신사군 항일군정대학 5분교에 집결되였는데 조선의용군 화중지대 설립식을 가졌습니다. 그게 강소성북부 소북이라는 곳인데 구체적인 지점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화중지대는 우리가 와서 설립될 때 100여명 정도였을겁니다. 사람이 없었어요. 다 지하공작을 나가고 없었으니까요. 설립식 할 때는 한 70 ~80명 정도 모였습니다.》


태항산에서 출발한 조선의용군 한갈래는 하북성 옥전현(玉田县)에서 의용군선견대와 합쳐 300여명의 조선혁명간부대대를 편성했다. 황극성이 거느린 신사군 3사 참모장으로 있던 왕신호(王信虎), 조선인 김웅(金雄)이 이 간부대대 대대장을 맡았다. 간부대대는 기타 부대와 함께 구문구관(九门口关) 부근에서 일제와 괴뢰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신속히 금주로 나가서 연안에서 온 의용군과 합쳤다.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에 집결했던 조선의용군은 1945년 9월에 출발했다. 료녕성 무순시에 있는 86세 고령인 최강로인은 당시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 학원이였다.

조선의용군 1지대 1퇀 정치부주임 최강로인.

학창시절 조선의용군을 찾아나선 최강로인.

《우리가 연안을 출발한것은 1945년 9월 2일이였습니다. 당시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에서는 연안의 퇀급이상 간부 3000명을 동북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이 간부들을 보호하기 위해 한개 퇀이 따라나섰습니다. 책임자는 림풍동지였습니다. 림풍은 동북출신입니다. 우리 연안에 있던 300명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군정학교 대원들은 이 대오를 따라 동북으로 진군했습니다.

우리들은 황하를 건너기전에 섬감녕변구 백성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았습니다. 백성들은 감이요, 대추며를 우리한테 많이 보내주었습니다. 우리는 파도소리 높은 황하를 목선을 타고 건넜습니다. 황하는 다른 강하고 다릅니다. 파도소리가 높았는데 지금도 잊을수 없습니다. 황하를 건넌후 우리들은 전투태세를 갖추었습니다. 황하를 건너 장가구까지 오는 길목에 일본군과 위군이 투항하지 않고 국민당에 투항하기를 기다리고있었습니다. 전투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기에 긴장하게 전투준비를 하면서 강행군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장가구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들은 장가구에서 태항산 진기로예 그리고 일부 신사군에서 북상하는 대원들과 합류했습니다… 만리장성을 넘으려면 180리 먼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나는 허물어진 만리장성을 넘으면서 그 주변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것을 보았고 감나무, 밤나무가 있는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니 내 어렸을 때의 고향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우리 고향에서 보던 그런 감나무들이였습니다.

허물어진 만리장성을 넘어 그날 밤 승덕교구에 있는 한 마을에 도착하여 중국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백성들집에서 하루밤을 묵게 되였습니다. 승덕은 그 당시 쏘련홍군이 점령하고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의용군 속에는 쏘련에서 넘어온 간부들이 70~80명이나 있었습니다. 쏘련에서 공부하다가 항일전쟁시기 신강을 거쳐 우리 연안의 간부로 되였는데 그들은 쏘련말에 능통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쏘련군사령부에 가서 조선의용군의 력사를 이야기하면서 동북으로 가니 협조해 달라고 했습니다. 당시 동북에는 쏘련군이 동북에서 철수하면 동북을 접수하려는 국민당군이 있었습니다. 쏘련군사령부는 그들의 눈을 속여가며 비밀리에 우리의 동북진군을 협조해야 했습니다.

그날밤, 쏘련군병사들이 길 량쪽에 약 십메터 거리를 두고 서있는 그 중간을 조선의용군들이 발걸음소리가 나지 않게 뛰여서 쏘련군이 마련해준 화물렬차에 탔습니다. 렬차를 타고 금주에 도착했고 계속해서 쏘련군의 화물차를 타고 심양시교구에 있는 조선족마을 오가황, 대석교 부근에 도착한것을 9월말경이였습니다.》


연안에서 출발한 조선의용군은 하북성 장가구에서 태항산근거지의 일부 대원들까지 합쳐 400여명에 달했다. 그리고 금주에서 태항산의 주력인 조선의용군 간부대대 300여명과 합친후 심양에 도착했다.

《하나 둘 셋 발맞춰/총을 메고 나가자


씩씩하고 용감한/조선의 용사들


오늘은 화북거쳐/래일은 만주지나


앞에 장애 물리치고/조국 향해 나가자


진리로 굳게 뭉친/우리 강철대오는


모든 정신과 행동을/인민 위해 노력해


용감히 싸우리라/조국의 해방 위해


끝까지 싸우리라/인민의 자유 위해》


김응삼로인의 회억에 따르면 이 노래는 정률성(郑律成)이 작곡하고 직접 의용군대원들에게 배워주었다. 조선의용군 대원들은 모두 이 노래를 소리높이 부르며 동북으로 진격했다.

조선의용군, 우리의 군인들! 그들은 동북을 거쳐 조국을 향해 씩씩하게 전진했다. 압박과 착취가 없는 사회,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한 삶을 누릴수 있는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뜻을 품고 힘찬 발걸음으로 전진했다. 풍요로운 동북, 운명의 길목에 선 동북의 200여만 겨레가 이들을 기다리고있었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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