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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2)—쏘련군과 함께 동북에 진출한 항일련군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9.21일 09:23
동북에 진출한 쏘련군에는 특수한 군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일전쟁시기 동북대지를 휩쓸며 간고하고도 치렬한 전투를 진행해온 항일련군장병들이였다. 항일명장 허형식(许亨植)과 리홍광(李红光)을 비롯한 수많은 우리겨레 항일지사들이 동북대지에서 소중한 생명을 바쳐싸웠다. 동북의 심산밀림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제와 싸운이들의 항일의거는 일제식민통치하에 있던 수천만 동북인민에게 특히는 동북에 정착한 조선인들에게 있어서 희망의 등불이였다.

주보중, 김광협, 강신태


쏘련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출하기 위해 1945년 7월에 항일련군 간부들은 중국공산당 동북위원회를 재구성했다. 바이족인 주보중(周保中)이 서기를 맡았고 위원에는 리조린(李兆麟), 풍종운(冯仲云), 왕효명(王效明), 왕일지(王一知) 등을 비롯해 조선인 강신태(姜信泰)와 김광협(金光侠)도 망라되였다. 항일련군중의 조선지사들은 대부분 조선사업위원회를 구성해 조선으로 나갔지만 중국공산당의 동북위원회에 강신태와 김광협을 비롯한 조선인을 포함시킨것은 이들이 동북에서 싸웠던 경력이 있어 동북상황에 대해 익숙한것과 중국동북에 조선농민이 많이 거주하고있는 현실을 고려한 사안으로 추정된다.

한편 주보중은 1945년 9월에 당중앙의 파견을 받고 동북에 온 중공중앙 동북국 서기인 팽진(彭真)을 만나 당조직관계를 회복하였으며 그가 령도하는 동북위원회의 조직관계와 자료, 당비를 전부 팽진에게 맡겼다. 주보중 등은 쏘련군에서의 특수한 지위를 리용해 쏘련군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으며 각지에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고 군대를 모집하는데서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였다.

분공에 따라 주보중은 장춘에, 리조린은 할빈에, 풍종운은 심양에 가서 사업했고 조선인 강신태는 연길에, 김광협은 목단강에 가서 사업하게 되였다. 이들은 쏘련군을 도와 사회치안을 유지하고 당조직을 회복했으며 무장을 확대하였다. 10월에 이르기까지 동북항일련군은 4만여명으로 확대되였으며 일본이 패망한데 비추어 부대명칭을 동북인민자위군(东北人民自卫军)으로 했다.


항일련군 출신인 한족간부 왕효명(王效明)은 길림시에서 쏘련군 길림시 위술(卫戍)사령부 부사령의 신분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길림시 지하공산당원인 리유민(李维民)을 만나 당조직을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우선 량환준(梁焕俊)이 조직한 길림시 조선인해방동맹을 쟁취하고 량환준을 비롯한 조선인간부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그리고 11월 21일에 길림시에서 길림 전성 보안총대를 설립하고 수천명 청년들을 규합시켰다. 길림시와 부근 조선족마을의 청년들도 보안총대에 참가해 한개 대대로 편성되였다.

동북위원회 위원인 강신태[원명 강건(姜健)]는 최명석(崔明锡), 박락권(朴洛权), 김만익(金万益), 강위룡(姜渭龙), 김명수(金明洙), 려영준(吕英俊) 등 22명 동북위원회 연변사업위원회 간부들을 거느리고 9월 18일, 연길 군용비행장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쏘련군의 공격으로 일제가 항복했지만 사실 동북은 무정부상태나 다름없었다. 대량의 일본군 잔여세력이 구석구석 도사리고있었고 무장을 든 수많은 마적떼가 도처에서 백성을 괴롭히고있었다. 게다가 연길, 룡정 거리에는 《국민당 길림성 연변판사처》, 《국민당 연길현 당부》라는 간판이 나붙었고 국민당이 끌어모은 별동대, 보안대, 자위군, 치안유지회가 있었다.

