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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1)—《8.15》광복의 의미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9.16일 15:29

《모택동의 평가》정순주장군의 서예.

1945년에 들어서서 아마 조금이라도 정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을 얼마든지 판단할수 있었을것이다. 당시 중국내에는 근 200만에 달하는 조선인이 살고있었다. 이들은 동북뿐만아니라 관내 화북, 화동 지역에서 벼농사에 종사하였고 또한 무한, 중경, 상해를 비롯한 대도시에도 일부 조선인 시민들이 살고있었다. 수십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에 《망국노》의 신세로 살아오던 그들은 일본의 패망을 손꼽아 기다리고있었다.

《쏘련군의 땅크가 막 들어왔고 일본놈들이 무기를 놓았습니다. 해방을 받은 우리는 밖으로 뛰여나와 〈만세〉를 불렀습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함께 거리에 떨쳐나와 〈만세〉를 부르며 쏘련군을 환영했습니다.》

《프랑카드를 들고 쏘련군을 환영하였는데 코가 크고 키가 큰 쏘련군이 땅크를 앞세우고 줄을 서서 들어오는데 저 앞고개에서 이쪽 골짜기까지 쭉 늘어섰습니다.》

아마 어린시절 우리는 당시의 이러한 정경을 친히 목격하였거나 로인분들로부터 많이 전해들었을것이다. 지금도 70, 80세 로인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하군 한다. 하지만 일제의 패망이라고 즐거워하던 그때에도 사람들은 저들의 앞에 놓인 운명을 몰랐을것이다. 구경 누가 이 땅의 주인이며 어떠한 정당이 어떠한 정부를 세울것이며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갈것인지? 당시 아무도 이를 명확히 몰랐다. 특히 중국내 조선인들은 자기의 운명이 어찌될지 더욱 몰랐으며 만악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항복하고 그들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였다는 순간의 기쁨에 잠겨있었을뿐이다.

세계반파쑈전쟁이 최후단계에 진입하던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 얄따시에서 열린 《얄따회의》에서는 쏘련군의 동북출병이 결정되였다. 쏘련은 출병조건으로 동북의 대련과 려순에 대한 조차권을 요구했고 중장철도(中长铁路)와 외몽골의 현상유지라는 조건을 제기했다.

쏘련과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타협으로 이 조건은 수락되였다. 한편 태평양전장에서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소모한 미국은 조속히 전쟁을 마무리할 생각으로 이해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일본의 패망은 눈앞에 닥쳐왔다.

시기를 놓칠세라 쏘련군은 8월 8일에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9일 령시부터 동북의 일본관동군에 대한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150만 쏘련군이 일거에 국경방어선을 돌파하여 한주도 안되는사이에 동북전역을 석권하자 8월 15일 점심, 일본 히로히또 천황이 떨리는 목소리로 세계를 향해 항복조서를 선독하였다. 사람들은 만세를 높이 부르며 자유와 해방을 경축했다.

하지만, 평화는 그처럼 쉽게 실현되지 않았고 더우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남이 베풀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였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세인의 시선이 부유한 중국 동북에 집중되였다. 쏘련과 미국이라는 당시 세계 량대세력이 동북을 눈박아 보았고 중국내의 국공량당이 동북을 주시하고있었다.

대흥안령, 소흥안령, 장백산맥으로 둘러있는 드넓은 동북평원은 기름진 땅과 풍부한 광산자원을 가지고있었지만 위도가 높은 동토대였기에 량곡생산이 제한을 받았고 옛날에는 벼농사를 상상도 못했으며 광산개발도 잘되지 않았다.

인류가 19세기에 들어 서서야 동북개척이 본격화되였다. 특히 조선인이 대거 동북에 이주함에 따라 동북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였다.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농민들은 저온지대인 중국동북에서 드디여 벼농사를 성공시켰으며 대량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답으로 만들었다. 이때로부터 동북의 농업발전의 터전이 마련되였으며 동북은 유명한 곡창으로 변했다.

