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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산원사 달탐사 《천리안》시대 열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4.15일 20:02

강경산 원사.(사진 / 인민넷 김홍화)


중국과학원 우주과학및응용연구쎈터, 중국 우주항공연구분야의 최고두뇌가 집결해있는 곳이다. 우주물리와 우주환경, 마이크로파리모트센싱, 전자정보분야의 과학자들이 이곳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업적으로 인류의 미래를 밝혀가고있다.

이속에는 세계를 이끄는 탁월한 업적으로 중국의 최고과학자로 손꼽히는 저명한 조선족과학자 강경산원사(75세)가 있다.


중국우주비행리모트원격탐지기술의 창도자이고 마이크로파 원격탐지기술의 대부로 불리우는 강경산원사는 중국우주비행사업의 3대 리정표로 되는 《동방홍인공위성》과 《신주유인우주선》, 《달탐사프로젝트》의 주요참여자로서 우리 나라 우주항공력사에 굵직한 한획을 그어왔다.

2007년 10월 24일은 중국우주비행사에서 오래 기억될 특수한 날이다. 중국의 첫 달탐사위성 상아1호 발사를 앞둔 사천성 서창(西昌)위성발사쎈터, 강경산원사는 초조한 마음으로 위성발사의 순간을 지켜보고있다.


마이크로파 원격탐측기술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달탐사에 리용된다. 중화민족의 천년의 꿈을 싣고 38만킬로메터 떨어진 창공으로 첫 려행을 떠난 상아1호위성에는 달탐사프로젝트의 부총설계사 강경산원사가 창도한 마이크로파 원격탐측기가 탑재됐다. 강경산원사의 오랜 꿈과 희망이 현실로 도래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기도 하였다.


무궁한 우주공간의 매력에 흠뻑 빠져 포기를 모르는 집념과 도전으로 하나 또 하나의 기적 같은 업적을 쌓아온 강경산원사는 이 순간 도전과 반전, 성공으로 점철된 자신의 과학인생을 뒤돌아보며 두눈굽을 적시고있다.


3년간 옷 한벌로 지탱한 고학의 나날들


강경산원사에게 있어 무궁한 우주공간과 밤하늘을 비추는 밝은 달은 고향과도 같은 그리움과 어머니품과 같은 포근함을 지켜주는 과학탐구 그 이상의것이였다.


어린 시절 휘영청 밝은 달이 비쳐지는 여름날 저녁 어머니품에 안겨 어머니가 불러주던 동요 《반달》을 자장가로 들으며 꿈에 실려 달나라려행을 하던 가난한 농민가정의 아이, 달속에 있는 계수나무와 옥토끼는 어떻게 생겼는지, 상아가 춤을 추고있는지, 은하수는 어떤 강인지, 모든것이 궁금했다.


강경산은 1936년 연변 룡정의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여났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다섯살나던 해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섯 아이를 부양하는 중임이 섬약한 어머니의 두어깨에 떨어졌다.

어머니는 남정네들도 꺼려하는 일들을 닥치는대로 하고 자갈치기와 두부장사까지 하면서 자식들의 공부뒤바라지만은 놓지 않았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철이 빨리 든다. 학교에서 돌아온 강경산은 형님들을 따라 자갈치기에 나섰고 콕스도 주었다. 어린 마음에도 공부를 잘해 출세를 하면 어머니가 고생을 안해도 되고 굶주림도 없다는 생각에 열심히 공부했다.

1949년,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의 명문중학교 룡정중학에 입학한 강경산은 중학시절에도 공부를 잘해 해마다 현장상과 장학금을 탔다.1952년 수석으로 룡정중학을 졸업한 그는 기타 두명의 학생과 대도시의 고중에 가 공부할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 당시 룡정중학이 우수졸업생에게 주는 최고의 장려였다.

그해 8월 강경산은 형님 친구의 안내로 북경시 고중들을 찾아나섰다. 8월 중순이였던차라 북경시의 학교들은 입학시험이 거의 끝났다. 동단부근의 사립중학교인 대동중학교를 찾아가보니 3일후에 입학시험을 치지만 시험등록이 끝나서 안된다고 했다.


태여나 여직껏 처음으로 이렇게 머나먼 수도에까지 왔는데 시험도 못 보고 돌아갈수는 없었다. 강경산은 친구들과 함께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서툰 한어에 손짓발짓까지 하면서 천신만고끝에 여기까지 왔는데 꼭 기회를 달라고 사정했다.


람루한 옷차림에 책보따리를 메고 수천리 떨어진 변강에서 온 소수민족아이들을 보고 교장선생님은 감동되여 시험을 쳐보고 성적이 우수하면 받아준다고 응낙했다. 강경산은 수학, 물리, 화학 시험은 자신이 있었지만 한어는 차한편이라 하는수 없이 어문시험은 조선어로 답안을 적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학교에서는 수학, 물리, 화학 성적이 우수한 강경산의 어문시험지를 중국주재 조선대사관에 보내여 점수를 매겼다고 한다. 물론 강경산은 순조롭게 대동중학에 입학했다.