연길에 도착한 강신태는 우선 지희겸(池喜谦), 강동주(姜东柱), 박동운(朴东云)을 비롯한 진보인사들이 조직한 군중조직을 통합시키고 이들을 쟁취함으로써 군중을 발동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9월 19일에 연길시에서는 600명 조선족대표가 4만여명 회원을 대표하여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 대회를 열고 《로동자, 농민, 청년, 부녀총동맹》을 설립하고 강동주를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조직은 연변사업위원회의 지도를 받으면서 10월에는 지희겸이 위원장을 맡은 연변인민민주대동맹으로 개칭되여 폭넓게 군중사업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 시기 최무(崔武), 최문국(崔文国)을 비롯한 개명인사들이 창간한 조선문판의 《한민일보(韩民日报)》가 있었다. 신문은 11월에 《연변민보(延边民报)》로 개칭하고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의 기관지로 되였다. 강동주가 주필을 맡은 이 신문은 첫기부터 모택동의 글 《련합정부를 론함(论联合政府)》을 련재하였다.


쏘련군복장을 입었지만 조선말을 하는 동북위원회의 이 특수한 군인들은 우선 조선족의 두터운 신뢰를 받게 되였다. 더우기 동북땅에서 만악의 일제와 싸웠던 항일련군출신이라는것을 안 조선족청장년들은 다투어 무기를 들고 이들을 따라나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신태는 김만익을 대장으로하는 연길경비대를 조직하여 훈련시켰다.

그리고 최광(최명석 崔名锡), 박락권, 최시영(崔时英)등을 왕청, 룡정, 화룡, 훈춘에 보내 정권건설과 당조직 확건, 무장대 조직사업을 진행하게 했다. 그리고 전윤필(全允弼), 박근식(朴根植), 엄군섭(严君燮)이 거느린 룡정별동대와 리주설, 김수억(金寿忆) 등 조선족농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화룡 평강구 장인강자위대(长仁江自卫队)를 접수해 재편성하고 5개 퇀의 확군계획을 세웠으며 조충렬(赵忠烈)이 거느린 로투구별동대를 연변경비 2퇀 4련으로 편성했다. 그리하여 김만익은 연길에서, 박락권은 룡정에서, 박근식은 화룡에서, 남창수(南昌洙)는 조양천에서, 최광은 왕청에서 각기 조선족무장을 조직했다.

길림성 연길에서 만난 원 독립6사 문서로 있었던 리복룡(李福龙)로인은 조충렬렬사가 당시 부대를 조직하던 상황을 이야기했다.


《저의 상급인 조충렬렬사는 연변에서 무장대오를 조직한 조직자의 한분입니다. 일제가 패망하자 그는 뜻있는 청년들을 모아 청년동맹을 조직했습니다. 연변에서 민주동맹대회를 할 때 그는 로투구(老头沟)지구의 대표로서 회의에 참가했습니다. 회의에서 항일련군출신인 강신태의 보고를 듣고 무장대오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로투구에 돌아온후 청년동맹성원들과 함께 지주집 무장과 당시 치안유지회의 무장을 탈취하여 170여명의 무장을 조직했습니다. 후에 이들은 명월구의 부대와 합쳐 경비퇀을 편성했으며 조충렬렬사는 지도원직을 맡았습니다. 지도원은 반드시 공산당원이여야했습니다. 조충렬렬사는 당시 가장 먼저 입당한분입니다. 연안에서 온 손장상(孙长祥)이 그의 소개인이라고 합디다. 그는 1947년 3월 7일, 길림부근의 사간방(四间房)이라는 곳에서 싸울때 전우들을 엄호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습니다.》

연길에서 만난 조충렬렬사의 차녀 조순복(赵顺福)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했다.

조충렬렬사 유상.         