일찍부터 동북에 눈독을 들인 일본제국주의는 《9.18》사변을 통해 동북을 강점하였고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큰 저항이 없이 130여만 평방킬로메터의 국토와 3,800만 인구를 가진 동북을 내버리고말았다. 동북을 강점한 일제는 청나라 말대황제인 부의(溥仪)를 괴뢰황제로 내세워 괴뢰만주국을 세웠으며 조선으로부터 더욱 많은 조선농민을 동북에 강제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였고 동북을 중국대륙 침략과 태평양전쟁의 중요한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해 본격적인 철도부설과 광산개발을 진행했다.

일제가 패망할 때 동북의 선탄생산량은 전국의 49%를 점했고 강철생산량은 전국의 90%이상을 차지했으며 1만4,000킬로메터의 철도선과 10만킬로메터의 도로가 있게 되였다. 당시 동북은 중국의 가장 큰 공업기지였으며 가장 큰 곡창이였다.

부유한 동북을 차지하기 위해 장개석은 웅식휘(熊式辉)를 동북행원(东北行辕) 주임으로 임명하여 쏘련군으로부터 행정권을 인계받으려 했고 두률명(杜聿明)을 동북보안사령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쏘련과 적극 담판하면서 각종 권력을 인계받는 동시에 동북의 일본군 잔여세력과 괴뢰만주국 군인, 경찰 그리고 무장토비 20여만명을 규합했으며 먄마에서 훈련받은 신1군과 신6군을 포함한 정예부대 25만을 동북으로 이동시켰다.

국민당주력군이 모두 중국 서남부에 집결되여있었기때문에 장개석은 미국함대의 도움으로 국민당 정예군을 북상시키는 한편 동북의 한간, 괴뢰군, 지주무장, 특무, 관료 그리고 마적과 류랑배들을 긁어모아 이른바 유지회(维持会)를 설치하였고 무장부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공산당의 중앙주석인 모택동은 민주적인 련합정부를 설립해야 한다는 정치주장을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금후의 투쟁은 어떤 나라를 세우는가 하는 투쟁이다. 무산계급이 령도하는 인민대중의 신민주주의적 국가를 세울것인가 아니면 대지주, 대자산계급이 독재하는 반식민지, 반봉건적 국가를 세울것인가? 이것은 매우 복잡한 투쟁일것이다. 지금 이 투쟁은 항전승리의 열매를 탈취하려는 장개석과 그 탈취를 반대하는 우리와의 투쟁으로 나타나고있다.》

항일전쟁승리의 열매를 보호하기 위해 공산당은 3만 간부와 10여만 팔로군, 신사군을 동북에 긴급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누가 동북을 차지할것인가? 세계반파쑈전쟁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1945년 하반기, 풍요로운 동북은 국공량당이 힘을 겨루는 주요한 쟁탈지로 되였고 또한 쏘련과 미국 량대 세력까지 눈독을 들이는 초점지역으로 변했다.

그리고 전반 중국인민앞에는 두가지 운명이 놓이게 되였다. 장개석을 위수로 한 국민당은 대지주와 대자산계급이 통치하는 독재정권을 수립하려 했고 공산당은 력사적 조류에 순응하고 민주주의적인 련합정부설립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민주주의국가를 건립하려 했던것이다.

동북에 온 공산당간부들은 각지에 공산당조직을 설립함과 동시에 광범한 인민을 단합시키기 위해 군중조직인 동북인민민주대동맹(东北人民民主大同盟)을 조직, 령도하였으며 이를 통해 국민당의 이른바 유지회와 투쟁하였다. 그리고 동북경내 조선족집거지들에도 모두 조선인 민주대동맹조직이 설립되였고 산하에 농민, 청년, 녀성분맹이 설치되여 활발할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집중된 길림성 연변의 민주대동맹 우리 글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东北人民民主大同盟宣言

第二次世界大战은 联合国인 中苏英美의 英雄的战斗에 의하여 东西两方의 파시스트 侵略者德国 및 日本을 粉碎하였음으로 우리는 荣光의 胜利를 获得하고 世界는 东亚의 平和를 实现하였다.

우리 东北地方이 日本의 强盗的侵略을 遭遇한以来 中国人民은 历史上再见할수 없는 血성의 杀害 및 凄惨奴役을 받아 피와 눈물속에서 被辱被害의 十四年이란 긴 黑暗时代를 지내왔다.