시골의 조선족소년들이 자기의 노력으로 수도 북경의 고중에 입학했다는 그 자체가 그 년대에는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일이였다.


학교에서는 변강에서 온 가난한 조선족학생 강경산에게 조학금까지 주면서 공부시켰다. 가정의 경제지원이 없이 조학금으로 생활하다보니 강경산의 생활고는 이루 말할수 없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3년 동안 옷 한벌밖에 없었던 그는 추운 겨울 밖에 나갈 때면 하냥 뛰여다녔고 때론 동창들의 옷을 빌려 입으면서 추위와 더위를 이겨가기도 했다.

아무리 생활이 힘들고 어려워도 강경산은 하냥 행복했다. 훌륭한 교원들의 가르침으로 마음껏 공부할수 있었고 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을 읽을수 있었기때문이다.


북경 대동중학 3년간의 고중생활에서 강경산은 학급의 수석자리를 놓친적이 없었고 2학년부터는 학생회 주석으로 활약했다. 그가 고중졸업을 눈앞에 둔 1955년 나라에서 우수한 고중졸업생을 쏘련에 류학보낸다는 첩보가 전해졌다.

그해 있은 쏘련류학생선발 전국통일시험에서 강경산은 평균 93점의 높은 성적으로 대동중학에서 유일하게 쏘련류학시험에 합격하였다.


1956년 8월, 1년간의 어학공부를 끝낸 강경산은 쏘련 레닌그라드 울리야노브전자공정학원 무선전학부에 입학했다.

이 대학은 무선전의 아버지로 이름 높은 무선전발명가 뽀뽀브원사가 창설한 대학으로 쓰딸린상 수상자를 비롯한 많은 우수한 과학자들을 배출한 대학이다. 그가 무선전학부를 선택한것도 머나먼 달나라의 비밀을 알아낼수 있다는 신비한 힘에 끌렸기때문이다.


1957년, 쏘련은 세계에서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첫 우주인 가가린을 우주로 보내 명실공히 우주시대를 개척했다. 오매에도 그리던 창공을 자유롭게 비행하는 기술, 강경산은 우주과학의 신비한 매력에 깊이 빠져 학교에서 연구기관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학업에 열중했다.


5년간의 류학생활에서 강경산은 우주과학의 중요한 리론과 실천경험을 터득하게 되였고 또 나라를 위해 무언가 기여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가지게 되였다.


26세에 중국우주과학연구대오의 일원으로

귀국한 강경산은 중국과학연구의 최고전당인 중국과학원 지구물리연구소에 배치받았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그는 이곳에서 로케트의 위치확인 과제 연구에 착수함으로써 중국우주과학연구대오의 젊은 연구원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며 자기의 리상의 나래를 펼쳤으며 후에는 인공위성을 고공에까지 운송하는 운반로케트의 위치확정문제를 해결하는 첨단과제를 맡아 동방홍 인공위성 발사에 한몫을 담당했다.

《문화대혁명》기간 터무니없는 루명을 쓰고 로동개조를 받는 렬악한 환경에서도 우주과학에 대한 강경산의 탐구의 길은 꾸준하게 지속됐다.

강경산은 그 시기 드물게 접촉할수 있었던 외국자료더미에서 마침내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했다. 리모트 센싱—원격탐측기술, 인공위성이 우주에 진입한후에 형성된 새로운 우주탐측기술이였다.


리모트 센싱은 1965년 미국 국립항공우주국 나싸를 중심으로 한 연구기관이 《인공지구위성을 리용하여 지구환경과 자원을 조사하는 기술》이다.

우주시대에 가장 생명력이 있고 참신한 전략적 과학기술이라고 생각한 강경산은 1970년부터 3년간의 조사연구를 거쳐 보고서와 론문을 작성했다. 그는 자신의 론문과 보고서를 당시 중국 국방과학기술위원회 부주임을 맡고있던 전학삼에게 보냈다.

전학삼은 과학자의 혜안으로 이 기술의 가치를 찾아낸 강경산의 가치를 발견했다. 전학삼은 강경산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면서 모든 정력을 마이크로파촬영과학에 기울일것을 요구하였으며 이때로부터 우리 나라 원격탐지기술에 대한 연구는 정식 가동되였다.


1981년, 전학삼은 강경산에게 미국에 가 관련 기술을 더 연구할것을 건의했다. 미국 캔사스대학에서 강경산은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이며 마이크로파 원격탐측기술의 창시자인 RK. 모르교수와 함께 마이크로파 원격탐측기술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이 기간 그는 모르교수와 함께 세계에서 처음으로 《원격탐지물 마이크로파 개전성 현장 측량방법》의 새로운 원리를 제기했고 이 원리를 북극 빙천 탐측에 응용했다. 1983년 강경산은 높은 대우의 초빙도 마다하고 단연히 귀국했다.