《8.15광복후 저의 아버지께서는 로투구 청년동맹위원장을 맡으셨습니다. 그이는 당지의 혁명선각자들인 박남언, 임윤식 등과 함께 별동대를 조직하였고 별동대 대장을 맡았습니다. 대오는 170명이였는데 로투구의 탄광과 아마공장, 천보산의 치안유지회를 해산시키고 그들의 무기를 몰수하여 무장했습니다. 어머니의 회억에 따르면 제가 태여나서 얼마 안되여 어머니는 저를 업고 아버지를 찾아 부대에 갔다고 합니다. 부대가 휴식하고있다 하니 아버지에게 나를 보여주려 했던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지금 부대는 휴식하고있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고있는 중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찾아오면 지도원인 내가 어떻게 남을 이끌겠는가?’고 나무람했다고 합디다. 그래서 어머니는 서러움을 참고 다른 아주머니들과 함께 종일 전사들의 빨래를 해주고 떠났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혁명을 위해 가족도 돌보지 않았으며 목숨까지, 모든것을 바쳤습니다. 》

조충렬렬사 묘소 


로투구뿐만 아니라 연길, 룡정, 화룡, 훈춘, 왕청을 비롯한 연변 각지에 모두 조선족청년들로 무어진 크고작은 무장조직이 자발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길림성 화룡시 신광촌에서 살던 윤룡철(尹龙哲) 로인은 박근식[注:박근식에 대해 전문적인 자료는 극히 적다. 김산의 회억한 글 《아리랑의 노래》나 해륙풍 쏘베트근거지의 자료들을 통해 그의 약력을 조금 알아볼수 있다. 박근식은 일찍 형님 박영을 따라 로씨야에서 혁명에 참가하였으며 또 중국 광주에서 황포군관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졸업후 광주의 조선인혁명가들과 함께 광주봉기에 참가하여 싸우다가 해륙풍에 철수하였으며 해륙풍에서 다시 국민당의 토벌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상해를 거쳐 동북으로 갔다. 광주봉기에서 형님 박영은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동북에서 조직을 찾지 못한 박근식은 한동안 고향인 룡정에서 교편을 잡고있다가 광복을 맞이하게 되였다. 광복후 부대를 조직해 공산당을 따라 싸웠으며 당적 회복문제로 한동안 애를 먹었다는 설도 있다. 그후 그는 조선으로 나갔다.]이 거느린 화룡부대에 참가했었다.

룡정별동대


지금 82세 고령인 윤룡철로인은 당시 박근식부대가 조직되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그가 소개한데 의하면 일찍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혁명에 참가해 광주봉기를 겪었던 박근식은 룡정의 동흥중학교(东兴中学校)에서 교편을 잡고있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곧 청년들을 규합해 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쏘련의 중국어방송을 통해 쏘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했다는것을 알고 미리부터 유지인사들을 규합해 환영대회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19일에 3.1소학교(지금의 룡정시실험소학교) 운동장에서 만명군중이 모인 환영집회가 있게 되였다. 지금도 당시 환영대회를 기념하기 위한 커다란 동북해방기념비가 룡정시실험소학교 운동장동쪽켠에 세워져있다. 집회가 있은후 박근식은 청년동맹을 통해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으며 8월 26일에 벌써 룡정별동대를 편성하게 되였다. 별동대는 9월에 그 규모가 이미 600명에 달해 룡정경비대로 재편성되였다. 룡정경비대는 후에 화룡부대와 합병해 연변경비 3퇀으로 편성되고 박근식이 퇀장을 맡았다. 이 부대는 후에 동북민주련군 10종대 30사에 합류했다.

윤룡철로인은 《풍부한 혁명경력이 있는 박근식은 자애롭고도 의지가 강한분이였다.》고 한다.

1945년 10월, 화룡 서성에서 참군한 김병욱(金炳旭) 로인의 회억에 따르면 당시 《남의 집살이》를 하던 그는 먹고 잘 데가 없어 고민하던끝에 부대를 찾아가니 《박반장》이 창고지기부터 시작하라고 했다. 그때 무장대오라고 하지만 변변한 의복이나 무기가 없었고 대원들은 베옷을 입거나 일본군바지를 입었고 혁띠도 없어 새끼줄로 허리를 동이군 했다. 그리고 무기라고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낡은 보총이였고 어떤 대원은 그것도 없어 날창 하나를 차거나 수류탄 몇개를 가지고있었을뿐이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가 사기가 높았고 뜨거운 열기로 전투에 참가했다.