胜利의 苏联红军이 东北에 出师하여 日구를 驱逐하고 东亚人民의 가索를 解脱하여 中国国家의 土地를 光复하였다. 우리에게 自由와 幸福의 生活을 가져다준 伟大한 红军에게 우리 人民은 衷心으로 感谢한다.

이번 历史的一九四五年八月十四日에 中苏两国间에는 意义至大한 中苏友好同盟条约이 缔结되여 两国间의 永久한 友谊가 巩固하여졌으니 日구의 再起를 共同防御하며 东亚经济를 共同建设하며 东亚文化를 共同重建하자. 延边一带의 数万中韩住民을 包括한 空前의 劳农青总同맹은 伟大한 红军이 우리에게 준 自由와 幸福을 굳게 하기 为하여 东北人民民主大同맹으로 改造되였다.

그러면 우리의 主张은 무엇이냐. 우리는 彻底히 日구의 残滓分子를 消灭한后 全国绝大多数人民을 基础로 한 统一战线的인 一个의 民主联盟的国家制度의 建立을 主张한다. 우리는 이 国家制度를 新民主主义的国家制度라 称한다. 이것은 人口가 最大한 中国으로써 要求하는 适合한 国家制度다.

우리가 新民主主义의 政治를 主张하는것은 外来의 民族压迫을 驱逐하고 国内의 封建主义的 및 파시스트的 压迫을 废止함에 在하고 此种制度를 废止한后 다시 旧民主主义制度를 建立하지말고 一切民主阶级이 联合된 统一战线的政治制度를 建立함에 在한다. 우리의 主张은 孙中山先生의 主张과 完全히 一致하다.

孙中山先生은 그가 著作한 国民党 第一次代表大会宣言에 《近世各国의 所谓民权制度는 往往 资本阶级이 专有하여 平民을 压迫하는 工具로써 造成되였었는데 国民党의 民权主义는 一般이 平民의 共有가 되고 少数人이 私有할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孙先生의 伟大한 政治的指示다.

中国人民 및 其他一切民主分子는 반드시 이 指示에 服从하여 이를 坚实히 决行하여야할것이며 또 이 指示에 违背하고 反对하는 者에게는 何人이나 何集团이나 一切坚决한 斗争을 하여 이 完全하고 正确한 新民主主义的三民主义 정治原则을 保护하고 发扬하여야 할것이다.

本同盟은 各党派各社会团体 및 宗教团体及男女를 不分하니 本同盟의 纲领과 规约을 承认하고 新民主主义를 为하여 奋斗하려는 사람들은 均一히 个人的으로나 团体的으로나 入盟할수 있다. 各界의 同胞여 新民主主义를 为하여 斗争하자, 勇往直前하여 入盟하자.

                         一九四五年十月

              中华民国东北人民民主大同盟 延边执行委员会

연변집행위원회가 발표한 동북인민민주대동맹 선언문을 보면 연변지역에는 이미 로동자, 농민, 청년동맹을 비롯한 조직이 있었고 이들을 규합해 다시 인민민주대동맹으로 개조한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조선인을 포함한 동북인민민주대동맹은 자산계급이 독재하고 일반인을 압박하는 낡은 제도를 페지하고 모든 민주계급이 련합된 통일전선적인 정치제도를 건립할것을 주장하고있다. 이는 공산당이 주장하는 련합정부 수립주장과 일치하다고할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당시 혼잡한 동북상황에서 모택동의 민주주의 련합정부를 수립할데 관한 주장을 광범한 대중들에게 적극 선전하였으며 중국인민과 중국내 조선민족이 직면한 두가지 운명을 더욱 명확히 밝혀주고있다.

중국공산당 연변위원회는 1945년 11월에 발표한 《中韩民众에게 告함》이라는 글에서 《现下中国全体形势를 考察하면 两个前途가 存在하고잇다! 独裁的统治를 继续하고 民主改革을 不许하고 중국을 苦痛이 重叠한 非独立, 不自由, 非统一, 不富强한 陈旧状态에 退步시키려는것이니, 이것은 日本侵略者로부터 解放된 中国을 黑暗의 中国으로 退步시키자는것이다. 或者는 一切의 困难을 克服하고 全国人民을 团结하고 独裁的统治를 废止하고 民主改革을 实行하고 民主力量을 巩固扩大하고 日寇의 残余를 彻底히 肃清하고 间谍을 惩罚하여 中国의 前途로 하여금 独立, 自由, 民主, 统一, 富强의 新国家가 되게 하려는것이다. 中国의 四亿五千万人口中数百万产业工人, 数千万手工工人, 三亿六千万农民阶级, 其他广大한 小资产阶级, 自由资产阶级, 开明绅士, 其他爱国分子는, 다 第二의 前途를 要求한다.》라고 지적하면서 중국공산당은 이를 위해 24년간을 싸워왔다고 밝혔다.