모르교수와 함께.(사진/인민넷 김홍화)


마이크로파 원격탐측기술의 새 장 열어


귀국한 강경산은 마이크로파 원격탐측분야에서 세인이 주목하는 인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10여년 동안 지속된 그의 연구성과가 드디여 두각을 나타내는 순간이였다.

1985년, 강경산은 고공비행기에 원격탐측기를 탑재해 홍수재해구의 상황도를 찍어 결책기관에 넘겨줬다. 이 원격탐측기는 지면 상황도를 3만 6000킬로메터 떨어진 고공의 인공위성에 전송하고 인공위성이 다시 그 수치를 지면 지휘부로 전송했다. 마이크로파 원격탐측기술의 리용은 자연재해 탐측에서 우리 나라의 큰 문제를 해결하여 10%가량의 경제손실을 줄일수 있게 됐다.


이 기술은 1996년 863계획 10년 총화시, 국제적으로 앞장선 10대 기술의 하나로 선정됐다. 그후 미국에서도 자연재해 즉시 검측 시스템이 제작되여 중국의 기술이 미국보다 앞선것으로 인정됐다.

1990년대초부터 강경산은 선후로 유인탑재우주비행선 응용분야 론증팀의 부팀장, 부총지휘 겸 신주4호 주요 페이로드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시스템의 주임설계사를 맡았으며 1999년에는 중국공정원 원사라는 최고영예를 받아안게 되였다.


2002년 12월 30일, 신주4호 우주비행선이 주천위성발사쎈터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돼 예정궤도에 들어섰다. 주요 페이로드인 마이크로파 원격탐측기는 신주4호 우주비행선을 타고 처음으로 우주려행을 떠났다.


신주4호 마이크로파 원격탐측기술의 수석 설계사 강경산원사가 주도로 진행한 연구과제가 종합적인 점검을 받는 순간이기도 했다.

신주4호 우주비행선 앞부분에 장착된 마이크로파 원격탐측기, 이 《 천리안》은 강경산원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구름과 우뢰의 제한에도 끄떡않고 망망한 우주에서 해양과 대륙의 대기를 탐측했으며 4개월 운행을 통해 많은 가치있는 정보와 수치를 배송해주었다.


수십년간 강경산원사의 두손에 의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온 중국의 마이크로파 원격탐측기술은 우주비행분야에서 일익을 담당하면서 응용분야에서도 좋은 성과를 가져왔다. 마이크로파탐측기술은 대기와 해양, 환경, 농업, 자원, 재해 검측 분야에 응용되였고 특히는 자연재해의 원격탐측에 리용돼 많은 경제손실을 줄여주었다.

달탐사프로젝트—《천리안》


달탐사프로젝트 응용총체부 총설계사인 강경산원사는 2007년 11월 26일 드디여 상아1호 위성이 전해온 세계의 첫 달표면사진을 접하면서 어릴적의 아리숭한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어머니가 자장가로 불러줬던 “반달”노래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2009년, 달탐사 및 지학과학 세미나에서 강경산원사는 그가 그려낸 마이크로파달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상아1호가 탑재한 마이크로파달탐측의기가 전송한 달은 지금까지 인류에게 미지의 세계였던 달 뒤면의 지질상황을 낱낱이 반영했고 달 토양층의 평균두께는 5~6메터, 헬륨3의 함량은 100만톤 가까이에 있다고 추정, 이는 미국 아폴로우주비행선이 달에서 가져온 샘플에 근거한 수치보다 훨씬 정밀한 수치에 달하는것이였다.

2010년 10월 1일, 사천성 서창 위성발사쎈터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된 상아2호, 상아2호 위성에 탑재된 《천리안》 마이크로파 원격탐측기는 오늘도 40만킬로메터 떨어진 창공에서 중요한 과학임무를 수행하고있다.


중국의 첫 인공위성—동방홍 1호 위성 프로젝트로부터 유인 탑재 우주선, 달탐사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중국우주항공의 리정표에는 언제나 조선족과학자 강경산원사의 심혈이 고스란히 슴배여있다.


어린시절 초가집 창호지 구멍으로 달나라를 동경하며 꿈과 리상을 키워왔던 시골 소년이 국가 달탐사 프로젝트의 천리안시대를 열어놓은 수석 과학자로 인류을 위한 탁월한 업적을 이루기까지 이 기나긴 삶의 려정에는 언제나 강경산원사의 우주과학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마음과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하는 경이로운 헌신이 뒤따랐기때문이다.


오늘도 75세 고령인 강경산원사는 우리 민족 동요 《반달》노래를 즐겨들으며 미지의 우주세계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있다. 푸른 하늘 은하수를 건너 구름나라, 달나라를 지나 그 어디론가 계속되고있다.


/중앙인민방송국 리영실 글,인민넷 김홍화 사진

편집/기자: [ 장춘영 ] 원고래원: [ 중앙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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