길림군구 사령부와 정치부에서 편찬한 <중국인민해방군 길림성군구군사>수정고를 보면 1945년 9월 당시 길림군구는 길림과 합강(合江) 두개성과 송강성(松江省)의 주하이동지구를 포함한 길합군구(吉合军区)로 되여있다. 주보중이 길합군구 당위원회 서기, 군구사령원 겸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는 장춘지역의 부대를 통솔했고 길림경비사령인 왕효명이 교하, 돈화를 포함한 길림지역 부대를 책임졌으며 연변지역은 강신태사령원이 경비 1퇀, 2퇀, 3퇀을 지휘했다.

길림군구사의 45년 부대편성표 


한달 남짓한 사이에 박락권을 퇀장으로 하는 연변경비 1퇀이 연길에서 조직되고, 최광을 퇀장으로 하는 연변경비 2퇀이 왕청에서 조직되였으며, 박근식을 퇀장으로 하는 연변경비 3퇀이 화룡에서 조직되였다. 뿐만 아니라 훈춘, 안도, 돈화 등지에도 지방보안부대가 조직되여 연변지역 조선족경비부대 총병력은 7,500여명에 달했다. 망국의 한을 지닌 동북의 조선족청년들은 명망높은 항일련군 간부들의 호소에 응해 무장조직에 적극 참가했던것이다.

길림성 연길시 고려촌 광영원에서 만년을 보내고있는 김병욱로인은 당시 박락권부대에 편성되였었다. 그의 회억에 따르면 박락권은 쏘련군복장에 말을 타고 다녔으며 일찍 동북에서 일제와 싸운 항일련군출신으로서 조선사람들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박락권퇀장은 키가 크고 씩씩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는 늘 말을 타고 연설하고 연설이 끝나서야 말에서 내려 자기 방으로 들어가군 했다고 한다.

일제패망후 흑룡강성의 상황은 아주 복잡했다. 쏘련군이 군사관제를 실시하는 상황에서 할빈시는 각종 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장소로 되였다. 동북항일련군의 리조린장군은 할빈에 도착하자 당조직 회복과 확군사업을 틀어쥐였다. 당시 할빈시와 부근 각 현에는 많은 조선족들이 살고있었다. 다년간 일제가 민족리간정책을 실행했기때문에 현지 한족들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사람에게도 불만이 컸다.

연길에서 만난 김정순(金贞顺) 로인은 일찍 흑룡강성 오상현에서 교원사업을 하다가 조선독립동맹에 참가했고 또 조선의용군 3지대 교도대 녀성중대에 참가한분이다. 82세 고령인 김정순로인의 소개에 따르면 당시 흑룡강 조선사람들은 집밖으로 나오기도 두려워했다.

 박락권


《일본놈들이 일본사람은 1등 국민, 조선사람은 2등 국민, 한족과 기타 민족은 3등 국민이라고 획분하였기에 많은 한족사람들이 조선사람을 일본의 앞잡이로 보고 미워했습니다. 일본놈들이 투항한후 우리는 집밖으로도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리조린장군이 할빈에 와서 〈조선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피땀을 흘리며 싸웠다〉고 하면서 〈조선사람 하나도 다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할빈에서 리조린은 신속히 조선독립동맹의 책임자 김택명(金泽明, 일명 리상조 李相朝)과 련계를 가졌다. 할빈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사업했던 사학자 서명훈(徐明勋) 선생의 소개에 의하면 김택명은 1943년에 조선의용군의 파견을 받고 흑룡강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파언(巴彦)현에서 독립동맹을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43년 10월에는 할빈에서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조직했다. 일제가 패망한후 그는 리조린장군과 손을 잡고 할빈보안총대의 조선독립대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할빈의 조선족주민을 보호하고 치안을 유지하면서 계속 확대, 발전되였다.


한편 목단강지역에서는 쏘련군과 함께 동북에 온 김광협이 활발한 활동을 진행해 고려경찰대를 조직했다. 고려경찰대의 50여명 조선족청년들은 일본군이 버리고간 낡은 보총을 메고 허리에 수류탄 몇개씩 차고 목단강시 공화가, 공민가, 평안가를 순라하면서 조선족을 보호하고 사회치안을 유지했다. 목단강시 고려경찰대 대장에 정창호(郑昌浩)이고 부대장에 조운세(赵云世)였다.