글은 전국범위에서 민주개혁을 실행하려면 관료자산계급을 대변하는 국민당의 반인민적인 전제정권을 페지하고 민주적인 련합정부를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국민족의 단결을 파괴하고 중국인민의 민주개혁을 저애하는 국민당 전제정권을 반대하고 민주주의기치를 높이 들고 독립과 자유, 민주, 통일, 부강의 새중국을 건설하는 길로 나갈것을 호소했다.

당시 동북경내에는 216만 조선인이 정착해 살고있었지만 《8.15》광복이 되면서 수많은 인파가 조선반도로 밀려감으로써 중국내 조선인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다년간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가꾸어놓은 터전을 버리기 싫은 대다수 농민들은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고 자기의 터전을 지키고 잘 가꾸려 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일제주구와 괴뢰만주국 잔여세력을 모아 유지회를 조직하고 민족리간정책을 실행하면서 대지주와 대자산계급의 독재를 대변하는 국민당보다는 조선인까지 포함한 전인민적인 신민주주의 련합정권을 수립한다는 동북인민민주대동맹과 중국공산당의 정치주장이 더 마음에 와 닿았을것이며 진정 평등하고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인 해방을 위해 싸울 결의를 다지게 되였을것이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동북에 정착해 벼농사에 종사해왔던 이들은 이때로부터 중국인민의 운명을 자기의 운명으로 간주하고 자기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중국에서의 립지를 마련하기 위해 피어린 항쟁을 시작했으며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게 되였던것이다.

《8.15》광복은 중국인민뿐만아니라 중국내 조선인에게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주지 못했으며 새로운 항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였다. 진정한 자유와 해방, 사람마다 평등한 사회는 누가 베풀어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총가목을 잡고 독재정권과 싸워야만이 이루어질수있었던것이다. 이는 중국인민의 운명이고 중국내에 남은 조선인민의 운명이기도 했다.

렬사들을 추모하여 (연길렬사릉원의 한장면) .

《8.15》광복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까지, 중국내 이주해 살아오던 조선이민들이 중화민족의 일원인 중국조선족이 된 이 거창한 력사를 밝혀내고 방송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중국조선족의 력사와 공적을 알리기 위해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선전처와 중앙인민방송국 민족방송센터는 <영원한 기념비>공동제작을 기획하고 답사진을 구성하여 자유와 해방을 위해 중국의 거창한 력사대하속에서 자주적으로 자기의 립지를 다져놓은 중국조선족의 력사를 재조명하고저 본격적인 답사길에 올랐다.

원 동북민주련군 1종대 포병이였던 김인섭(金仁燮)로인은 길림성 화룡시병원에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답사팀을 만나주었다.

침상에 누운 김인섭로인은 《20대 청년들이 무리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지금 사람들이 오늘의 행복이 어떻게 왔는가를 정말 알아달라는겁니다. 내가 목숨이 아까운것보담두 우리 나라가 어떻게 건설되였는가를 알아달라는겁니다.》라는 마지막 소원을 남겼다.

시간은 좀처럼 기다려주지 않는다. 흐르는 강물처럼 정처없이 흐르는것이 또한 력사이다. 60여년전의 그 벅찬 력사를 찾는 우리의 답사길은 쉽지만은 않았다. 로인분들의 베개가에 귀를 대고 마지막 숨결을 느끼면서 그 격정의 나날들을 알아야 했고 력사의 현장을 검증해야 했다. 력사는 거울이다. 력사의 거울로 비춰보지 않으면 자기를 알수 없고 오늘을 사는 자세를 바르게 가질수 없다.

력사를 망각하는것은 배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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