고려경찰대가 조직되였던 자리는 목단강시 북방공구공장이였고 후에는 1.21공장으로 바뀌였다고 기록되여있지만 지금은 전부 개발구로 변해 명확히 찾아볼수 없었다.

김광협은 쏘련군의 목단강시 위수사령부 부사령과 공산당의 목단강군구 정위라는 이중 신분을 가지고 조선족무장을 적극 확대해 나갔으며 목단강지역 조선족마을로부터 1,500여명 청년을 모아 조선족부대인 14퇀 3영과 15퇀 3영, 군구경위련을 편성했다. 이들은 한족부대인 14퇀 2영과 37퇀의 반란음모를 분쇄하고 현지 민주정부를 보호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밖에 제2퇀 3영도 조선족 청년으로 구성되였는데 퇀장은 김동규였다.

서명훈선생의 다년간 연구를 종합해보면 당시 목단강지역 조선족부대는 다음과 같다. 


牡丹江军区  司令员 李荆璞 (汉族) 政委 金光侠


       警卫连 连长 赵明善       


十四团 三营 营长 柳昌权 教 导 员 李青松

       副营长 郑昌浩 副教导员 赵云世


十五团 三营 营长 郑求益 教导员 赵石满


保安团 二营 营长 金长权 教导员 姜云鹤


       副营长 郑 友


警卫团   团长 王景坤(汉族)政 委 吴**(汉族)


      副团长 金奉国    副政委 金镇浩


二营 营长 金奉奎 副营长 张应天


四团 四营 营长 朴学甫 副教导员 张东植


김광협이 정위를 맡은 목단강군구에는 조선족부대가 많았다. 목단강시에서 조직한 고려경찰대가 군구 14퇀 3영으로 편성되였다. 영장 류창권, 교도원 리청송. 목단강시교와 부근 각현의 조선청년들이 모여 15퇀 3영으로 편성되였다. 영장에 정구익, 교도원에 조석만. 목단강시 수비임무를 맡은 보안퇀 2영 영장은 김장권, 교도원 강운학, 부영장 정우. 녕안 와룡향, 강남향, 란강향 등 여러 향의 조선족자위대로 편성된 경위퇀 퇀장은 한족인 왕경곤이고 정위 역시 오씨성을 가진 한족이며 부퇀장 김봉국과 부정위 김진호는 조선족이다. 이 부대 2영은 전부 조선족으로서 영장에 김봉규, 부영장에 장응천이다. 녕안현 동경성의 여러 조선마을 조선족치안대 350여명이 모여 4퇀 4영이 편성되였는데 영장은 박학보이고 부교도원은 장동식이였다.

박락권부대에 참가했던 정관채로인

목단강군구뿐만 아니라 북만의 합강군구(合江军区)에도 유명한 조선족부대인 《동철부대》가 있었다. 합강군구 1퇀 2영에 편입된 이 부대 영장은 한족인 류곤(刘坤)이였고 교도원 김동철(金东哲), 참모장 김해정(金海静)이하 600여명 장병은 모두가 조선족이였다.

이밖에도 허태동(许泰东)이 조직한 목릉현조선독립영을 비롯해 빈현(宾县), 오상(五常), 상지(尚志), 연수(延寿), 파언, 수화(绥化), 수릉(绥棱), 덕도(德都) 등 많은 현에 모두 200여명 규모의 조선족독립대대가 있었고 동흥(东兴), 의란(依兰), 계서(鸡西), 해림(海林), 동녕(东宁) 등 현에 100여명 규모의 조선족중대가 있었다.

《8.15》광복후 쏘련군과 함께 동북에 진출한 항일련군 지도간부들은 중국공산당 중앙과의 련계를 회복하고 당조직을 발전시켰으며 각 곳에서 공산당의 부대를 조직했다. 동북각지의 조선족은 조선독립동맹을 통해 공산당의 정치주장을 지지하면서 공산당부대에 적극 참가하여 흑룡강성 할빈지역, 목단강지역, 가목사지역, 길림성의 길림지역, 연변지역에 대량의 조선족 독립대대, 경찰대, 경비퇀, 보안퇀이 나타났다. 이들은 토비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사회치안을 유지했으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쟁할 준비를 했던것이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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